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7화. 기이의 탐구 - 발표회 (1)
프로토타입 균열 내부.
“씹. 이 패턴은 뭔데 또?”
“이런, 이건 좀 난감한데요.”
“……대괴수! 그 자식들, 어디 갔냐?”
각자가 고립된 상태였다.
처음엔 혼돈의 도가니와 다를 바 없었다.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는 플레이어가 있던 반면, 다짜고짜 위협에 발을 들이는 플레이어도 있었으니까.
“으, 으아악! 깜짝……!”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야아아악?”
띠링.
벨소리 혹은 진동으로 전해지는 소식.
AAU에서 발신된 긴급 재난 정보였다.
레오니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여기서 신호가 터진다고?”
나, 방금까지 아르카나 대륙이었는데?
믿기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시점을 옮겨 현실의 AAU.
“플레이어들이 링크로 접속하고 있습니다!”
“히사기, 슈레이그, 록스, 레오니까지……. 랭커들도 속속들이 화면을 공유해 오고 있습니다. 슬슬 시작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부장님!”
“크흠.”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강단에 섰다.
플레이어들과 이런 식으로 마주하는 건 또 처음인데…….
‘나한테 긴장은 어울리지 않지.’
과거,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도.
레이먼 션과 얼굴을 맞대고 담판을 벌였던 박민재였다.
물론, 그 낯짝이 가짜이긴 했다마는.
“지부장, 박민잽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박민재의 언행은 여전히 거침이 없었다.
플레이어들과 마찬가지로 링크에 접속.
박민재의 얼굴을 마주한 세계 각국 AAU는 멈칫했다.
“역시, 이런 역할을 자처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미스터 박밖에 없겠죠? 아무리 플레이어들이 달라졌다고 해도 웬만한 사람은 부담감을 견디지 못할 테니까요.”
AAU 런던 지부장.
베이커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물론, 베이커가 나약한 게 아니었다.
지나치게 용감하거나 좋은 의미로 미친.
박민재가 특별한 것뿐.
“선배, 이거 무사히 진행될 수 있을까요……?”
성현준은 윤수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슥.
윤수겸은 안경을 고쳐 쓰며 답했다.
“그러길 바라야지. 아주 간절하게.”
지금의 작전은 하나의 연락에서부터 시작됐다.
거대 연합의 분석관이자 브레인, 남철민.
그에게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아르카나 대륙의 균열 내부시라니요?”
언뜻 듣기엔 허무맹랑한 소리.
그러나 박민재는 사람을 볼 줄 알았고, 남철민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곧장 사태를 파악했고 남철민의 의견에 따라 빠르게 인프라를 구축한 것이었다.
성현준이 혀를 내둘렀다.
“솔직히 혈연으로 거대 연합에서 한자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이런 계획을 세우다니 보통이 아니네요. 남철민 씨도.”
미궁, 던전, 불가사의 등등…….
[탐험가]가 아닌 일반적인 플레이어가.
시련들을 연달아 클리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AAU, 자신들이 있다면.
“그러게. 유일한 수를 찾아냈어.”
집단 지성을 활용한다면 달라진다.
AAU가 계륵 취급을 받던 이유가 무엇인가? 아는 건 알고, 모르는 건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AAU에게 플레이어들이 진입한 프로토타입 균열?
“보내주시는 화면에 맞는 지원을 제공하겠습니다!”
불행 중 다행히도 AAU가 아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미궁에선 왼쪽 벽을 짚어야 한단 거죠?
-……진짜네? 기어 다니니까 함정이 발동을 안 해!
-미쳤네, 당신들 간만에 좀 하는데?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플레이어들과 AAU.
사상 최초이자 최대의 연합작전.
당연한 이야기지만, 초유의 관심이 쏟아졌다.
잠깐, 시선을 옮기자 시시각각 갱신되는 SNS들.
성현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선배, 저 코스모에 근무할 때부터 지금까지 인터넷에선 월급 루팡이라고 욕만 먹었는데. 진짜 태어나서 처음으로 칭찬을 들어보는 것 같아요.”
윤수겸도 잠깐 눈을 떼서 그 반응들을 살폈다.
