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5화. 군주? 그 이상 (2)
그랑펠은 자비롭다, 그렇지 않다.
그 의문을 떠나 느낀 게 있다면.
뒤끝, 그거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심하다는 것이다.
나지막이 열리는 입술.
“재주를 부리는 건가.”
필드마저 변화시키는 세 마리의 몬스터.
나는 대괴수들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참고로 아르카나 대륙 전기에서 필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건 ‘급’이 다른 몬스터들의 상징과 같았다.
‘고유한 연출이 존재하는 거니까.’
나는 그런 어마어마한 보스 몬스터의 등장을.
해츨링들에게 지껄였던 왕의 자세로 지켜보며 평가했다.
아니지.
“구르는 재주가 굼벵이 못지않구나.”
……이 정도면 평가를 넘어선 독설이겠군.
보다시피 내뱉는 말에서부터 진한 뒤끝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말만 거창한 게 아니다.
일찌감치 여명의 재킷까지 제대로 착용했거든.
‘기이는 물론. 모든 걸 부정당할 거다, 옥시딘.’
상대가 마법사라면 마법으로 굴복시키고, 검사라면 검기로 굴복시키고, 잡기에 능한 암살자라면 마찬가지로 기술로 쓰러트려 왔던 내가 아니겠냐?
‘사실은 그냥 보고 따라 한 거긴 한데.’
그런 나의 발버둥을 우리 그랑펠 님께선 다르게 받아들이신 거겠지. 유낙서스의 유산, 무려 [신화] 등급의 아이템인 지휘관의 장갑을 착용하고 효과를 발동한다.
그러고는 【용언】으로 흑암룡.
【왕답게 맞이하라.】
그리고 세 마리의 해츨링 드래곤에게 명했다.
물론, 해츨링들을 통제할 권한은 내게 없었다.
‘심지어 악과도 정화하지 않았으니까.’
제 정신이 아닌 드래곤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다는 뜻.
하지만 사회가 다 그런 거다, 어린 드래곤들아.
너희는 내가 까라면 까야 하는.
이른바 하청에 하청이라는 거지.
슈우웅.
【그 위세를 저들에게 보여라.】
나의 명에 따라 흑암룡이 거대한 날개를 펼쳐 활강한다.
그러자 세 마리의 해츨링 또한 대괴수를 향해 쇄도한다.
이윽고, 떠오르는 메시지.
[해츨링, 이름 없는 어린 용이 필드를 변화시킵니다.]
그것이 상대방의 특기든, 비장의 무기든 모조리 능가해 굴복시키고야 마는 그랑펠의 성질머리가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대괴수, 만근의 거북 : Lv.1,500]
녀석이 일대를 자신이 헤엄치기 유리한 수중 필드로 변화시키기 무섭게. 해츨링이 내뱉은 드래곤 브레스가 필드의 수분을 모조리 증발시켜 버렸다.
[대괴수, 신화의 목마 : Lv.1,300]
목마(木馬), 나무로 만들어진 듯한 외관을 가진 놈의 형편은 더욱 좋지 않았다. 네 다리의 바퀴가 잘 굴러갈 수 있도록 대지를 평평하게 다진 모양인데…….
콰드득.
그 수고가 무색하게도.
드래곤들의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만물이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날뛰고 있었으니. 하늘엔 먹구름이 드리우고, 일대엔 땅이 갈라질 정도의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목마는 일찍이 삐걱거렸다.
마지막 녀석은.
[대괴수, 해오름의 독사 : Lv.1,400]
나와의 상성이 더더욱 불리했다.
‘독사라면 그냥 거대한 뱀이라는 거잖아?’
문득, 떠오르는 기억. 내게 ‘한없이 깊은 어둠’이라는 치욕스러운 이명을 안겨줬던 텟퍼른 미궁, 그곳에 잠들어 있던 녀석만 하더라도 이무기는 됐었거늘.
‘그보다 못한 독사면 알아서 기어야지.’
용과 뱀.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상성.
저쪽은 필드를 변형시킬 필요도 없어 보였다.
기다란 몸을 치켜세우는 게 필드를 변형시킬 여유도 없을 정도로.
독사는 눈앞의 해츨링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대괴수를 가로막는 세 마리의 드래곤이라.
솔직하게 나, 이호열 기준에선 합격선을 넘은 장관이었다.
드래곤 로드로서.
폭군을 짓밟는 그런 장면이 충분히 연출되었다는 거지.
실제로도 그랬다.
크롸롸라.
아무리 대괴수라고 해도 만물의 왕에게 대응할 순 없었다.
너무 강해 그동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대괴수들이라면, 드래곤들은 그걸로도 모자라 악과라는 족쇄까지 삼키고 있는 꼴이었으니.
