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78화 (478/489)

◈ 478화. 기이의 탐구 - 발표회 (2)

인스턴스 던전.

플레이어에게 닥친 던전은 각자 달랐다. 그러나 체감 난이도는 같았다. ‘격’이 다르지 않은 이상, 누구도 쉽게 던전을 클리어할 수 없으리라는 것.

마창사인 히사기는 최악의 상성을 만났다.

“이래선 창끝이 들어갈 구석이 없는데.”

[Lv.650 : 살육의 철갑 인형]

철갑엔 이음새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머뭇거림은 없었다.

던전에선 발목이 묶이는 순간.

더더욱 많은 몬스터와 마주하게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씩 처치하는 게 최선.

화륵.

마창사의 스킬, 마창기예 발동.

히사기의 창끝에 화염의 소용돌이가 맴돌았다.

강렬한 열기로 상대방의 철갑을 녹여서 무력화시킨다.

동경의 현사라 불리는 히사기답게 상성을 만회할 방법을 떠올렸지만.

치익.

문제는 이곳이 던전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레이먼 션.

그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설계한 던전.

뚝뚝.

던전 외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열기를 식힌다.

습기가 화염의 확산을 막는다.

스왁.

화염 속성의 마창기예가 놈의 철갑을 붉게 달궜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히사기는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다음 수를 떠올렸다.

파지지직.

마창기예 뇌전.

던전의 습기가 문제라면.

습기를 기폭제로 활용할 수 있는 뇌전을 활용하겠다.

히사기의 판단은 이번에도 최선이었다.

다만.

[살육의 철갑 인형이 상태이상, ‘감전’에 저항합니다.]

그조차도 레이먼 션의 예상 반경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런, 상태이상 저항까지 덕지덕지 달고 있다면…….

히사기가 나지막이 말했다.

“마창기예는 별 효과가 없을지도.”

마창기예는 지지 않는 가위바위보와 같다. 다양한 속성을 통해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뜻. 하지만 저렇게나 다양한 상태이상 저항력을 갖추고 있을 줄이야.

히사기가 입꼬리를 올렸다.

“뱀을 잡기 위한 함정이었나.”

예상은 했다.

플레이어들을 고립시켰다는 건.

고립된 플레이어들을 구워삶을 자신도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러나 다른 의미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거, 내 발버둥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지 않습니까?”

한계를 부수겠다는 나의 발버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신의 한계를 가늠해 노골적으로 설계된 던전.

그렇다는 건.

다르게 말하자면.

한계를 깨부수면 클리어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후우.”

히사기는 스킬이 아닌 『마법』의 발현을 준비했다.

후하게 쳐줘도 견습 마법사 수준도 되지 못하는 발현력.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탐색, 간섭, 발현이라.

응용은커녕.

따라가기도 벅찬 개념이었으니까.

‘하지만.’

간섭 과정에서 ‘무언가’를 더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이윽고, 히사기의 창끝에서 일렁거리는 기류.

그것은 검기였다.

고오오오.

간섭 과정에 검기를 더한다.

그 반동은 극심할 수밖에 없다.

마법도, 검기도, 무엇 하나 온전히 깨우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울컥.

이건 역시나 그 반동.

목구멍에서 피가 솟구친다.

하지만 히사기는 피를 뿜지 않았다.

꿀꺽.

피를 다시 삼켜버렸다.

“쓰군.”

마치 뱀이 먹이를 집어삼키듯.

이 순간, 히사기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자신의 그릇보다 거대한 [『기이』]를 소화하기 위해서.

말 그대로.

뱀이 되고자 결심했다.

그래, 기이란 코끼리를 삼킬 보아뱀이 좋겠군.

주륵.

이내, 입술 끝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나는 누구냐.”

나는 히사기 카즈마.

도쿄의 뱀이다.

그 이름값을 해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소화해 내야만 한다.

히사기가 기이를 소화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철컥.

우려했던 그대로.

던전 곳곳에서 몬스터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관점으로 본다면 공략은 실패였다.

그러나.

“……됐다.”

히사기는 결국, 기이를 소화해 냈으니.

편협한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관점만으로는.

이제부터의 상황을 평가할 수 없었다.

보다시피.

스왁.

창을 내지르는 것만으로.

상성을 무시한 채.

철갑 인형들을 예리하게 절단내어 버렸으니까.

슥.

히사기가 피 묻은 입가를 훔치며 내뱉었다.

