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6화. 군주? 그 이상 (3)
그쪽에 관해선 또 부지런히 공부했었지.
‘마탑 마법 서적 못지않게 말이야.’
플레이어 이호열에게 부족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플레이어의 상식이었다. 당연하다. 내가 아르카나 대륙 전기를 플레이했던 건 무려 십 년이 훌쩍 넘는 과거의 일.
‘심지어.’
흑역사……. 아니, 좋지 못한 취향에 흠뻑 빠져 있던 탓. 나는 남들처럼 제대로 된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콘텐츠를 즐기지 못했었다.
‘그야 악크샨에 처박혀 있었으니까.’
덕분에 만학도라도 된 것처럼 각성 이후.
뒤늦게 아르카나의 상식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던 나였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찬란한 재능이 있긴 했다만.’
당연히 그랑펠의 머리는 죄가 없었다.
최상위 마법조차도 목격하는 것만으로 습득하는 머리가.
간단한 암기 정도를 하지 못했을까.
‘정작 문제는 입방정에 있었지.’
AAU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로서.
내겐 아르카나 대륙 전기와 관련된 정보들을 열람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별소릴 다 들었다는 것이다.
-“설마, 이런 초창기 데이터베이스까지 살펴보시려는 겁니까?”
-“역시, 총책임자님께선…….”
-“저희도 분발하겠습니다, 총책임자님. 혹시라도 다시 살펴보실 정보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쇼. 대한민국 지부 차원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뻔뻔한 표정으로 듣고 있기가 참 쉽지 않았었지.
그 부담스러운 말들을 떠올리는 순간에도.
역시나, 이놈의 주둥이는 가만히 있질 않았다.
“이것으로 끝인가.”
사실 미궁 균열이야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클리어해 봤다.
그런 경험을 쌓는 데엔.
제로 산맥의 십만 동굴이 도움됐거든.
‘당시엔 꽤 고생했었지만.’
지금은 상위 마왕의 왕좌, 그것도 모자라 유낙서스의 유산까지 착용한 내가 아니냐. 덕분에 미궁 공략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보다시피 미궁 균열, 자체를 무너트리면 되는 거였으니까.
다만, 모든 건 상황이 맞아떨어진 덕도 있었다.
[프로토타입 균열]
레이먼 션의 의도에 따라 생성된 불완전한 균열이기에.
나는 물론, 레이먼 션도 거스를 수 없는.
시스템의 규율이 적용되지 않은 덕분이라는 거지.
나는 그런 사실은 제쳐놓고 읊조렸다.
“고작 이런 미궁으론 나를 현혹할 수 없다.”
거창하게 내뱉자 다시금 바뀌어 가는 풍경.
[프로토타입 균열, ‘던전’에 진입하셨습니다.]
역시나 당연한 말이지만, 얼마나 길게 이어져 있지 알 수 없는 던전을 태평하게 탐험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프로토타입 균열에 휘말린 이 순간에도.
‘아르카나 대륙은 광활하거든.’
어떤 대괴수가 제국의 왕좌가 있는 안토니움으로 진격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성전 연합군의 존재를 고려해도 그렇다.
랭커를 포함한 플레이어, 아르카나 대륙 최정예 전력들이 한데 섞여 있다고 한들.
‘이런 건 나밖에 할 수 없으니까.’
와장창.
입술이 떨어지자 깨져가는 프로토타입 균열의 풍경.
앞으로는 계속 반복이려나. 하나의 콘셉트를 클리어할 때마다 이렇게 거만한 독설을 내뱉어야 하는 건가. 이러다간 애써 발휘한 그랑펠의 인내심이 바닥나진 않을까.
내가 우려하던 순간이었다.
“!”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다음 균열에서.
보여선 안 될 풍경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높게 솟아오른 건물.
건물의 외벽을 장식한 간판들.
이건 틀림없이 현실의 풍경이었다.
물론, 철면피에 당황은 내비치지 않는다.
“그런가.”
일단, 한마디부터 내뱉고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린다.
설마, 이 불완전한…….
프로토타입 균열이 현실에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까?
‘아니, 그것보다는.’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둘의 경계가 희미해졌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
말했듯 AAU의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이기에 열람할 수 있는 정보가 있었다. 우주에서 지구를 관측하는 어나더 스페이스 호의 접근 권한이 그중 하나.
최첨단 장비를 활용해 목격한 지구의 풍경은 어땠냐고?
솔직한 감상으로.
아르카나 대륙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상공을 모자라 우주를 부유하는 마안(魔眼). 지구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출현하고, 붕괴하는 균열들까지. 그건 아르카나 대륙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풍경이었으니까.