그런 전투의 경과를 그랑펠식 화법으로 표현하자면…….
“비로소 주제를 갖춰가는군.”
쿵……!
마치 천적관계.
세 마리의 대괴수가 해츨링들 앞에서.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만족이 없는 드높은 기준.
“허나, 격식을 갖추기까지는 아직 멀었다.”
실제로도 아직 멀기는 했다.
같은 레벨이라고 해도.
보스 몬스터의 생명력은 일반적인 몬스터와 비교했을 때.
최소 일당백에 육박하니까.
‘그보다, 나도 뭐라도 해야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드래곤 로드, 흑암룡 이호열’ 전설만 더욱더 널리 울려 퍼지게 될 뿐. 진짜 이호열이 얻을 수 있는 건 없지 않겠냐?
어떻게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이라도 슬쩍…….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문득, 시야가 점멸했다.
풍경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필드가 불안정합니다.]
필드가 불안정하다.
원인은 곧장 파악할 수 있었다.
대괴수 녀석들이 몰고 다니는 보스 몬스터 연출.
필드 변화가 원인이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그위드, 대현자, 오크 옥션…….’
현시점에서 생사와 행방이 불분명해진 이들.
그들은 과연, 정말로 대괴수에게 패배한 걸까.
그들은 강하다.
어쩌면 내 생각 이상으로 강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기에.
‘……레이먼 션이 함정을 파놓은 거라면?’
질문을 던지는 순간.
[불안정한 필드가 붕괴합니다.]
연달아 점멸하는 메시지.
[불완전한 프로토타입 균열이 출현합니다. 던전, 미궁, 불가사의를 포함한 모든 타입의 기믹이 프토로타입 균열 내부 스테이지를 형성 중입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레이먼 션, 이 약아빠진 개자식아.
이윽고 저항할 수 없는 빛이 시야를 뒤덮었다.
[프로토타입 균열에 진입합니다.]
[적정 레벨 : 알 수 없음]
[타입 : 던전, 미궁, 불가사의…….]
불길한 예감처럼 아무래도 거부권은 없는 모양.
충분히 당황스러운 상황이거늘.
그럼에도 이 철면피엔 일말의 동요도 없으니.
“그 노력이 가상하구나.”
뒤바뀌는 시야 속에서도 태연하게 내뱉었다.
“높이 평가해 친히 어울려 주겠다. 허나, 기뻐하진 말거라.”
정말로 진한 뒤끝을 담아서……!
“이것이 그대에게 베푸는 최후의 자비니까.”
*
구구구궁……!
안토니움 동부.
진격해 오는 대괴수를 저지하기 위해서.
방어선을 구축했던 성전 연합군.
그러나 방어 측의 이점은 모래성처럼 사라져 버렸다.
꼴깍.
목이 타들어 간다.
흐트러진 안경을 고쳐 쓰고 바라본다.
냉철하게 분석관의 시점으로 상황을 파악한다.
“……균열에 휘말린 건가?”
스스로 다그쳐본다.
“원인,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해 남철민.”
플레이어에겐 권한이 있다. 자신의 레벨에 적합한 균열에 진입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단 말이다. 하지만 이 순간, 남철민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쏴아아.
강렬한 균열의 빛이 쏟아지더니.
지금이었다.
남철민은 정신을 추슬렀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대괴수.”
기억의 마지막에 다급히 소식을 전해오던 정찰병들.
-“분석관님! 피, 필드가 맞물려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각자가 보스 몬스터인 대괴수.
그들 각자가 필드를 변화시켰다.
떠올려 보는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던 시절의 지식.
‘원래라면 맞부딪힐 일이 없는 보스몹들이야.’
하지만 대괴수의 군주, 옥시딘.
그가 히든 클래스, [폭군]의 능력으로 대괴수를 통제하고 있는 상황.
남철민의 머리가 기어코 정답을 끄집어냈다.
“변화한 필드끼리 충돌해서 이 균열이 생성된 건가?”
그것도 더없이 불완전한 균열이.
남철민은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래, 모든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대현자, 원로 마법사, 그림자 용병단 못지않은 뒷골목의 대상인. 그 대단하신 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신 이유를 이제 좀 알 것 같은데……?”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이는 건 오직 하나.
복잡하게 얽힌 미로의 출입구뿐.
자신의 레벨은 고작해야 100레벨 언저리.
그럼에도 형편은 언급한 앞서 이들보다 낫겠지.
플레이어기에 시스템 메시지를 볼 수 있었으니까.
“후우.”
남철민은 숨을 고르고 균열 정보를 확인했다.
“던전, 미궁, 불가사의……. 모든 기믹이 불안정하게 얽혀있는 불완전한 프로토타입 균열이라고……?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레이먼 션?”