“그래도 연합인데 함께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민 군?”

*

시공간의 사교장.

번개의 아이.

그리고 일출의 무사는 양피지를 확인했다.

아니, 양피지‘들’을 다시 읽어나갔다.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시공간의 사교장은 무려 세 명에게 자격 심사를 허락했다.

심지어 전부 모험가였다.

일출의 무사가 짙은 눈썹을 움찔거리며 소년에게 물었다.

“이런 경우가 또 있었나?”

“있었겠냐고. 한 장만 도착해도 호들갑인데!”

“동시에 셋이라.”

혼란한 세상에서 영웅이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저 강하다고만 거머쥘 수 있는 초월자의 자격이 아니었으니까.

‘더욱이 저들은 모험가다.’

초월자의 자격을 쌓기엔 턱없이 부족했을 터.

그러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뚱한 표정으로 심사 요청서를 바라보던 번개의 아이.

소년이 소스라치게 놀랐기 때문이었다.

“……잠깐! 이, 이, 이 긴 이름은?!”

긴 이름이라니?

세 모험가의 이름은 길지 않았다.

그들이 세운 업적도 그다지 길지 않았다.

“아니. 여기 마지막, 마지막에!!”

그 말에 무사는 자신이 들고 있던 심사서를 바라봤다.

그러자 정말로 긴 이름이 있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이름이 있었다.

──────

검수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

“그랑펠……!”

최초의 만장일치로 시공간의 사교장에 입성했던 사내.

그와 동시에 불과 얼마 전.

자신들의 초월자 동맹을 해산시켰던 사내.

“얘, 얘가 여기에 왜 적혀있는 건데?!”

번개의 아이는 그 이름을 보자마자 치를 떨었다.

4가문 중 하나 아카몬드의 가주 레텔.

그녀에게서 느낀 굴욕을 아직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잠깐, 설마 위에서 듣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애꿎은 천장의 샹들리에를 노려보며 말까지 더듬을까?

“얘가 아니라 그랑펠이 어째서 여기에……!”

물론, 무사도 의문이었다.

초월자 중엔 비교적 최근 사교장에 발을 들였기에. 많은 심사서를 보진 못했거늘. 초월자 자격 심사서에 사내의 이름이 함께 적혀있는 이유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찬찬히 의도를 파악해 본다.

“검수…….”

다행히도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의문을 품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모험가.

그들이 어떻게.

이런 단기간에 초월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었는지를.

“……설마.”

“설마라니. 뭔가 알아낸 거야, 촌스러운 형?”

“그런 거였나.”

“아니, 혼자만 아는 척하지 말고 쫌!”

꾹.

무사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었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 사내가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세 명의 모험가를 초월자의 반열로 이끈 거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야.”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번개의 아이는 어이가 없었다.

“진심 그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형? 그날 이후로 아주 그냥 사람이 무기력해진 게……. 변해도 너무 변했어? 과대평가에도 정도가 있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뭐?”

팔랑, 일출의 무사가 양피지를 흔들어 보였다.

“양피지에 적힌 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라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그랑펠의 초월자 자격 심사 때에도 찬성표를 던졌던 거고.”

“……그, 그건 그런데!”

“그런 양피지에 똑똑히 명시되어 있어. 사내의 존재가.”

그렇다면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거, 천만다행인데…….”

그저 자신의 존재만으로.

타인을 초월자의 반열로 인도할 수 있는 그랑펠이었다.

만약, 그가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지금쯤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겠지.’

그런 의미에서 옥시딘에게 생각이 닿았다.

대체 녀석은 어떤 꿍꿍이를 품고 있는 걸까?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도 속내를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짐작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놈이 군주로 거듭난 순간부터.’

고민하던 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장의 초월자 자격 심사서.

전부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채.

“이건 내가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겠지.”

“뭐? 왜? 난 무조건 반대할 건데?!”

번개의 아이는 그 나이대 아이답게.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렸다.

모험가들에게 레텔에게 당한 화를 풀려는 것이었다.

일출의 무사는 그 나이대 아이를 다루듯 유치하게 말했다.

“너, 그 심사서에 명시된 이름이 하나가 아니라는 걸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괜한 고집을 부려서 그랑펠의 체면을 깎기라도 했다가는…….”

“……아오!”

결국, 번개의 아이도 무사를 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나도 형처럼 당분간은 기권표! 그래서 형은 어디로 가려는 건데? 뭐, 궁금한 일이라도 생겼어? 아니면 나랑 놀아주기 싫어서 그래?”

