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84화 (484/489)

◈ 484화. 당신께서 바라신다면

무언가를 한 번만 보고 습득한다?

작디작았던 숲의 정령.

하이엘에게 그러한 재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당신께서 바라신다면.’

하이엘의 동공이 가라앉는다. 주군의 따스한 배려로 화염의 정령왕 피닉스의 진노가 느릿하게 보인다. 뜨거움을 넘어 통증으로 착각할 정도의 열기 또한 선명해진다.

부끄럽게도.

‘혼자였다면 저는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고작 첫 번째 시련 앞에서.

화톳불에서 한 선언은 일찌감치 잊어버린 채.

자신의 각오는 꺾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군께선 간파하고 계셨던 거겠지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제 나약함을.’

하이엘은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평가 혹은 기대보다 자신의 실체는 보잘것없다고. 그러나 주군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주군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도록 흐드러진 날개를 필사적으로 펄럭여 왔다.

‘그렇기에 고민해 왔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주군의 행보를 지켜봐 왔다. 실로 믿지 못할 발자취의 연속이었다. 겉만 그럴싸한 자신이 함께 걸어도 되는가, 의문이 생길 정도로.

더욱이.

‘제 존재가 주군께 방해되지는 않는지를…….’

첫 세계수의 축복.

어찌하여 엘프들이 축복에 그토록 분노했는가?

그건 주군과 자신이 세계수의 축복을 독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하이엘은 의문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게 깃든 축복조차 주군에게 깃든다면……?

주군께선 앞으로 겪어야할 시련들을 무리 없이 극복해 낼 수 있으신 게 아닌지, 어쩌면 이미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나의 존재 때문에 발목이 잡혀계시는 게 아니신지…….

고된 시련이 하이엘의 정신을 피폐하게 한 순간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튼 생각을 떨치게 했다.

“자연조차 꾸짖는 {세계수의 진노}를 실현할 시간이다.”

하이엘은 의도를 파악했다.

‘주군께선 제게 기회를 주신 거겠지요.’

어쩌면 이건 또 하나의 증명일지도 모른다.

‘저의 쓰임새를 증명하는 자리를.’

이 또한 축복의 영향일까.

과거, 하위 숲의 정령이었던 자신은 알지 못하는.

{자연계}의 지식이 머릿속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자연의 진노.

오직 정령의 왕들만이 발현할 수 있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적을 압도하는 {자연계} 최강의 일격. 하이엘은 피닉스의 진노를 온몸으로 느꼈다.

단순하게 타오르고 있는 게 아니다.

자연조차도.

피닉스의 강렬한 열기에 울부짖고 있구나.

하이엘의 입술이 열린다.

“분노가 향해야 할 대상이 잘못되었군요.”

피닉스가 흠칫했다.

‘……다르다.’

그 기척이 어딘가 모르게 달라지지 않았는가?

겁화 속에서.

저항조차 하지 못하던 나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슥.

그 손을 뻗어서 날뛰는 화염을 어루어 만지는 모습을 보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그 손길이 다정했다. 더욱이 그녀의 음성도.

“아이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피닉스.”

“……!”

마치 어머니가.

세계수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면 이러한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착각하게 할 정도로 온화한 음성이었다.

피닉스의 시선에 하이엘에서 호열에게로 옮겨갔다.

“무슨 허튼짓을.”

시간의 흐름조차도 제어했으니.

감각을 흐리게 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일 터.

분명, 나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려는 속셈이다.

화르르륵.

그러나 그깟 마법 따위 토대가 되는 마력 입자를 완전히 불살라 버린다면 효과도 사라지겠지. 피닉스가 더욱 거세게 겁화를 불태우던 순간이었다.

스오오오.

호열을 집어삼키고도 남을 정도로.

흔적도 없이 불사르고도 남을 정도로.

거센 화염이 휘몰아치려던 순간이었다.

“정말로 듣지 않고 있군요.”

더 이상 온화하지만 않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엇이 정령들을 위해서죠?”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건 훈계였다.

하이엘의 뒤에서 흐릿한 형체가 보인다.

그것은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

“……어머니?”

그렇다.

클라우디, 그가 말한 대로.

자연조차 뛰어넘는 세계수의 진노가 실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피닉스는 굴하지 않았다.

“아니다, 무엇이 나의 어머니란 말이냐? 아르카나 대륙의 드래곤, 엘프와 우리는 명백히 다르다. 우리는 자연계에 쥐죽은 듯 숨어서 대륙을 지켜보는 게 고작이었다.”