또각.
곧장 균열을 깨트리지 않고 둘러본다.
자동차, 신호등, 건널목…….
이쯤 되면 확신할 수 있다.
이건 모험가들의 세계.
나의 현실이었다.
“가능성은 두 가지겠군.”
쉴 새 없이 굴린 머리가 답을 내놓는다.
“단순한 모방 혹은 경계의 붕괴.”
프로토타입 균열에 ‘현실’ 콘셉트가 출현했다.
그렇다면 균열에 투영된 풍경은 현실의 모방품일까.
아니면 진짜 현실일까.
‘최악은 후자다.’
그건 이미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의 경계가 상당히 붕괴되었다는 소리였으니까. 예전 같았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말했듯 나는 보고 듣고 경험까지 해가며 현실이 아르카나 대륙과 유사해져 가고 있다는 걸 체감했다. 그러니까 확신할 수 있었다.
“알겠다.”
서늘한 그랑펠식 화법이 이어진다.
“이것이 그대가 추구하는 기이였군, 레이먼 션.”
그렇다.
레이먼 션.
넌 단순하게 현실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게 아니었어.
너는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의 경계선 붕괴를.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두 세계를.
하나로 합치는 [『기이』]를 위해 움직이고 있던 것이었다.
머릿속에서 의문이 풀려간다.
-아니, 지구 멸망을 바라면 보상금을 왜 줌???
-그렇다고 우리 편이라는 건 오바지 업데이트 내역 봐라
-ㄹㅇ 뭔 생각하는지 감이 1도 안 와;;;;;
여태까지의 행보가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을 하나의 세계로 융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 모순적인 행동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단 거지.
하지만 말이야.
“허나, 틀렸다.”
내가 누구냐?
쥐뿔도 몰랐던 바닥부터.
여기까지 올라온 덕분.
[기이의 대종사] 칭호까지 습득한 기이의 전문가다.
그런 입장에서 평가를 내린다.
“애초에 전제 조건이 잘못되었다. 기이란, 얄팍한 이해력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상에 관한 넓고 해박한 지식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슥.
나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시연을 준비했다. 그래, 언뜻 보기엔 쉬워 보이는 불완전한 균열을 깨트리는 것 또한 복잡하게 엮인 기이니까.
나는 말을 이었다.
“그대는 자신이 아르카나 대륙을 완벽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는가. 더 나아가 현실 또한 완벽하게 파악했다고 여기는가.”
내 질문에 누군가는 답하겠지.
그거 레이먼 션이라면 가능한 거 아니냐고.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르카나 대륙 전기 개발사인 코스모의 CEO. 아르카나 대륙에 관한 정보는 물론, 역사상 최고의 기업인으로 군림하며 습득한 현실에 관한 지식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런 너조차도 알지 못하는 게 있거든.
나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유감이다.”
그렇다.
너는 물론.
세상의 모두가.
죽어도 알 수 없는.
나와 그랑펠의 거대한 흑역사다……!
“나는 그대에게 허락할 생각이 없으니.”
몇 번이나 말했듯.
이젠 클라우디가 먼저인지.
나의 흑역사 공책이 먼저인지.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위대한 가문, 클라우디.
클라우디 가문은 과거부터 멸문하던 그날까지. 아르카나 대륙 역사를 가로지르는 획을 그어왔다는 뜻이다. 물론, 지금도 실시간으로도 긋고 있긴 하다만…….
‘어쨌든.’
아르카나 대륙을 배후에서 관조하는 흑암룡.
그런 클라우디 가문에 관해서는 나도 전부를 알지 못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레이먼 션.
네가 추구하는 기이가 실현될 리가 있겠냐?
나는 그쯤에서 확신을 가지고 내뱉었다.
“역시나 불합격이다.”
와장창.
깨져가는 현실 균열의 풍경.
비로소 레이먼 션의 목적을 알게 된 지금. 더 이상 녀석의 잔재주와 어울려 줄 이유 따윈 없었다. 겹겹이 나를 가로막고 있던 균열들이 계속해서 깨져간다.
차르르.
불완전한 균열이 깨져가며 사방으로 흩날리는 차원의 조각들이 빛을 발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 한눈을 팔 새는 없다. 간만에 시야에 떠오른 대로(大路).
[심미 : 上]
나는 ‘심미의 길’을 포착했으니까.
이 길의 끝이 어디로 이어져 있을지는 직감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경험해 봤으니까.
제로 산맥 십만 동굴 중 하나, [용암의 바다].
나는 심미의 길을 통해 용암의 바다에서 몬스터, 사이렌을 구원했었다.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깟 재주로 나의 시선을 교란하려고 해도 소용없다, 레이먼 션.
