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2화. 부름 (2)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를 제외한 모두가 짐짓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하이엘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 계약을 맺던 순간부터 하이엘을 지켜본 드라이어드밖에 없었으니까.
다만.
“……설마.”
소식에 능통한 바람의 정령왕, 에어리얼은 짐작할 수 있었다.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온 목격담이 있기 때문이었다.
에어리얼은 기억을 되새겼다.
-“새로운 정령왕? 그럴 리가 있겠니.”
어린 정령들의 물음에 분명 자신은 그렇게 답했었지.
질문의 의도를 궁금해하지도 않았었다.
허무맹랑한 소문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게 당연했으니까.
“새로운 정령왕, 소문이 사실이었나……?”
에어리얼의 의미심장한 읊조림에 오리에드가 펄쩍 뛰었다.
당신……!
아까부터 답답한 짓만 골라서 하고 있잖아, 에어리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요?”
“오리에드…….”
“화톳불을 바라보세요.”
정령의 화톳불.
원형 탁자 위에 찬란한 빛무리가 발광한다. 정령왕 또는 정령왕에게 허가를 받은 이들만 입장할 수 있는 제한된 장소에 피어오르는 불길이었다.
오리에드의 시선이 각각의 왕들을 향한다.
“한 명씩 헤아려 보세요, 에어리얼. 당신, 본인을 헤아리는 것도 잊지 말고요. 자, 빠짐없이 다 헤아렸나요? 그래요, 정령의 화톳불 앞에 공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빈자리가 없기에 새로운 정령왕이 선출될 수 없다는 뜻.
그럼에도 분위기는 혼란스러웠다.
오리에드는 혼란이 탐탁치 않았다.
작은 중얼거림.
“빌어먹을 헛소문이 끊이질 않아.”
비단 새로운 정령왕에 관한 소문뿐만 아니었다.
자취를 감췄던 우주의 정령들이 아르카나 대륙에 복귀했다고 하질 않나. 그중에서도 가장 허무맹랑했던 소문은 존재하지도 않는 어둠의 정령왕에 관한 소식이었다.
‘이름부터 말이 되질 않았지.’
디엔드 크리시아드 이터널 다크니스라고 했나?
거창하기로는 진짜 정령왕인 자신조차 능가할 이름을 스스로 떠벌리고 다니는 정령이라니. 오리에드는 그따위 헛소문들에 자신의 계획이 흐려지는 걸 원치 않았다.
‘이대로는 순수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러니까.
도각.
오리에드는 가까워지는 기척에 집중했다.
말했다시피 정령왕.
혹은 정령왕에게 허락을 받은 이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공간.
오리에드의 까칠한 시선이 드라이어드를 향한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틀림없었다.
저 발소리의 주인이 화톳불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건 분명, 드라이어드의 허가가 있기 때문이리라. 오리에드는 그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둘 다 행동에 책임을 지길 바라죠.”
드라이어드와 에어리얼.
오리에드는 두 정령왕에게 쏘아붙인 뒤 흥분을 가라앉혔다.
변수가 생겼다면, 차분히 그 변수를 제거하면 될 일이다.
도각.
오리에드는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다른 정령왕들의 동조를 얻을 수 있을까.
‘제우스는 결국, 나를 따라 움직일 거야.’
번개의 아이라는 명확한 약점까지 생겼으니까.
오리에드가 계략을 구체화하던 순간이었다.
문득, 강렬한 열기가 느껴졌다.
“……피닉스?”
오리에드는 반사적으로 화염의 정령왕, 피닉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피닉스가 아니었다.
열기는 원탁 위 화톳불에서 발산되고 있는 것이었다.
화르륵.
“!”
정령의 화톳불이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시종일관 고고한 태도를 잃지 않았던 오리에드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무슨……. 설마, 생명력……?”
정령의 화톳불은 그냥 타오르지 않는다.
원탁 앞에 하나의 정령왕이 착석할 때마다 하나의 불씨가 더해져 비로소 모든 정령왕이 자리에 참석했을 때 오롯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게 화톳불이란 말이다.
그런데.
의문의 기척이 가까워진 것만으로 화톳불은 더욱 찬란하고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오리에드의 떨리는 시선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한다.
도각.
‘대체 정체가 뭐야……?’
이윽고, 정체가 드러난다.
“……!!!”
흐드러지게 뻗은 날개.
찬란하게 발광하는 의복.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품.
