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83화 (483/489)

◈ 483화. 부름 (3)

히든 퀘스트.

플레이어라면 그 단어를 목격하는 순간 설렐 수밖에 없을 거다.

대격변 이후 그렇지 않아도 흔치 않은 게 퀘스트인데.

숨겨진 퀘스트라니.

백이면 백, 혹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겠지.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히든이다, 메인이다, 클래스다, 갖가지 퀘스트를 수행해서 무뎌졌다는 배부른 투정이 아니다.

점멸하는 퀘스트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였거든!

“그렇군.”

머릿속을 스쳐 가는 정령학의 지식.

존재하는 속성 정령의 수만큼 히든 퀘스트가 떠올랐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어둠을 제외하고도 하나가 부족했다.

나는 그 하나의 존재감을 간과하지 않았다.

“드라이어드, 그대를 기억하겠다.”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

그래도 구면이라 그런가.

드라이어드는 하이엘에게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듯싶었다.

내가 정령들의 {자연계}에 대해서는 아직 지식이 부족하다만.

‘그래도 최소한의 따뜻함은 존재하네.’

물론, 퀘스트 내용은 그렇지 못했지만.

슥.

떠오른 순서대로.

여명의 재킷을 어깨에 걸치며 그 내용을 찬찬히 살핀다.

과연, 속성답게 화끈하게 첫 번째로 나서셨군.

[히든 퀘스트 : 화염의 증명]

화염의 정령왕, 피닉스.

피닉스는 세계수의 축복을 증명하길 원한다.

화염의 시련을 극복하고 세계수의 존재를 증명하라.

-자연계 : 화염의 영토에 진입하라. (진행 중)

보자, 다른 퀘스트 내용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증명이라 해도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그랑펠에게 증명이야 일상이었다고 했잖냐?

그리고 그런 그랑펠에게 시달리면서.

좋으나 싫으나 온갖 증명을.

과대평가를 실현하기 위해서 발버둥 쳤던 나였고.

그런 내가 바라보는 건 오직 목표였다.

“이번 행선지는 자연계인가.”

여기서도 플레이어의 입장으로 바라볼까.

‘뭐 어쩌라는 건가 싶을걸?’

정령이란, 평범한 이들은 목격할 수도 없는 존재.

계약 정령이야 일반인들에게도 그 모습을 비춘다고 하지만, 정령과 계약을 맺기 위해선 일단 자연 상태의 정령과 마주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정령들이 머무는 자연계?

환상과도 같은 공간이겠지.

정령학 선임 마법사, 페이얀 롯.

그녀가 집필한 서적에 그에 관련된 내용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정령은 자연계에 머무른다. 그러나 정령은 목격했어도 자연계를 목격했다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계에 진입하기에 인간이란 ‘순수’를 잃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존재이므로…….

──────

순수라.

‘나는 몰라도 그랑펠은 또 한 순수하거든.’

이렇게 하나의 목적.

긍지만을 추구하는 작자를 순수하다고 표현하지 않으면.

대체 누구를 순수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냐.

‘그래서 정령을 목격할 수 있던 거고.’

다만, 문제가 되는 건 그 자연계에 진입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자연계에 진입하는 방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페이얀은 그에 관해서도 계약 정령, 파이어 드레이크에게 물었었다.

──────

과거, 파이어 드레이크는 계약자인 필자를 자연계로 인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숱한 시도와 노력에도 필자는 자연계에 이르지 못했다. 몸이 가볍지 않기 때문인가. 금식도 모자라서 소맷자락에 숨겼던 음식까지 포기했지만…….

──────

금식이라니.

간식거리를 포기하다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구나, 페이얀 선임.

“그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

덕분에 웬만한 방법으로는 인간은 자연계에 진입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웬만한 방법은 이미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어서 새로운 방법을 개척한 [기이의 대종사]……!

나는 입을 열었다.

“기억하느냐, 하이엘.”

이미 증명을 진행 중일지도 모르는 하이엘에게 말을 건넸다.

그 대답을 들으나 마나 하이엘이라면 분명 기억하고 있겠지.

