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1화. 부름 (1)
전(前) 천하통일의 오성, 백성륜.
오성은 천하통일의 최고위 간부를 뜻하는 단어다.
초거대 길드인 천하통일에서 다섯 손가락으로 꼽힐 정도면.
그 능력이야 알만하겠지.
하지만 그런 백성륜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피를 뒤집어쓸 정도로 끔찍한 경험을 한 바람에? 아니, 나는 찻잔을 기울이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백성륜을 바라봤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안토니움, 어딘가의 주점.
백성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이곳 이 자리에서 용성락, 그는 일격에 참수당했습니다. 류오쥔춘의 세뇌에 휘둘린 게 분명한……. 검은 머리칼과 눈을 가진 사내에게 말입니다……!”
참수라니.
난데없는 용성락의 비보였다.
나는 속으로 침음을 삼키면서도.
검은 머리칼 사내의 정체를 특정할 수 있었다.
‘일출의 무사.’
분명, 시공간의 결투에서 [세뇌]를 해제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옥시딘.
아니, 류오쥔춘이 다시 개수작을 부린 모양이군.
스스스.
나는 되묻는 대신 마법을 발현했다.
격이 다른 발현력 덕분.
마력 입자가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생생하게 재연해 낸다.
“그대의 말을 믿겠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라도.
용성락의 시신만큼은 제대로 안치시켜야 하는 법이거늘.
한 가지 의문은 그의 시신이 어디로 사라졌는가다.
‘누가 치운 게 아니야. 증발하듯 사라졌다.’
스스스.
부자연스럽게 흩어지는 용성락의 마력 입자.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의 시신이 더는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인가.’
아홉 번째 왕좌의 마왕, 존귀한 파이몬.
용성락의 시신은 녀석에게 있는 거다.
나는 백성륜의 말을 되새겼다.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단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파이몬은 제게 말했습니다. 너는 목격자다. 나의 결백을 증명해 줄 목격자…….”
이건 몇 번을 되새겨봐도 쉽지 않은데. 파이몬에 관한 이야기는 이해심이 깊은 나, 이호열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사실 백성륜의 말을 핵심만 정리하자면 간단했다.
“미친놈의 말처럼 들리시겠지만……. 파이몬이 안토니움을 보호했습니다. 마치 이곳에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처럼. 유일한 목격자인 저만을 남겨둔 채 말입니다…….”
그래, 파이몬이 아니었다면.
정확하게는 파이몬의 화신체가 아니었다면.
안토니움은 지금쯤.
‘류오쥔춘 손에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대괴수로 성전 연합군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제국의 황좌를 차지하기 위해 안토니움에 잠입했다니. 옥시딘, 녀석의 정체가 류오쥔춘이란 걸 알았다면.
‘절대 방심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녀석의 집착은 나도, 그랑펠도 경계하고 있었으니까.
달칵.
나는 녹차를 완전히 비울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침묵하는 동안 입방정도 함께 정숙했다.
과연,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랑펠에겐 사냥감에 불과한 악마다.’
그중에서도 차원이 다른 악마인 상위 마왕은 재활용조차 불가능한 쓰레기로 여기는 바. 그런 폐기물 쓰레기 중 하나인 파이몬이 안토니움을 지켜냈다니.
나는 흠칫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폭주.
그 덕분에 뜻하지 않게 마주했던 파이몬은 악마답지 않게 격식이 넘쳤었다. 악마만 아니었다면, 그랑펠과 꽤나 죽이 잘 맞았을 인상을 받았단 거지.
덕분에 추측할 수 있었다.
‘설마 얌전히 마계로 돌아갔던 일의 연장선인가, 이거?’
파이몬이 원하는 것?
바로 나, 이호열의 마계 진입이었다.
출제자의 의도를 생각하고 상황을 지켜보니까.
‘백 퍼센트다.’
류오쥔춘에 의해 안토니움이 쑥대밭이 된다면.
나의 마계 진입은 더더욱 늦어지게 될 터.
파이몬은 그런 상황을 미리 방지한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나로서는 마냥 안도할 수 없는 일인데?
‘대체 나한테 왜 이래, 너?’