오리에드의 머릿속에 한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새로운 정령왕.’
그러나 오리에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럴 수밖에.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정령왕인 자신보다도.
저 이름 모를 정령의 위계가 더욱 높다는 것을.
‘정령왕보다 높은 위계? 있을 수 없어.’
오리에드가 펼쳐진 상황을 부정하고.
다른 정령왕들은 침묵을 지키던 순간.
음성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이름이었다.
“하이엘 크리시아드 포시즌 리프.”
……크리시아드?
‘그건……!’
헛소문에 불과하다 여겼던 어둠의 정령왕과 같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경악을 내뱉기도 전에.
더더욱 믿지 못할 이야기가 이어진다.
“부름에 응답한 그대들에게 경의를 표하겠습니다.”
부름이라니.
그렇다면.
우리, 정령왕들이 한자리에 모인 게…….
“……말도 안 돼.”
그녀, 하이엘의 부름에 의해서였단 말인가?
*
님프.
보잘것없었던 하급 숲의 정령은 자신의 왕이었던 드라이어드를 바라봤다. 주군과 계약을 맺었을 때 드라이어드의 축복을 받았던 하이엘이었다.
‘당신은 역시…….’
하지만 드라이어드에게 과거는 과거에 불과하다는 거겠지.
드라이어드는 유일하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해왔다.
하이엘은 명심했다.
‘주군께선 언제나 말씀하셨지요.’
노블레스 오블리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하이엘은 님프에 불과했던 자신이 {고유 정령}으로 거듭나게 된 이유를 잊지 않았다. 그렇다. 모든 건 만물의 어머니이신 세계수의 뜻이었다.
그러므로 하이엘은 무엇 하나 숨기지 않았다.
“가장 먼저 그대들에게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
“갑작스러운 부름이었겠지요.”
어떻게 정령왕을 한자리에 소집할 수 있었는가?
그건 첫 세계수의 권능이었다.
정령왕.
그들 스스로는 자각할 수 없을 테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자연스럽게 이 화톳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대들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오갈 곳이 없는 정령들을 거두어들인 것 또한 노여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하이엘의 말에 날카로운 말이 돌아온다.
“오갈 곳이 없는 정령들?”
오리에드였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자연계의 백성들은 자신의 왕만을 섬긴다. 숲의 정령은 오직 드라이어드만을. 불의 정령은 오직 피닉스만을. 그리고 대지의 정령은 오직 나, 오리에드만을……!”
오리에드의 음성이 격해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한결같은 어조의 대답.
“화톳불로 향하는 길에 거두어들였던 정령들을 여러분의 영토로 되돌려보냈으니, 의문이라면 직접 물어서 해결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이엘은 경고했다.
“버려졌던 가엾은 정령들을 추궁하지는 마시지요.”
“추궁? 그건 나의 권한……!”
“어머니께선 그러한 권한을 허가하지 않으셨습니다.”
황폐화한 대륙.
하이엘은 터전을 잃은 정령들을 안전한 클라우디령에서 보호했었다. 허나, 주군의 영지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는 건 원치 않았다.
배후에서 관조하시는 주군께선 불필요한 소란을 원치 않으실 테니까.
“어머니라니…….”
그 말에 오리에드, 그리고 그녀를 비롯한 모든 정령왕들이 하이엘의 존재를 자각했다. 그렇구나, 저 정령이 바로 어머니의 축복을 받았다던 그 정령이구나.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
지금 펼쳐진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자연계}에서 세계수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어머니의 축복을 받은 존재가 자신들이 모이기를 원했다면, 자신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화톳불을 찾은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누가 나의 어머니인가?”
장엄한 목소리가 울린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화염의 정령왕.
피닉스가 입술을 떼었다.
“나의 어머니는 이미 썩어 문드러져 가루가 되었다. 오리에드의 말이 옳다. 이 순간, 아르카나 대륙에 뿌리를 내린 세계수들은 나의 어머니가 아니다.”
화르륵.
불꽃이 하이엘을 위협하듯 솟구쳤다.
“나는 그토록 연약한 어머니는 둔 적이 없으니!”
에어리얼이 고개를 끄덕인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토니움 북부에 뿌리를 내린 세계수는 드래곤의 보살핌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요…….”
제우스가 그들의 말에 힘을 더한다.
“그 불완전함이 증거다.”
“그래요, 다들 저와 같은 생각이셨군요?”
“오리에드.”