-드디어 AAU도 밥값 하기 시작했네ㅋㅋㅋㅋㅋ
-이럴 땐 또 든든하고요ㅋㅋㅋㅋ
-옛날 GM 짬밥 어디 안 가는 거겠지ㅋㅋㅋ
과장이 아니었다. AAU가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플레이어들은 매서운 속도로 미궁을 헤쳐 나아갔다. 레벨의 격차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됐어……!
첫 번째 화면에 떠오른 남철민의 시야가 흔들린다. 100레벨 언저리에 불과한 분석관, 남철민도 무사히 미궁을 클리어한 모양이었다.
“저기에 있을 정도면 다들 고인물이잖아?”
무려 대괴수를 저지하기 위해 진격했던 플레이어들이다.
목숨을 걸 수 있는 각오.
그에 맞는 실력을 겸비했다는 뜻.
“우리의 지원을 그 이상으로 활용할 수 있단 거야.”
실제로도 그랬다.
몇몇 플레이어들은 여유가 생긴 모양인지.
오히려 아르카나 대륙의 소식을 전해오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그런데 선배, 이거 진짜 신빙성 있는 걸까요?”
‘드래곤 로드, 흑암룡 이호열’이었다.
그동안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던 호열의 클래스. 악크샨 늑대를 다루는 모습을 통해 누군가는 악마 사냥꾼이라 단정 짓기도 했었다만, 믿지 않았거늘.
이 드래곤 로드는 몇 술이나 더 뜬 게 아닌가?
“확실히 이상하긴 했지.”
윤수겸의 말에 성현준이 말을 이었다.
“그쵸?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아무리 아르카나 대륙 전기에 저희가 모르는 히든 클래스가 많다고 해도 드래곤 로드라니. 그런 이름만 들어도 미친 사기적인 클래스가…….”
“아니. 그쪽이 이상한 게 아니라 총책임자님이 악마 사냥꾼이시라는 게 이상할 정도로 납득이 안 됐던 거야.”
“……예?”
드디어 알았다는 듯한 윤수겸의 눈빛.
“근데 드래곤 로드시라면 납득이 돼. 그 어마어마한 마력량부터 스킬 활용, 마지막으로 의문이었던 악크샨 늑대의 뜬금없는 등장까지!”
“악크샨 늑대요? 그게 드래곤 로드랑 무슨…….”
“용언이라면 가능하잖아.”
“……용언?”
“드래곤은 모든 걸 굴복하게 하는 만물의 왕이니까.”
“아!”
이거, 듣고 보니까.
“그럼 그 엘더 드래곤이 고개를 숙였던 것도……!”
그동안 클래스가 드래곤 로드 정도는 되어야 이해가 될 행보를 꾸준하게 보여왔던 호열이었다. 성현준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이었다.
-이런, 큰일인데요 이거?
잡담을 뚫고 들려오는 남철민의 음성.
-던전입니다. 살아있는 몬스터가 등장하는.
던전.
말을 내뱉기 무섭게.
곧장 방패를 치켜드는 화면 속 남철민.
“더, 던전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던전의 구조.
혹은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 만한 지형에 관한 정보를 전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은 이제부터 자신의 능력으로 몰려드는 몬스터를 극복할 수밖에 없다는 뜻.
쾅.
남철민이 방패로 기습을 막아낸다.
그 장면으로 AAU의 모두는 직감할 수 있었다.
젠장, 이런 것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인스턴스 던전인가 본데요, 선배?”
고정 레벨이 아닌 변동 레벨을 가진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던전.
그렇다면 당장 남철민이 비명횡사할 걱정은 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수준에 맞는 100레벨 언저리의 몬스터들이 등장할 테니까.
다만.
“……아니, 이러면 랭커들 쪽이 문제잖아?”
남철민의 동생, 남태민의 화면으로 옮겨가는 시선.
과연, 윤수겸의 추측은 정확했다.
남태민이 마주한 몬스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650레벨, 레드 드레이코 무리입니다……!”
650레벨짜리 몬스터들이 대열을 형성하고.
남태민을 사냥하듯 압박하고 있었으니까.
남태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거, 쉽지 않겠는데요.
……꿀꺽.
남태민의 말에 마른침을 삼키는 이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동의 정점, 호열.
그리고 난데없이 랭킹에 등장한 옥시딘을 제외한다면.
랭킹 1위인 남태민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니까.
성현준은 불길한 생각에 휩싸였다.
‘태민 씨라면 돌파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던전은 고작 두 번째 스테이지에 불과했다.