이토록 부담스러운 호의는 처음이군.
다른 악마도 아니고 상위 마왕의 호의잖아?
당장 지금의 나로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적이란 말이다.
‘마계……. 더 가기 싫어지는데.’
그러나 그랑펠 님께서 누구신가?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고.
무언가를 받았다면 되돌려줘야만 하는 성격의 소유자.
나의 입술이 그제야 움직인다.
“사냥감과는 말을 섞지 않는 게 원칙이거늘.”
“……???”
서늘한 말투에 일순간, 내게로 집중되는 주점의 시선.
익숙해지지 않는 수치심이었거늘.
겉으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허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처분에 반영하겠다.”
그래, 잘 생각했다. 그랑펠.
‘마주치자마자 치고받고 싸우기엔.’
파이몬에게 받은 호의 때문에라도.
사냥에 성공해도 상당히 찝찝할 것 같았거든.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악마 사냥꾼의 감각.
그건 나, 이호열의 상상 이상으로 뛰어났으니.
천적의 사고방식이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그것을 위해 용성락, 그의 시신을 챙겨갔을 테니까.”
그랬다.
내가, 그랑펠이 용성락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서라도 마계에 진입할 거라는 걸. 파이몬, 그 녀석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엔 호의만 베푼 것처럼 보였지만, 그 뒤엔 철저한 계산이 더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냥 마왕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파이몬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인 십좌의 마왕들이 득실거리는 마계로 진입해야 한다니. 이거, 이럴 때가 아니다. 이제부턴 앉아있을 틈도 없을지 모르겠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백성륜에게 물었다.
“행선지가 있나.”
천하통일은 일찍이 해산되었다. 한때 그의 군주였던 류오쥔춘은 누구도 아닌 파이몬에게 존재가 발각되었으니, 이제 두 번 다시는 망령처럼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거다.
백성륜이 답했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용성락과 접선했었습니다.”
하긴 둘에겐 천하통일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용성락이 사망한 시점에서.
백성륜의 행선지는 다시 묘연해진 것이다.
‘내가 따뜻한 말 같은 건 할 수 없는 성격이라.’
그러니 나는 그랑펠식 화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족쇄에서 풀려난 현재를 누리도록.”
“……!”
“어디로 향하든 그대의 자유다.”
“나의 자유…….”
그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나의 말을 곱씹는 백성륜을 뒤로한 채.
나는 주점을 빠져나왔다.
보자, 딱히 시간을 확인하지는 않았건만.
배꼽 시계 그 이상으로 정확한 그랑펠의 격식 시계가 경종을 울린다. 슬슬 성전 연합군이 집결한 제국의 회의가 곧 시작될 시간이라고.
또각.
나는 안토니움 본성을 향해 발을 내디디며 생각했다.
지금쯤 나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 중일 하이엘을.
걱정이 되기보다는, 어련히 잘하고 있지 않을까.
‘뭐, 디엔드도 아니고.’
나의 분신 1호니까.
다른 건 몰라도…….
우리 하이엘이 어디 가서 기죽을 일은 없겠지.
*
정령왕.
{자연계}의 지배자들.
대륙에 쉽게 모습을 비치지 않는 정령왕들이었다.
당연하게도 서로 간의 교류는 많지 않았다.
아니, 그러한 수준을 넘어서서.
“최근 아르카나 대륙에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요, 제우스? 당신을 쏙 빼닮은, 번개를 다루는 소년이 아르카나 대륙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닌다는 이야기요.”
민감한 화제를 들먹이게 할 정도였다.
뇌전의 정령왕, 제우스.
파지직.
그의 불편한 심기가 번개로 표출된다. 그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 건. 뇌전 속성을 상대로 상대적 우위에 있는 대지의 정령왕 오리에드였다.
그녀는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보자, 그 이름도 ‘번개의 아이’라죠? 누가 들어도 당신을 떠올리지 않겠어요, 제우스? 당신의 편력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만…….”
“거기까지 하게.”
“아무리 그래도 자연계의 경계를 넘어서 인간에게 손을 대는 건 정령왕으로서 격조가 떨어지는 일이 아닌가요? 진심으로 우려돼서 하는 말입니다.”