또각.
나는 오직 심미의 길만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할 수 있었다.
다시금 마주할 수 있었다.
[프로토타입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을 풍경을.
우우우.
내가 균열에 휘말리는 바람에 더더욱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던 거겠지. 해츨링의 공격에 세 마리의 대괴수가 고통스러운 울음을 뱉는다.
점차 희미해져 가는 심미의 길이 말해주고 있었다.
대괴수들의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나, 이호열 머릿속으로 견적서를 내본다. 만약, 이대로 대괴수를 처치하게 된다면 내가 획득할 수 있는 건 뭐지?
‘뭐긴 뭐냐, 개뿔 아무것도 없지!’
숟가락을 들고 밥그릇에 얹어보려던 찰나.
레이먼 션의 개수작에 휘말리고 말았다.
물론, 소득이 없진 않았다.
아니, 사실 무엇보다 큰 소득이 있었다.
‘레이먼 션의 목적을 알게 됐으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시간이 허비된 게 문제였다.
결국, 대괴수 세 마리가 빈사 상태에 빠질 때까지.
나는 손가락만 빨고 있었단 것이다……!
실체화한 전설, 흑암룡.
녀석이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사를 건네온다.
“그대의 용언을 잊지 않았다.”
아하. 그래서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아주 착실하게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구나, 흑암룡? 그 과정에서 ‘드래곤 로드, 흑암룡 이호열’ 전설의 위상이 더더욱 드높아졌겠어?
그런데.
‘저 경험치가 한두 푼도 아닐 텐데.’
레벨이 각각 천오백, 천삼백, 천사백이었다. 일천 레벨이 돌파하면서 레벨 업에 요구되는 경험치가 급상승했다고 하더라도 최소 수십 레벨은 상승했을 터.
‘그럼 뭐 하냐, 이미 물 건너갔는데.’
그렇다면 차선을 택하자, 호열아.
이번만큼은 고작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
그랑펠의 청렴결백을 본받아 보자.
‘레이먼 션, 도움이라곤 안 되는 자식…….’
나는 차오르는 억울함을 꾹 참고 내뱉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나의 용언에 흑암룡이 반응.
그런 흑암룡의 뜻으로 해츨링들이 공격을 멈춘다.
그나저나 그놈의 훈육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거냐, 그랑펠?
【만물의 왕은 굴복한 적의 목을 치지 않는다.】
뒤통수가 두렵지 않은 거냐고?
정말로.
그랑펠의 긍지를 몰라서 하는 말이군.
【후환을 두려워하는 자를 진정한 만물의 왕이라 할 수 없는 법.】
있는 폼 없는 폼을 다 잡는구나……!
그럼에도 이것이 현시점의 최선이었다. 이대로 대괴수들의 숨통을 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손가락을 빨 수밖에 없는 상황. 전리품은 물론이요, 경험치도 증발하는 상황.
그러니까 나는 펼쳐진 ‘심미의 길’로 나아갔다.
빈사 상태에 빠진 대괴수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덕분일까.
[퀘스트 : 대괴수의 주인]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녀석들의 목에 채워진 족쇄가.
저게 바로 폭군, 옥시딘이 쥐고 있던 목줄이겠지.
말도, 고민도 필요하지 않았다.
콰득.
내가 가볍게 허공을 주먹으로 쥐자.
대괴수를 옥죄고 있던 목줄이 그대로 으스러졌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점멸했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퀘스트를 성공하셨습니다.]
[대괴수, ‘만근의 거북’과의 관계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대괴수, ‘신화의 목마’와의 관계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대괴수, ‘해오름의 독사’와의 관계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그래, 이번에도 어찌어찌 한 건 했구나, 호열아.
위이잉.
안도하기 무섭게 문득, 진동이 느껴졌다.
뭐지, 안주머니에 손을 뻗는다.
녹차 티백을 애써 외면하며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흠칫했다.
잠깐만, 우리 성전 연합군 선생님들?
다, 당신들 지금 뭐 하고 있는 건데……?!
“합격이다.”
나의 당혹과는 무관하게 그랑펠의 평가가 떨어진다.
“그대들은 기이의 탐구에 소홀히 하지 않았군.”
.
.
.
[속보 : 대격변 이후 최대의 연합 작전 개시.]
[속보 : AAU, “현재 플레이어들과 활발한 실시간 정보 교환 중.”]
[속보 : AAU, “아직까지 이호열 플레이어의 행방은 묘연.”]
(중략)
[속보 : 현재 전해져 온 메시지는 ‘드래곤 로드, 흑암룡 이호열’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