우리가 함께 나아갔던 기이의 길을.

정령의 {자연} 능력이 스킬이나 마법과는 또 다른 힘이라는 것쯤은 일찍부터 알고 있던 나다. 파악하고 있던 덕분에 일찌감치 기이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법의 구조를.”

나는 하이엘에게 『마법』을 가르쳤었다.

또 한 번 당연한 이야기.

하이엘은 나, 그랑펠의 분신이자 거울.

설령 그 시작은 하위 정령에 불과한 님프라고 했을지라도.

내가 과대평가를 실현해낸 것처럼.

하이엘도 과대평가에 맞는 힘을 거머쥐었을 터.

나는 말을 이었다.

“길을 열어라.”

우리 그랑펠 님께서 누구시냐? 증명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하시는 성질머리의 소유자이시자 남의 고생을 그냥 지켜보시지 않는 오지랖의 화신.

“나를 증명의 길로 인도하라.”

그와 동시에 안토니움 황궁.

“나의 이름을 불러도 좋다, 하이엘.”

스스스.

나의 개인실에 오묘한 마력이 일렁인다.

일반적인 마력이 아니었다.

{자연}이 깃든 하이엘의 기이한 마력이었다.

이윽고, 하이엘이 발현한 포탈이 허공에 발현된다.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포탈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자연계, ‘화염의 영토’에 진입하셨습니다.]

[업적, ‘낭만조차 닿지 못한 곳’을 습득하셨습니다.]

[※주의 : 현재 필드가 당신을 적대 중입니다.]

……이거 메시지부터 살벌한데?

*

화염의 정령왕.

피닉스.

그가 호언장담했다.

“유감이구나, 정령이여.”

그것은 더없는 진심이었다.

“너의 순교는 이곳에서 끝날 것이다.”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를 제외한 모든 정령왕들이 하이엘의 자질을 의심하던 순간. 그 의구심의 대상이 스스로 증명을 언급했다.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

정령.

모든 자연에 존재하기에.

그 누구보다 아르카나 대륙 소식에 능통하다.

이 순간 들려오는 이야기도 그러하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손으로 꼽히는 현인(賢人)의 행방이라든가, 오리에드가 총애했던 마법사의 최후라든가……. 정령들은 쓸데없는 이야기로 떠들기 좋아했다.

덕분에 피닉스는 익히 알고 있었다.

-“화룡이며, 염제며. 참으로 우스운 명성이다.”

화염, 그 자체인 자신을 두고 거창한 이명을 자처하는 인간들에 대해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피닉스의 감정은 격하게 타올랐다.

그러나.

-“순수라는 족쇄가 그대들을 살렸음에 감사하라.”

피닉스는 아르카나 대륙으로 나설 수 없었다.

자연계의 질서가 정령왕의 행보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네가 꺾인다면 그것이 증거가 될 테니까.”

어머니의 축복을 받은 정령이 시련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것은 어머니와 새로운 세계수들이 불완전하다는 증거이자 순수를 내던질 수 있는 합당한 사유가 될 테니까.

자연 그 자체를 다루는 정령왕.

필드가 하이엘을 적으로 여겨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다.

단순하게 변화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화염의 영토.

필드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가 하이엘에게 거센 열기를 내뿜는다.

화르르륵.

자연의 적대를 견뎌내다니.

과연, 어머니의 축복을 받았다는 건 거짓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무의미하다.

피닉스가 붉은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왕명은 가볍지 않은 법이니.”

하이엘, 그대의 증명은 이곳에서 끝이다.

끼에에엑.

인간으로 의태하고 있던 피닉스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화산의 최정상. 인간의 육신이 타오르고 살갗 아래에서 거대한 화염의 날개가 펼쳐진다.

화르르륵.

그와 동시에 왕을 경배하듯 솟구치는 필드의 화염.

그러나 같은 순간, 하이엘의 귓가에 들려오는 건.

피닉스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나의 이름을 불러도 좋다, 하이엘.”

들리는 것은 오직 주군의 음성.