“세 번은 말하지 않겠네, 오리에드.”
스파크가 튀는 수준을 넘어서서.
뇌령의 형태로 일렁거리는 제우스의 육체.
오리에드는 그제야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거뒀다.
“그렇게 하죠.”
물론, 그녀의 수다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 그보다 소식 들으셨나요? 대괴수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답니다. 덕분에 제 아이들이 울상이 되었어요. 가는 곳마다 처참하게 짓밟혀서는…….”
다만, 누구도 오리에드의 말은 주의 깊게 듣진 않았다. 철저한 외면에 오리에드는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줄 이를 찾아 눈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쉽게 말해 재수가 없는 정령왕들 중에서 그나마 온화한 성격을 지닌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였다.
오리에드는 메마른 눈가를 가증스럽게 훔치며 말했다.
“드라이어드, 당신도 저와 같은 슬픔을 느끼고 계시겠지요? 드넓고 푸르른 숲과 그러한 숲에 머물던 정령들 역시 터전을 잃은 셈일 테니까요.”
끄덕.
드라이어드가 한 차례 고개를 주억거리자 오리에드는 슬슬 본론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래, 자신이 오늘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데엔 목적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저는 대지의 왕이 된 자로서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습니다. 더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믿고 따라야 할 구심점이 사라진 지금은 더더욱 말이죠.”
“……!”
오리에드의 말에 정령왕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구심점의 부재.
구심점이란 만물의 어머니.
세계수를 뜻하는 단어였으니까.
“물론, 새로운 세계수가 뿌리를 내렸다는 걸. 대지의 왕인 저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과연, 그 어린나무를 우리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리에드의 동공에 이채가 서렸다.
“이것은 저와 숲의 정령왕이신 드라이어드만이 알고 있을 사실이지만, 현재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하는 세계수는 하나가 아닙니다.”
그 말에 바람의 정령왕, 에어리얼이 덧붙였다.
“그건 저도 알고 있는 걸요.”
“그래요, 에어리얼? 당신도 알고 있었군요?”
오리에드가 싱긋 웃으며 정곡을 찔렀다.
“그런데, 왜 모르는 척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건가요?”
“……네?”
“당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더 이상 우리들이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걸. 두 그루의 세계수……. 아니지, 앞으로 더 많은 세계수가 싹을 틔울지도 모르는 상황인가?”
오리에드가 돌변한 음성을 다시 뒤집고는 말한다.
“여러분들은 그 모든 세계수를 어머니라 떠받들고 따르실 수 있나요? 정말로, 그 어린 세계수들이 우리의 자연계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제가 먼저 말하죠.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순수함을 잃지 않은 이들만이 목격할 수 있는 정령들의 자연계.
그건 정령들이 순수함을 잃지 않은 존재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오리에드는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양팔을 벌렸다.
“비로소 우리는 순수에서 벗어날 시간을 맞이한 겁니다.”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오리에드는 썩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침묵이지만 뜻하는 바가 다르다. 자신이 돌을 던졌으니, 다음 회의에선 반드시 파문이 돌아올 터.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정령들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정령들의 왕이 된 자들이라면 반드시 해결책을 간구해야 한다.
오리에드에겐 확신이 있었다.
“답은 하나입니다, 여러분.”
그 유일한 해결책은 정령왕.
자신들이 아르카나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뿐이라는 확신.
이쯤이면 됐나, 오리에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아직입니다, 오리에드.”
숲의 정령왕이 자신을 불러세웠다.
언행에 신중을 기하는 드라이어드가 자신을 멈춰 세울 줄이야.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그러나 오리에드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누군가’의 분신이자 거울이기에.
약속에는 절대 늦지 않는 존재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으니.
드라이어드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오셨군요.”
“……?”
오리에드는 흠칫했다.
정령계 위계질서의 최정점에 있는 존재.
정령왕이 경어를 사용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수준을 넘어서 드라이어드는 자리에서 기립.
천천히 가까워지는 기척 앞에서.
자신의 머리를 숙였다.
“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경악한 오리에드의 귓가에 소리가 들려왔다.
도각.
미묘하게 다른 구두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