이대로는 억울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순종한 우리에게 돌아온 건 무엇인가?”

화염의 정령왕은 순수로 돌아가 묻고 있었다.

“무엇도, 아무것도 없었다!”

세계수여, 그대는 어찌하여 우리를 무관심으로 대했는가?

우리가 진정 그대의 자식이 맞기는 하는 것인가.

순수한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오직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그러나.

세계수는 그러한 투정조차 받아들이는 만물의 어머니였다.

하이엘의 뒤에 떠오른 세계수의 형상이 더욱더 찬란하게 빛난다.

그 나뭇잎이 흐드러진다.

세계수가 하이엘의 입을 통해서 제 뜻을 전한다.

“무관심이 아니었단다.”

“……거짓말이다.”

“그저 너희가 대륙에 쓰일 시기를 기다렸을 뿐.”

“……우리가 대륙에 쓰일 시기?”

“대륙에 비로소 너희의 순수함이 필요한 시대가 왔으니.”

허락이 떨어진다.

“이제 나아가도 좋단다, 나의 아이들아.”

그 순간, 피닉스의 시야가 점멸했다.

“……대체?”

찬란한 빛 속에서 보였다.

자연계가 아닌.

그토록 갈구하던 아르카나 대륙의 풍경이.

*

점멸하는 시야.

[아르카나 대륙에 ‘순수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자연계- 화염의 영토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제부터 자연 상태의 화염 속성 정령들이 아르카나 대륙에 출현합니다. 화염 속성 정령들의 순수한 행동이 아르카나 대륙에 부흥의 불길을 불러일으킵니다.]

항상의 자세.

언제나처럼 꼿꼿한 목과 허리.

그 바람에 나는 눈알만 슬쩍 굴리고 있었다.

‘하이엘……. 너, 맞지?’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본 거냐?

일단, 놀란 가슴부터 진정시켜 보자.

“이것이 대륙의 풍경인가……!”

불닭…….

아니, 피닉스.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데.

감격에 겨운 눈물 같은 건 조금 이따가 흘려라.

우선, 내가 하이엘의 부름에 응답한 이유?

당연한 판단이었다. [첫 세계수의 축복]엔 그 총량이 정해져 있다. 그동안 내가 사기적인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를 누릴 수 있던 이유가 뭐였는데?

‘엘프가 치를 떨 정도의 편애.’

수백 명의 엘프들이 나눠 가지고 있던 세계수의 축복을 나와 하이엘, 둘이 독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세계수의 축복을 증명하는 자리엔 반드시 내가 있어야만 했다.

‘하이엘, 혼자선 역부족일지도 모르니까.’

처음엔 잘한 판단이라고 여겼다.

[※주의 : 현재 필드가 당신을 적대 중입니다.]

플레이어를 적대하는 필드라니. AAU도 기겁할 정도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거든. 비유하자면 극도로 악의적인 던전 혹은 미궁에 갇혔다는 표현이 맞았다.

한마디로 내가 밟고, 보고, 느끼는 모든 요소가 하이엘을 적대하고 있었으니까. 과연, 자연 그 자체라 불리는 정령의 권능이라고 할 만했다.

‘그래서 머리를 굴렸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나는 정령들의 {자연} 능력에 관한 지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으니.

피닉스와 같은 정령인 하이엘에게 과제 아닌 과제를 내줬다.

‘근데, 이건 기대 이상이 아니라…….’

낯설 게 느껴질 정도의 급성장이잖냐, 하이엘?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이건 벽을 허문 걸로도 모자랐다.

번데기 속에서 나비가 깨어났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두께의 번데기를 뚫고서.’

왜, 누구의 거울이자 분신인 덕분에 정령왕보다도 고귀한 취급을 받았던 하이엘 아니겠냐. 하지만 지금의 증명을 통해서 하이엘은 그런 취급조차 능가하는 모습으로 탈피한 듯싶었다.

그 증거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런.”

어느덧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화염의 정령왕.

피닉스가 정신을 추스른다.

그러고는 하이엘을 향해 몸을 돌린다.

“화염의 정령왕, 피닉스가 당신께 용서를 구합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비단, 피닉스뿐만이 아니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스템 메시지에 따르면.

‘저건 내 눈에만 보이고 있는 게 아니겠지……?’

무수한 하위, 중위, 상위 정령들.

화염의 정령왕, 피닉스 아래 모든 화염의 정령들이.

