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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79화 (479/489)

◈ 479화. 천성의 악함 (1)

아르카나 대륙 동부.

프로토타입 균열을 간파한 플레이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이전까지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삼인방의 기색.

마르셀로가 세 사람을 지켜보며 내뱉었다.

“경께서 심으신 씨앗들이 결실을 맺고 있군요.”

상황에 따라 유기적으로 움직이겠다.

성전 연합군 회의에서 나눈 계획대로.

상황을 관조하던 탑주, 마르셀로.

그가 대륙 동부로 향한 이유는 간단했다.

대괴수의 진격에 가장 취약하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경께서는 일찍이 저들의 가능성을 신뢰하셨습니다만. 정작 저는 저들의 저력을 얕본 꼴이 되어버렸군요. 역시나, 저보다는 경께서 탑주의 자리를…….”

마르셀로가 뜻하지 않게 반성하던 순간.

고오오.

그의 곁에서 마력이 일렁겼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형체.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 딘 카를이었다.

“오셨습니까. 탑주님.”

“마티스 선임.”

“이런, 실로 놀라운 일이군요.”

좀처럼 감정의 동요가 없는 마티스.

그조차도 펼쳐진 풍경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수석님의 말씀에 따라 기이의 탐구에 매진했던 자신조차도. 불완전한 균열을 돌파하는 데에 적지 않은 시간을 소비했거늘.

“저보다도 빠르게 함정을 간파할 줄이야.”

무려 세 명의 모험가가 자신보다 먼저 전장으로 복귀하고, 대괴수의 앞을 막아선 상태였다. 마르셀로는 마력을 끌어올리며 마티스에게 물었다.

“저 또한 놀랐습니다. 하지만 이 수석님의 보살핌이 비로소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면 의아한 일도 아니겠지요. 그래서 균열의 내부는 어떤 풍경이었습니까, 마티스 선임?”

더불어 요동치는 마티스의 적합한 마력.

“전(前)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 님의 행방이 묘연해지신 이유를 납득하게 됐습니다. 강함이나 발현력을 떠나서 ‘기이’에 관한 이해도가 없다면 나아가기조차 어려운 균열이었습니다.”

미궁, 균열, 불가사의, 적정 레벨 등등…….

마티스가 균열을 간파할 수 있었던 건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시스템을 숙지했기 때문. 플레이어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지식수준을 갖춘 덕분이었으니.

“그렇다면…….”

마르셀로는 판단을 내렸다.

이 순간, 균열에 휘말린 아르카나인들.

그중에서 자력으로 균열을 간파할 수 있는 이들은.

채 열 명도 되지 않을 것 같다고.

따라서 최선책은 명료했다.

“우선, 그 원인을 제거하고 생각해야겠군요.”

필드를 변화시켜 균열을 발생하게 한 원인.

대괴수, 녀석들을 처치하겠다.

현 시대의 탑주, 마르셀로.

그리고 과거.

그와 수석의 자리를 경쟁했던 마티스의 합공.

콰콰콰쾅.

[대괴수, 루나림의 악령에게 ‘기절’이 발생합니다.]

덕분에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

그러나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세 사람은 기뻐하기보다 행동으로 보답했다.

그건 의도라기보다는 본능이었다.

‘이 느낌을 잊어선 안 된다.’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감각.

이 감각을 최대한 길게.

육체에 새겨둬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야만 기이의 문이 다시 닫히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푸욱.

그들의 판단은 정확했다.

제 아무리 대괴수라고 한들.

마탑의 탑주와 선임.

그리고 벽을 넘어선 세 사람의 합공을 견뎌낼 순 없었다.

“허억.”

“후우.”

“아오씨.”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거대 연합의 세 길드 마스터가 가쁜 숨을 몰아쉬기 무섭게.

대괴수가 쓰러지고 그들의 시야가 점멸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러자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순리에 따라 변화했던 필드가 원상 복구되기 시작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레벨이 몇 단계나 상승했는지,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는 것.

텅 빈 허공에서 소음이 들려온다.

……쩌저적.

“……야, 잠깐?!”

마치 톱니바퀴처럼. 변화한 필드가 맞물려 형성된 프로토타입 균열이 톱니바퀴가 어긋나 고장난 기계처럼. 그대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와장창.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차원의 조각.

그리고 그 틈.

균열 내부에서 사투를 벌이던 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언니……? 뭐야, 언니가 구해준 거야?!”

“조용히 해. 아직 끝난 거 아니니까.”

“뭐야. 왜 이렇게 다정해? 언니, 철 들었어?!”

하여튼, 이건…….

“다물어 그냥.”

레오니는 차오르는 욕지거리를 삼키고는 주변을 살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 여신교단…….

넋이 나간 표정을 보아하니.

