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80화 (480/489)

◈ 480화. 천성의 악함 (2)

사념.

죽음조차도 꺾을 수 없던 류오쥔춘의 의지가.

처참하게 꺾여가고 있었다.

무력감에도 격이 있다는 것 같았다.

단칼에.

자신의 몸과 머리를 분리했던 엘프와 또 한 차원이 다르다.

머리가 바닥을 구르는 순간에도 꺾이지 않았던 류오쥔춘의 집념은.

“보자꾸나, 소란스러워서 좋을 건 없겠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는 파이몬에겐 아무런 감흥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류오쥔춘의 사념은 사고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가?

‘……이호열이라면.’

그래, 이호열이라면.

존귀한 파이몬.

저 상위 마왕에게 대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으로 적을 잡는 거다.’

류오쥔춘의 시선이 안토니움의 백성들을 향했다.

가능하다면 세뇌에 빠트린 초월자들의 손을 거쳐서.

백성들의 목숨을 주무르고 싶었거늘.

‘분명,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상태이상, [세뇌]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한들.

정작 초월자들이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한 수준을 넘어서서…….

“너를 보고 있자니 그러한 생각이 드는구나.”

옥시딘이라는 껍데기를 관통.

정확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고고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 순간, 파이몬의 동공에는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지만. 류오쥔춘에겐 파이몬의 시선을 마주할 정신이 없었다.

진정으로 의문인 건 초월자 쪽이 아니었으니.

‘……어째서냐?’

안토니움의 백성들이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린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겁에 질려 자신을 우러러보던 백성들이.

“오늘 과일이 아주 달달합니다.”

“어이, 저녁에 주점에서 한잔 괜찮나?”

“아빠, 우리 내일 성 밖으로 나가는 거 맞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래,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던 그 시절의 안토니움처럼. 당황한 류오쥔춘의 사념에게 이어지는 말.

“그대는 어찌하여 인간으로 태어났는가.”

“……?”

“그대의 악의는 마계의 어떠한 악마와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더럽고, 저열하고, 추악하기 그지없거늘.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대가 부럽구나.”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난데없는 모욕.

감정이 차올랐지만 표출할 수 없었다.

슈오오오.

“……!”

소용돌이치는 파이몬의 동공은 기괴함을 넘어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였기 때문.

파이몬의 진중한 음성이 이어진다.

그건 류오쥔춘의 사념에게도.

껍데기인 옥시딘에게도 건네는 말이 아니었다.

“악마가 아니기에, 그대와 잔을 맞댈 수 있었을 테니.”

……잔을 맞대다니?

류오쥔춘은 의미를 생각하려다가 관뒀다.

지금은 잡생각에 휘둘릴 때가 아니다.

죽어서도 꺾이지 않았던 나의 목적.

제국의 왕좌가 코앞에 있단 말이다.

‘왕좌만 차지할 수 있다면 나는……!’

히든 클래스, [폭군]은 진정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제국을 주무를 수 있는 [권한] 기능을 활성화한다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설령 천하통일이라고 해도 넘어설 수 없는 나만의 왕국을…….

“하지만 되었다.”

……뚜득!

파이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옥시딘의 육체가 비틀어진다. 사지가 종이인형처럼 구겨지기 시작하더니, 척추와 갈비뼈 최후엔 두개골마저 처참하게 구겨졌다.

마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처럼.

격통 속에서.

류오쥔춘은 이를 악물었다.

‘파이몬, 나는 죽지 않는다……! 아니, 죽을 수 없다!!’

강렬한 사념은 스킬, [폭군의 승계]의 존재를 망각하지 않게 했다.

누군가 나의 왕관을 뒤집어쓴다면.

옥시딘의 육체를 차지한 것처럼 나는 다시 부활할 수 있다.

저벅.

그러나 앞서 말했듯 파이몬의 소용돌이치는 동공은 정확하게.

류오쥔춘의 본질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이윽고 왕관이.

류오쥔춘의 사념이.

파이몬의 손아귀에 잡히고 말았다.

사념이라 거창하게 포장해도 결국.

손바닥 안의 아우성에 불과하단 소리였다.

“다시 보아도 호기심이 생기는구나.”

인간과 악마는 다르다.

존귀한 마왕으로 태어났기에.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파이몬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과 마주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너는 여러모로 내게 득이 될 존재다.”

마안(魔眼)을 통해서 목격한 새로운 세계.

그건 마계와도 아르카나 대륙과도 다른 모험가들의 세계였다.

그곳에선 혼혈의 악마가 날뛰고 있었다.

“네 천성의 악함은 혼혈, 피를 섞는 데에 영감이 될 테니.”