프로토타입 균열 정보에 언급된 스테이지만 하더라도 수십 개. 더욱이 그중에는 난공불락의 콘텐츠라 여겨지는 [불가사의]까지 포함되어 있지 않던가?
남태민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
-지금부턴 소통이 원활하지 못해도 이해 바랍니다.
듣고 있던 모두가 직감할 수 있었다.
[광폭화]다.
이 순간, 남태민이 진심으로 돌입했다고.
비단 남태민만이 아니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아르카나 대륙 전기 던전의 악명.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런 몇 명이나 살아서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
아니, 부정 타게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흡, 죄송합니다!”
뒤늦게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 망언을 책망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계륵에 불과하더라도.
플레이어들이 직면한 위협의 무게 정도는.
함께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컥!!
팽팽한 긴장감 속.
이윽고, 플레이어들의 전투.
아니, 사투(死鬪)가 시작됐다.
*
남태민은 떠올렸다.
‘형은 잘하고 있으려나.’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마냥 만류하는 게 아니었는데.
어떻게 시간이 날 때 같이 균열이라도 돌면서.
전투 자세라도 봐줄 걸 그랬어.
[스탯, ‘야성’이 당신의 육체를 옥죄어 옵니다.]
바바리안 고유 스킬, [광폭화].
서서히 그 반동이 오고 있다.
이성이 흐려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는 한계다.
검기(劍氣)와 광폭화를 동시에 다루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오죽했으면 총대장님, 호열 씨도 조급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겠어?
하지만 말이야.
콰카칵.
남태민은 자신을 더욱더 한계로 몰아붙였다. 경고 메시지 따위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쏟아지는 공격을 쳐내고, 받아내고, 무시하며 앞으로 나갔다.
누군가는.
아니,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철민 형조차도 그렇게 말하겠지.
너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냐고.
“……맞아.”
그렇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남태민이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건 말 그대로 사선(死線)을 오가기 위함이었다. 사선을 오가는 사투에서 더욱더 짙어지는 검기를 붙잡아두기 위해서였으니까.
스걱.
“……!”
어깻죽지 아래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
그 순간, 남태민은 떠올렸다.
스승님, 하르콘의 가르침을.
-“검기는 생사를 오가는 전투에서 짙어진다. 그 어떤 경우에도 예외는 없지. 설령 호열 경. 아니, 총대장님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예외가 아니라네.”
그 말을 들었을 땐 의문이 들었다.
호열과 생사의 위기란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떠한 순간에도.
꼿꼿함을 잃지 않았던 호열의 자태를 봐왔으니까.
‘……누구도 예외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최근 들어서 조금 달라졌다.
목격했으니까.
정확하게는 맡았으니까.
호열에게서 풍기는 미지의 냄새를. 물론, 그 냄새의 주인이 호열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 냄새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선.
그로 인해 위협에 빠질 수 있는 호열을 돕기 위해선.
빠득.
자신의 한계를 가로막은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태민은 이를 악물고 대검을 휘둘렀다.
그러한 남태민의 동공 초점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점멸하는 시야.
[※주의 : 야성에 육체가 잠식됩니다.]
광폭화의 부작용은 간단하다.
말 그대로 야성.
태초로 돌아가 무기나 장비 따위에 의존하지 않은 채.
야성에 휩싸인 육체로 전투에 임하게 된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한 시절에도.
이후에도 남태민은 몇 번이고 부작용을 경험했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설령 야성에 잠식되었을지라도.
꾹.
남태민의 손은 여전히 대검을 붙잡고 있었고.
그러한 대검의 검신에선 검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한 검기의 형태는 마치…….
파직.
적을 눈앞에 두고는.
솟을 때로 솟은 맹수의 털과도 같았다.
그런 대검을 쥔 남태민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맹수.
그 모습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남태민이 대검과 하나가 되었다.
비로소 신검합일의 문을 두들겼다는 것.
.
.
.
시공간의 사교장.
몇몇 초월자들이 머물고 있는 그곳에.
양피지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다.
“초월자 자격 심사. 이름은 남태민. 모험가인가?”
그런데 한 장이 아니었다.
허공에서 한 장.
또 한 장.
그걸로도 경악은 끝나지 않았다.
“……응? 이름이 두 개잖아? 자, 잠깐! 이, 이 긴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