“어찌 제게 주군의 이름을 부르라 명하시는지요…….”

하이엘은 이 또한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시련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주군께서는 이조차도 예비하셨던 걸까?

하이엘의 머릿속에서 기억이 스쳐 간다.

-“마법은 탐색, 간섭, 발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발현한 마법치고는 나쁘지 않구나.”

-“디엔드, 하이엘을 본받도록.”

이윽고, 하이엘의 입술이 움직였다.

“제가 감히 당신의 이름을 부르짖나이다.”

그리고.

“나의 군주, 이호열.”

허공에 빛 무리가 일렁였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시여.”

이번에도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피닉스가 흠칫했다.

“……!”

정령의 화톳불 앞에서 들었던 소리와는 미묘하게 달랐거늘.

더더욱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소리였다.

들려오는 소문에 밝기에 어찌 모를 수 있으랴.

피닉스의 부리가 움직인다.

“그 은발은 진정으로 클라우디로군.”

그것은 화염의 정령왕으로서 인간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나 다름없었다. 친애의 표시이자 인간으로서 {자연계}를 밟은 이에 대한 인사와도 같았다.

그러나.

“훌륭하다.”

“주군.”

“가르침을 잊지 않았군, 하이엘.”

그러한 찬사를 받은 당사자는 자신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호의는 무의미하리라.

펄럭.

피닉스의 날개를 펴고 하늘로 떠올랐다.

그러자 타오르는 홍염의 날개.

세상을 불태워도 이상하지 않을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호열의 시선은 피닉스를 향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구나. 포탈 내부의 흐름이 불안정했다. 간섭 과정에서 미숙함이 엿보였다. 보다 정진할 수 있도록.”

그러한 태도는 피닉스의 호전적인 성격에 더더욱 불을 지폈다. 그 자신감이 하이엘과 마찬가지로 세계수의 축복에서 나온다는 건 알고 있었다.

허나.

“건방 떨지 마라, 인간.”

세계수의 축복이 진정으로 전지전능했다면.

어머니.

당신께서 썩어 문드러질 일은 없지 않으셨을 터.

화르륵.

피닉스가 화력을 더더욱 끌어올리자 이젠 필드마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화염의 영토마저 모조리 녹아내려 용암이 되고, 용암마저 녹아내려 순수한 열에너지로 응축되었다.

오직 정령왕만이 통제할 수 있는 권능. 자연과 하나가 되어 적을 불사르는 {화염의 진노}가 발현된 것이었다. 그제야 호열의 시선은 피닉스를 향했다.

고오오.

일렁이는 호열의 육체.

마력이었다.

뒤늦게 나의 진노를 막아보려고 드는 것인가.

그러나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것은 네 녀석이 대적했던 화룡이나 염제를 자처하는.

인간 따위의 열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화염, 그 자체의 일격이란 말이다.

“!”

그러나 그 순간, 피닉스는 느끼고 말았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그렇다.

클라우디와 하이엘을 향해 쇄도하던 자신의 육체가.

그대로 허공에 멈춰버린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멈춘 게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 극도로 느려진 것이다.

그 증거가 마찬가지로 늦어진 클라우디의 행동에 있었다.

피닉스가 불의 일갈을 내뱉었다.

“쓸데없는 간계를 부리는구나, 클라우디. 이것은 정령의 왕이 내리는 시련이다. 간교한 재주로는 간파할 수 없단 말이다.”

그렇다.

자신의 진노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화염의 증명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을 붙잡아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냐? 보아라, 네 녀석의 사고 또한 느려지지 않았느냐.”

그러나 호열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역시나, 피닉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하이엘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자신의 분신이자 거울이기에.

자신을 쏙 빼닮은 하이엘에게.

“지금부터 과제를 내어주겠다, 하이엘.”

하이엘이 답한다.

“반드시 수행하겠습니다.”

호열이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지금부터 관찰하고 숙지하도록.”

피닉스가 흠칫한다.

‘……관찰하고 숙지하라?’

그 설마가 확신이 된다.

“자연조차 꾸짖는 {세계수의 진노}를 실현할 시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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