다들 나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을 겪은 거겠지.

레오니가 핵심만 간결하게 전달했다.

“부상자는 빠져! 아직도 세 마리나 남았으니까!”

그렇다.

남은 대괴수는 아직도 세 마리나 남았다.

프로토타입 균열도 전부 붕괴한 게 아니고.

성전 연합군도 전부 빠져나온 게 아니었다.

남태민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형, 남철민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고생해야겠는데, 형?”

뭐, 나도 빠져나왔는데 형이라면 어련히 잘하고 있겠지.

‘그나저나…….’

남태민의 시선이 익숙한 얼굴을 향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가쁘게 심호흡하고 있는 사내.

샤이닝의 길드 마스터 록스였다.

남태민은 혼자서 입술을 삐죽였다.

‘……거, 신경 쓰이네.’

솔직하게 접점은 많지 않았다. 샤이닝과 가온은 딱히 긴밀한 관계도 아니었으니. 다만,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얼굴을 맞대서 그런가.

“괜찮냐, 록스.”

남태민은 록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

록스는 남태민이 내민 손을 바라봤다.

이미 몇 차례나 사투를 거듭한 듯한 몰골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자신과는 달랐다.

‘쓰러트린 건가.’

대괴수의 시체에 남겨진 거대한 상흔.

틀림없었다.

남태민이 쥐고 있는 대검이 남긴 상처가 분명했다.

록스는 시선을 돌리고 남태민의 부축을 받아들였다.

“고마워. 고생했겠는데.”

“뭐, 약간?”

“프로토타입 균열을 자력으로 탈출한 건가?”

“맞아, 운이 좋았지.”

“……그런가.”

바바리안이라고 해도 사리분별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히사기, 그 눈치 없는 뱀.

그 자식은 록스의 성질을 박박 긁었을 테지만…….

남태민에게 그럴 생각은 없었다.

드미트리의 사망.

그건 남태민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주었으니까.

그러나 남태민은 위로하지 않았다.

때로는 위로가 상처가 된다는 걸 알기에.

그 대신 남태민은 주의를 환기시켰다.

“저거. 치와와가……. 아니지, 우리 거대 연합의 어엿한 길드 마스터 레오니가 떠드는 소리 들었겠지만. 대괴수는 아직 3마리나 남았어. 너도 적당히 치료하고 합류하면 좋겠다.”

……쓰읍.

아무리 그래도.

이런 살가운 말은 역시, 나보단 형이 해야 하는데.

남태민은 억지로 말을 이었다.

“넌 존재만으로도 아군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러지.”

록스는 짧게 대답하자 남태민이 떠났다.

록스는 그제야 전황을 파악했다.

남태민의 말대로 세 마리의 대괴수를 응시했다.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몬스터를 앞에 두고 무력한 모습이라니.

체면이 말이 아닌데, 록스.

“……빌어먹을.”

그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걸렸다.

*

전황은 성전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가장 취약하다고 할 수 있는 동부에서도 승전보가 전해졌으니.

호열이 있는 남부는 물론.

북부도 딱히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용기사.

‘용에 올라타서 아니라 용을 모셔야 해서 용기사인 걸까……?’

스칼은 병아리, 프로즈낙스를 어깨에 올린 채 생각했다.

‘그에 반해서 총대장님께선…….’

드래곤 로드.

강렬한 클래스명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깊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쓰러지는 세 마리의 대괴수.

“과연, 클라우디의 수족을 자처할 자격이 되는군.”

만물의 왕, 드래곤의 인정을 받다니.

프로즈낙스의 말본새를 생각하면 수족들.

호열의 사병이 얼마나 대단한 이들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나 붉은 눈의 일족, 듄.

‘전투 민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들의 전투력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완력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휘두르는 무기의 손잡이가 먼저 으스러질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 탓에 고막이 아프기는 했다만.

“저저, 돈 귀한 줄 모르고……!!”

“참으세요, 가몬드 님.”

“조수, 내가 참을 수 있겠습니다? 내가 이럴까 봐, 저 야만인들하고 엮이고 싶지 않았던 건데! 저 무식한 붉은 눈들. 무기 하나를 만드는 데에 금화가 몇 개나 들어가는지 알기는 하고 망가트리는 건지……!!”

물론, 저런 괴물들에게 쏘아붙이는 다이아몬드 상단주 가몬드의 배짱 또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스칼은 놀라움을 삼키고는 물었다.

“그보다 서쪽은 괜찮은 거겠죠?”

“별다른 위협은 보이지 않았다. 대피하는 상단은 보였어도.”

“……상단이라.”

대괴수를 피해서 안토니움으로 돌아온 상인들일까?

어쨌든, 다른 누구도 아닌 프로즈낙스가 그렇다고 하니까.