하이엘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역시, 나보다 낫구나. 하이엘.’

그래서 {세계수의 진노}가 실존하는 거냐고?

그럴 리가.

모든 건 말 한마디도 지고 싶어 하지 않은 내 주둥이가 멋대로 내뱉은 것이었다. 그러나 설령 실존하지 않을지라도 보란 듯이 상황을 해결한 하이엘이었다.

‘이러면, 나만 번데기에서 벗어나면 되겠는데.’

물론, 내 번데기엔 철면피까지 덧대져서 하이엘의 것보다도 단단하기 짝이 없을 터. 자력으로 탈출하기까진 멀어도 아직 한참 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만…….

‘어쨌든, 다행이다.’

증명은 개뿔, 그래도 타죽을 뻔한 상황은 면했구나.

내가 안도의 숨을 내쉬던 순간이었다.

용서를 구하는 피닉스에게 하이엘이 대답을 내놓았다.

“그대가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건 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뭐냐, 이 불길한 예감은.

슥.

무한한 충심이 가득한 하이엘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제게 축복을 나눠주신 주군을 향해야겠지요.”

아니, 하이엘 알잖아?

나는 남의 업적을 가로채고 그러는 나쁜 놈이 아니라니까?!

그리고 피닉스가 저 불같은 성격에 인간인 내게 잘도 머리를…….

“축복을 나누다라……. 불완전함의 이유가 그것이었군요.”

……어라?

“세계수의 축복을 목격하고도 알아차리지 못한 제 식견을 용서하십시오, 클라우디시여.”

야, 너도 그럴싸하다고 막 납득하지 말라니까?

‘진심으로 좋을 게 없다.’

이런 상황을 숱하게 경험한 덕분에 얻게 된 교훈.

그랑펠의 성질머리와 함께인 이상.

누군가와 엮이게 됐을 땐 반드시 개고생이 따르게 된다.

더 나아가서.

‘콩가루 집안이잖아, 여긴?’

그렇지 않아도 콩가루 풀풀 날리는 세계수의 족보였다.

아직 악과를 삼킨 악룡들조차 해결하지 못했거늘.

정령들과 엮이게 됐다가는…….

‘뭣보다 파이몬, 그게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조금도 예상할 수 없는 사고방식.

나의 마계 진입이 미뤄지지 않도록 안토니움을 류오쥔춘에게서 지켜냈던 파이몬이었다. 같은 이유로 아르카나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정령들을 짓밟아도 이상하지 않을 터.

‘그러니까 제발 입방정은 떨지 말자.’

내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순간이었다.

……반짝.

다시금 시야가 점멸하기 시작했다.

[퀘스트를 성공하셨습니다.]

[퀘스트를 성공하셨습니다.]

[퀘스트를 성공하셨습니다.]…….

그렇군.

다들 얌전히 우리의 증명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거였어.

비단, [히든 퀘스트 : 화염의 증명]만이 아니었다.

피닉스를 대하는 하이엘의 모습을 목격한 덕분.

더 이상의 증명은 무의미하다는 거겠지.

그런데…….

하나.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하나.

하나가 비었다.

[히든 퀘스트 : 대지의 증명]

대지의 정령왕, 오리에드.

오리에드는 세계수의 축복을 증명하길 원한다.

대지의 시련을 극복하고 세계수의 존재를 증명하라.

-자연계 : 대지의 영토에 진입하라. (실패)

대지의 정령왕, 오리에드.

하나의 정령왕이 아직 하이엘.

그러니까 세계수의 축복을 부정하고 있었다.

이유야 알 수 없다만, 딱히 뭐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내 목적은 이런 게 아니었거든.’

내가 하이엘을 통해 정령왕들을 소집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르카나 대륙 소식에 누구보다 밝은 정령들을 통해 프로토타입 균열에 휘말려 행방이 묘연해진 이들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간과할 수 없었다.

퀘스트 실패.

그 아래에 새롭게 갱신된 퀘스트 목표.

-융합지성체 : 유그위드 뤼펭을 처치하라. (진행 중)

나는 냉랭하게 읊조렸다.

“이젠 그대가 증명할 시간이다.”

융합지성체.

유그위드 뤼펭이라니.

어째서 이런 퀘스트 목표가 떠오른 건지.

나의 육체에서 걷잡을 수 없는 마력이 휘몰아쳤다.

“단 하나의 의문도 없이 나를 납득시켜 보아라, 오리에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