그 말을 듣는 순간.

『!』

폭군의 왕관에 깃든 류오쥔춘의 사념은 강렬하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를 받아들여라.

나는 네게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단 말이다.』

그러나 류오쥔춘의 갈망은.

파스스.

『……?!』

으스러지는 왕관과 함께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념도 마찬가지였다.

비로소 완전히 끝이었다.

파이몬은 완전히 소멸한 류오쥔춘을 보며 내뱉었다.

“믿을 수 없군.”

그러고는 평화로운 안토니움을 바라봤다.

동시에 기절해 바닥에 쓰러진 초월자들을 바라봤다.

모두가 자신이 원해서 행한 일이었다.

“그대와의 재회를 위해 내가 이런 일을 행할 줄이야.”

더 나아가 찰나지만, 인간을 부러워하게 될 줄이야.

파이몬의 화신체.

그 시선이 쓰러져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사내로 향한다.

“끔찍한 광경을 보았겠지.”

“…….”

“그러나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한 명 정도는 목격자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그래야만, 나와 그대 사이에 불필요한 오해를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이윽고, 찻잔을 들고 있던 파이몬의 손끝이 흩어진다.

전신이 먼지로 변해간다.

그 바람에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쨍그랑.

파이몬의 화신체는 할 일을 끝마쳤다는 듯.

완전한 먼지가 되어 아르카나 대륙에서 존재를 감췄다.

파이몬이 의도했기에 모든 사태를 목격한 사내.

백성륜.

그가 말을 더듬었다.

“……이, 이런 미친.”

내,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

나는 전해져 오는 소식들을 규합했다.

“대괴수, 두 마리째를 사냥한 시점에서 녀석들에게 변화가 포착됐습니다! 확실히 군주의 세뇌에서 벗어난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동부의 성전 연합군을 대표해 남철민이 말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다들 프로토타입 균열에서 적잖은 사투를 벌였다지.

나는 속으로 헛기침을 삼켰다.

‘크흠.’

용언을 통해 죄다 깨부순 탓.

나는 프로토타입 균열의 구조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만, 현실과 연결되어 있어 소통할 수 있었다는 게 플레이어들에겐 도움이 된 듯싶었다.

모든 회의는 언제나 엄격, 근엄, 진지해야 하는 법이거늘.

“이쯤하지.”

그랑펠의 고집을 간신히 꺾은 나는.

그쯤에서 회의를 해산했다.

무엇보다 다들 휴식이 절실해 보였거든.

‘한탕만 뛰어도 힘든데.’

프로토타입 균열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대괴수 레이드를 뛴 셈 아니겠어? 다른 플레이어들이 나처럼 [첫 세계수의 축복]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양해 좀 해라, 그랑펠.’

직후 나는 마르셀로와 대화를 나눴다.

“경께서 맺으신 값진 결실들을 목격했습니다.”

……값진 결실들?

‘또 뭘 본 건데, 아오!’

그동안 지어온 죄가 있어서 흠칫했거늘.

다행히도 내 이야기가 아니었다.

거대 연합의 세 길드 마스터.

“그들의 그것은 확실한 기이였습니다.”

그렇군.

셋, 모두 기이의 영역으로 진입한 건가.

사실 전부터 싹수가 보였지.

‘문고리를 붙잡고 있었다면 비슷하려나.’

그 재능이 어디 가지 않는다고.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부터 날고 기는 랭커들이었다. 나, 이호열은 그랑펠이 없었더라면 절대 도달하지 못했을 기이의 영역에 스스로 진입하다니.

칭찬하겠다.

그리고 나도 칭찬하겠다.

저런 든든한 아군을 포섭한 건 아주 잘한 일이다, 호열아.

그나저나…….

“마탑도 서둘러 경의 발자취를 뒤따르겠습니다.”

이름값이 참 중요하긴 했다.

[기이의 대종사]

솔직히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냥 어깨와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모른다고 구박하고, 나는 할 수 있다고 잘난 척한 거밖에 없는데……!

‘칭찬이 민망해서 얼굴을 들 수 없구나.’

그럼에도 역시나 내색은 하지 않는다.

그래, 마르셀로의 말에 우쭐거리기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유그위드의 마력흔은 포착했는가, 마르셀로.”

“송구하게도 조금도 포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군. 그대들의 잘못이 아니다.”

프로토타입 균열에 휘말린 게 분명한 유그위드와 대현자 라이즈. 대괴수가 변형시킨 필드는 원상 복구되었지만, 그들의 행적은 여전히 묘연했다.