자신이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스칼은 평온한 안토니움을 바라봤다.

“그러면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군요.”

*

누군가는 의아해서 묻겠지.

대괴수는 눈속임에 불과하지 않았느냐고. 진짜는 이미 안토니움에 입성하고, 피를 흩뿌리지 않았느냐고. 초월자들의 전력이라면 텅 빈 안토니움 정도는 눈 깜짝할 새에 장악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맞는 말이었다.

옥시딘에게 깃든 류오쥔춘의 사념은 안토니움에 발을 들였다.

무혈이 아닌 유혈입성.

그는 폭군답게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일종의 도발이자 인질극.

전지전능에 가까운 이호열의 위상에 흠을 내기 위한 행동이었다. 류오쥔춘의 사념은 계산했다. 지금쯤이면 이호열, 그의 귀에도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관여치 않았다.

옥시딘의 육체, 더불어 동행하는 초월자들의 능력으로도 충분했다. 번개의 아이, 소년의 낙뢰 몇 방이면 안토니움의 주민 절반이 잿더미로 변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네가 안토니움을 떠난 순간.’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이다, 이호열.

나는 안토니움의 백성들을 인질로 잡는 데에 성공했고.

내가 아는 너라면, 이 백성들을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승리를 선언한 그때였다.

저벅.

누군가 류오쥔춘의 앞을 막아섰다.

류오쥔춘으로선 잊을 수 없는 얼굴.

과거 자신의 수족이었던 다섯 별.

오성 중 하나.

백성륜이었다.

그러나.

“비켜라.”

과거는 과거에 불과했다.

류오쥔춘의 사념이 원하는 건 제국의 황좌였다.

패배하고 굴복하고 변심한 신하 따위가 아니었다.

철컥.

그의 곁을 호위하던 일출의 무사.

그의 일출도가 다시 발도하려던 순간이었다.

백성륜의 시야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 □□□ □□, □□□ □□□□ □□□□□.]

어째서인가.

단 한 글자도 읽을 수 없는 메시지가.

그와 동시에 감각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니, 백성륜뿐만이 아니었다.

류오쥔춘의 사념이 덧씌워진 덕분.

플레이어 취급을 받게 된 옥시딘.

그의 시야도 다를 것 없는 메시지가 비추고 있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것만으로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이 순간, 안토니움에 출현했다는 것.

“기대 이상이다.”

아니, 애초에 안토니움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호열이 아니었다.

그 화려한 외관은 호열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지만.

풍겨오는 기세가 달랐다.

“마계 서부의 지배자인 내가 너의 악의를 인정하마.”

마계 서부의 지배자.

아홉 번째 왕좌의 마왕, 고귀한 파이몬.

그가 화신체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그러나 인간이여.”

“……!”

류오쥔춘의 사념은 이 순간.

거스를 수 없는 힘을 느꼈다.

옥시딘의 육체로도 저항할 수 없었다.

폭군의 스킬도.

옥시딘의 능력도.

기이조차 통하지 않는 절대적인 무력감.

그렇다.

상위 마왕은.

그중에서도 파이몬은 그러한 존재였으니.

“나는 격식 없는 자는 상대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나와 같은 상위 마왕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네게는 호기심이 생기는구나.”

파이몬의 안광이 번뜩였다.

“어찌 인간으로 태어나 여전히 인간이면서 악마보다도 추악하게 타락할 수 있는 것이냐? 진심으로 의구심이 생기는구나.”

마음 같아서는 박제하여 관조하고 싶었거늘.

이런, 더 이상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되겠지.

자신이 소란을 피울수록.

“그대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늘어날 테니.”

파이몬이 귀중한 화신체를 소모하며 안토니움에 현현한 건 그 때문이었다. 파이몬은 그대, 호열의 발목이 붙잡히는 모습을 원치 않았으니까.

“너로 인해 우리의 만남이 늦어질 순 없지 않느냐?”

변수가 생기면 생길수록.

아르카나 대륙이 혼란하면 혼란할수록.

호열의 마계 진입이 더욱더 늦어질 테니.

파이몬의 의도를 알아차린 류오쥔춘, 그가 경악했다.

‘……고작 그따위 이유라고?’

그따위 약속에 이 몸.

나, 류오쥔춘의 의지가 꺾여야 한다는 말인가?

고작 이호열과 네가 맺은 선약.

그것 하나 때문에?

내가 한낱 약속보다도 못한 존재란 말인가……?

달칵.

파이몬은 대답 대신 찻잔을 집었다.

허공을 향해 잔을 맞대었다.

류오쥔춘의 절망적인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내뱉었다.

“안토니움은 내가 지킬 테니 안심하시게, 그대여.”

찻잔 속에서 붉은 홍차가 소용돌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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