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둘 다라고?”

“여기선 대륙 소식을 알 수 없으니까.”

사교장에서의 시간은 그 흐름이 멈춰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느리게 흐른다. 그 탓에 아르카나 대륙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뜻.

“지켜봐야 하지 않겠어?”

옥시딘.

녀석이 어떤 짓을 벌이고 있는지를.

일출의 무사는 그렇게 시공간의 사교장을 떠났다.

“……!”

이윽고, 현실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위화감을 느꼈다.

어째서.

덜컹.

‘내가 마차에 타고 있는 거지?”

분명히 같은 초월자인 만물상 포콤과 동행 중이었는데……. 그쯤에서 일출의 무사는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잠깐.”

무사는 마차 유리창 너머를 바라봤다.

조랑말에 탄 포콤과 그를 따르는 상단이 보였다.

당분간 장사를 접은 지금은 이끌고 다닐 이유가 없는 상단.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

의문을 품기 무섭게.

시야에 들어오는 웅장한 풍경.

“저건……?”

성벽이다.

현시점의 아르카나 대륙에 저런 규모의 성벽은 흔치 않았다.

덕분에 곧장 알아차렸다.

포콤의 상단은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토니움에 들를 이유는 없었다.’

무사의 고민은 거기까지였다.

시공간의 사교장에 머물렀던 현실에서의 찰나.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만.

영문도 모르는 상황에 포콤에게 휘말릴 생각 따윈 없었다.

척.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하여.

일출의 무사가 일출도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그의 손이 움찔거렸다.

“!”

끈적거렸다.

일출도의 손잡이에 끈적거리는 혈액이 덕지덕지 묻은 탓이었다.

그 순간, 직감하고 말았다.

‘옥시딘……!!’

폭군의 세뇌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는 걸.

*

대괴수, 프테라.

옥시딘은 고대의 익룡 위에서 전황을 살펴봤다.

“짐승 따위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괴수는 눈속임에 불과했다.

진짜는 이 순간, 정체를 감춘 채.

안토니움에 진입하는 초월자들이었으니까.

“자책하지 마라. 그대는 훌륭했다, 이호열.”

옥시딘은 초월자들의 세뇌를 해제한 호열을 떠올렸다.

높게 평가할 만한 임기응변이었다.

그러나 그대는 운이 없었고, 나는 운이 좋았다.

옥시딘이 읊조렸다.

“죽음조차도 나의 욕망을 꺾지 못했을 뿐이니까.”

왕관을 뒤집어쓴 순간, 급격히 달라졌다.

플레이어 랭킹에 옥시딘의 이름이 갱신되었다.

그의 레벨이 상승했다.

어째서 그런 결과가 나타났는지.

원인이 이곳에 드러나 있었다.

옥시딘.

아니, 폭군의 왕관에 새겨진.

류오쥔춘의 사념이 입을 연다.

[폭군의 승계 (Master) : 진정한 폭군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왕좌를 빼앗기지 않는다. 설령 자신의 생명이 다했다고 하더라도 권력을 향한 폭군의 의지는 끊어지지 않으리라. 현재 계승 중인 대상 : 옥시딘]

“찾아라. 그리고 처단하라.”

폭군이 명령을 내린다.

“천하통일의 배신자, 용성락부터 시작이다.”

.

.

.

서걱.

일출.

떠오르는 태양의 속도 앞에선.

감히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했다.

“ㅆ……?”

푸확.

용성락의 몸과 머리가 분리된다. 주점에 혈흔이 솟구친다. 용성락의 머리를 친 사내, 일출의 무사는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주점을 빠져나갔다.

그걸로 자신의 목적은 달성했다는 듯이.

“꺄아아아악!”

“저, 저 자식 당장 잡아!”

“미친 새끼야, 거기 안 서?!”

용성락과 마주 앉았던 사내는 피를 뒤집어 썼다.

하지만 그는 경악하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그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으니까.

이건 원한에 의한 살인이다.

용성락이 누군가의 원한을 샀다.

개과천선한 용성락.

그가 원한을 살만한 이는.

단 한 명밖에 없다.

“……류오쥔춘.”

전(前) 천하통일의 오성(五星).

백성륜.

그가 피를 닦아내며 이를 갈았다.

“그분께 짊어진 빚은 네 목숨으로 갚지.”

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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