그랑펠식 화법으로 사태의 원인을 내뱉는다.

“시간이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존재.”

프로토타입 균열에 휘말린 시간대도, 장소도 달랐으니까.

그러나 해결책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시간을 허비할 순 없겠지. 하이엘.”

나의 부름에 하이엘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이엘을 호출한 이유야 간단하다. 처음으로 유그위드와 라이즈, 오크 옥션에 관한 소식을 전해온 게 아르카나 대륙의 정령들이었으니까.

“하이엘 크리시아드 포시즌 리프.”

그, 우리 사이에 통성명은 필요 없을 것 같다만…….

“어떠한 명이라도 주군의 뜻대로 수행하겠습니다.”

저게 내가 말한다고 고쳐지기나 할까?

나는 포기한 채.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시간부로 모든 정령들을 소집하라.”

“……!”

나의 말에 마르셀로가 짐짓 놀랐다.

이론마법학의 창시자, 덕분에 현존하는 모든 마법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닌 마르셀로였다. 정령마법학에 관한 지식 또한 예외는 아닐 터.

마르셀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경, 송구하게도 제 부족한 식견이 말씀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인간계 못지않게 절차에 엄격한 정령계라고 해도, 그 위계는 같은 속성에만 적용되는 바…….”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이다.

숙성으로 분류되는 정령이다.

이해하기 쉽게 마탑의 계약 정령으로 예를 들어볼까?

정령학 선임 마법사, 페이얀의 계약 정령은 상위 화염 정령 파이어 드레이크였다. 그러나 파이어 드레이크의 명령에 복종하는 건 같은 속성의 화염 정령들밖에 없다.

페이얀은 그렇게 말했었지.

-“그래서 저희 숙련 마법사들도 제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걸까요? 물론, 정령마법학이라는 게 정해진 수련 과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때 생각했었다.

‘늘 입을 우물거려서 못 알아들은 게 아닐까.’

마탑에서 소문난 대식가로 통하는 페이얀 선임이었다. 마주칠 때마다 로브 소맷자락 아래로 음식을 숨겼었지. 그러나 내가 페이얀에게 독설을……. 아니, 행동을 지적하는 일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내 앞에선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으니까.’

내가 벤쉬 선임에게 하던 걸 지켜봤을 페이얀이니까.

뭐, 알아서 조심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만…….

어쨌든, 나는 마르셀로에게 답했다.

“그대의 말이 옳네, 마르셀로. 엄격한 위계질서라고 해도 자신과 동일한 속성을 지닌 이들에게만 유효한 바. 설령 정령왕이라고 한들,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겠지.”

계급에서 오는 위압감에 위축되어 따를 순 있어도 진정으로 복종하진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마르셀로는 의문을 제기한 거겠지.

‘모든 정령은, 모든 속성의 정령을 뜻하는 거니까.’

하지만 위계질서를 뛰어넘는 게 바로 혈연 아니겠냐?

그래, 하이엘은 무려 [첫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세계수의 직계 {고유 정령}이란 말이다.

‘다들 모일 수밖에 없을걸?’

일단, 모이기만 한다면.

첫인상에서 기선을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

왜, 누굴 닮아서 하이엘은 외관부터 비범했거든.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마르셀로를 뒤로 한 채.

하이엘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주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정령들을 수소문한다면.

마력흔이 아니더라도.

유그위드와 라이즈의 행적에 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거다.

‘그러면 슬슬.’

나는 안토니움으로 돌아가자. 동부와 다르게 북부와 서부는 일찌감치 상황을 정리하고 안토니움으로 복귀한 상태였으니까. 그들과도 대화를 나눠봐야 한다.

“저는 이곳에 남아 상황을 주시하겠습니다.”

나는 마르셀로의 배웅을 받으며 포탈로 진입했다.

그리고 안토니움에 발을 내디디는 순간.

알아차리고 말았다.

강렬한 기척.

“!”

마력흔이 아니다.

악흔(惡痕).

그냥 넘어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악의 발자취다.

분명하다.

안토니움에 상위 마왕 혹은 그에 버금가는 악마가 발을 들인 것이다. 거울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 순간 나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갑지 않을까.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말 한마디 걸어오지 않을 만큼.

그러나 그런 나를 향해서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사내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이호열 씨,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이호열.

내 이름 석 자를 뻔히 알면서 뭘 물어보는 건데.

……잠깐, 설마.

‘내 풀네임을 알고 있는 사람인가?!’

나는 반문하려다가 사내의 얼굴을 보고 흠칫했다.

평화로운 안토니움에 어울리지 않는 피를 뒤집어쓴 사내.

당신, 안토니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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