“내 이름을 내뱉지 말아 주겠어요, 드라이어드?”
드라이어드는 상황을 바라보았다.
화톳불 앞에서 세력은 둘로 나뉘었다. 아니, 둘로 나뉘었다고 하기도 무색할 정도로. 자신을 제외하면 모두가 하이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그 행보를 지켜봤던 드라이어드는 하이엘에게 면목이 없었다. 나뭇잎처럼 흐드러진 자신의 유약함이 하이엘에게 불필요한 갈등을 제공하는 것 같았으니.
그러나.
“그렇군요.”
하이엘은 ‘누군가’를 쏙 빼닮은 존재.
“그대들에겐 증명이 필요한 거겠지요.”
그렇다,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드라이어드, 당신의 신뢰에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과대평가는 반드시 실현해내는 누군가였다.
증명하겠다.
하이엘의 선언에 정령왕들의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스오오.
긴장감 속에서.
정령의 화톳불이 마치 꺼지지 않는 성화처럼.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
습관은 참 중요한 법이지.
“후우.”
안토니움 본성.
제국 회의가 끝난 뒤.
곧바로 지긋지긋한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했다.
훈련량은 갈수록 늘어났다만, 이것도 이젠 익숙해진다.
“실로 가뿐하군.”
물론, 입방정처럼 진짜 가뿐한 건 절대 아니지만…….
팔다리가 진동하는 스마트폰처럼 떨리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도착했나.”
조금이라도 기력이 남았다면 쉬질 않는 게 이놈의 몸뚱이였으니, 나는 곧장 양피지를 펼쳤다. 안토니움에 진입하기 전, 마르셀로와 재회했을 때 받은 연구 자료였다.
『마계의 성서, 네크로노미콘의 연구 결과』
마계의 리치, 디스커스.
녀석이 드롭했던 [에픽] 등급의 아이템.
아무리 그랑펠의 머리가 똑똑하더라도 마계에 관한 지식까지 곧장 습득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나, 이호열이 머리를 굴린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래 봬도 마탑의 실세, 수석 마법사.
간만에 나의 직권을 남용…….
아니지, 합당한 권한으로 마탑에 연구를 요청했는데.
“기대 이상이다.”
네크로미콘의 연구는 마탑.
단독으로 진행한 게 아니었다.
이거,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공동 연구자들이 이름을 올렸군.
“마르셀로, 더는 미래를 우려할 필요는 없겠군.”
마탑과 AAU의 합동 연구서라니.
“마탑은 이미 기이를 향해 착실히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왜,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데.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의 브레인이라고 해도 무방한 두 세력이 머리를 맞대서 적어 내려갔다니.
스륵.
일단, 나는 그 목차부터 살폈다.
──────
0. 리치 디스커스
1. 마계에 발을 들이는 존재에게.
2. 왕들을 조심하라.
3. 이해할 수 없는 힘…….
──────
혼자서 훑어봤을 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내용이 그래도 읽을 수는 있게 풀어서 정리되어 있었다. 보자, 각주를 보아하니 디스커스 이 치밀한 해골바가지가……!
‘전부 암호였구나. 그러니까 안 읽혔지.’
어쨌든 고맙다, 마탑.
간만에 그동안 마탑에서의 개고생이 보답받는 느낌이다.
나는 목차를 읽어나가다가 시선을 끄는 항목 하나를 발견했다.
──────
마계 서부의 지배자, 존귀한 파이몬에 대하여.
──────
파이몬.
그는 확실히 지금까지 만난 악마들과는 무언가 달랐다. 단순히 상위 마왕이라서 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하기엔, 나는 가미긴과 부에르와도 조우하지 않았던가.
‘확실히 나를 알고, 적을 알 필요가 있지.’
그에 관해서는 그랑펠도 동감을 하는 건지, 주둥아리도 무분별한 악마 비하를 쏟아내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차분하게 연구 자료를 읽어나갈 수 었었다는 건 아니다.
반짝.
점멸하는 시야.
한 번이 아니다.
계속해서 갱신되는 메시지.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히든 퀘스트 : 화염의 증명]
[히든 퀘스트 : 대지의 증명]
[히든 퀘스트 : 얼음의 증명]…….
직감하고 말았다.
하이엘, 너로구나.
그런데, 아무리 닮을 게 없어도 그렇지.
“증명이라, 언제든지 환영이다.”
그놈의 증명 사랑까지 빼닮을 필요는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