전문가라 하는 [탐험가] 클래스 플레이어들조차도.
하나의 던전을 공략하는 데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던전에 미궁이 결합된 것만 하더라도 충분히 말이 안 되는데.
그 상위호환이라고 할 수 있는 불가사의 타입.
그것도 모자라 미지의 기믹들까지 추가된 상황.
아르카나인들은 이런 정보조차 알 수 없을 테니까.
“……강함을 떠나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게 당연해.”
물론, 타인을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분석관, 덕분에 형편이 없는 레벨.
남철민은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태민이랑 약속했는데, 다신 입지 않겠다고.”
척.
자신의 판금 갑옷, 그리고 방패를 착용했다.
다신 입지 않겠다고 다짐했기에.
내구도는 온전하지 않았다.
[튼튼하기만 한 판금 갑옷]
[등급 : 매직]
[제한 : Lv.35]
[효과 : 내구도가 낮아 모든 성능이 소폭 하락]
하지만 어째서인가.
“근데 태민아, 형 아무래도 간이 커진 것 같아.”
과거,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적정 레벨의 균열에 진입했을 때보다도.
오히려 지금이 마음이 더 편했으니까.
슥.
남철민은 손끝으로 내구도 하락의 원인.
판금 갑옷에 새겨진 상처를 매만졌다.
구체적으로는 하급 악마 임프에게 빙의당했던 과거.
호열이 자신을 구원하며 남긴 흔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도하다니…….”
정작 이 순간.
곁에는 호열도, 태민이도, 길드원들도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인가, 혼자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이겠지만, 어쨌든……!”
남철민이 굳어버린 육체를 풀고.
균열의 클리어를 위해.
탈출을 위해 미로에 진입하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형!
귓가에 소리가 울렸다.
남철민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환청은 심각한 단계 아닌가?”
그런데.
-……형! 들려?!
“?!”
환청이 아니었다.
남철민은 안주머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황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인이어에서 남철민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뭐, 뭐야? 태민아, 너 뭐야?!”
어디까지나 아르카나 대륙이었다.
신호가 터지지 않으니, 통화도 가능할 리가 없는데.
어떻게 통신이 되는 거지……?
“너 기이야?!”
-……기이? 갑자기 뭔 뜬금없는 소리야? 쨌든 무사해서 다행이네. 그래서 형 지금 어디야? 형도 나처럼 혼자 균열로 떨어진 건 아니지?
……형도 나처럼?
불현듯 스쳐 가는 가능성.
남철민이 중얼거렸다.
“……잠깐, 불완전한 균열이라면.”
이 프로토타입 균열이 지니고 있는 온갖 기믹에 ‘현실’과 관련된 기믹 또한 포함된 거라면? 이 현상 또한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태민아, 우리 머리를 쓸 때가 온 것 같아.”
-머리를 써야 한다고? 형. 기대를 배신해서 미안한데……. 나 바바리안이야. 머리를 쓴다고 하면 그냥 박치기밖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상관없어. 머리를 모으는 게 중요한 거니까.”
-……머리를 모아? 박치기 대회는 아닐 테고, 뭔데?
남철민은 피식 웃었다.
호열 씨가 어째서 그토록 [『기이』]를 강조하신 건지.
그 뜻을 뒤늦게라도 하나씩 알아가게 되는 것 같았다.
“기이의 탐구를 통해 우리의 집단 지성을 활용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던전, 미궁, 불가사의, 어떤 새로운 기믹이라고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결국엔 클리어할 수 있을 테니까!”
남태민이 말을 더듬는다.
-기이 탐구? 집단 지성? 형, 어려운 말은 쓰지 말아줄래?
그 말에 남철민이 간결하게 핵심을 말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데. 우리는 현실에 있는 플레이어, AAU와도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황이잖아? 다들 프로토타입 균열이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 파악한다면, 서로 연락할 수 있단 것만 깨닫는다면,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단 거야.”
그러자 남태민은 곧장 되물어왔다.
-그러면 총대장님, 아니, 호열 씨는?
“……총대장님?”
-우리 연락을 받으실까? 평소처럼 곤란하다고 하시면?
글쎄.
거기까진 남철민도 섣불리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려가 되진 않았다.
슥.
갑옷에 남겨진 검상을 향하는 시선.
“걱정하기 전에 호열 씨는 우리랑 ‘격’이 다르시잖아?”
.
.
.
그런 남철민의 생각은 옳았다.
사방이 미로로 둘러싸인 공간.
음험한 【용언】이 울려 퍼진다.
【깨져라.】
그러자 깨졌다.
와장창!
[프로토타입 균열, ‘미궁’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다.”
하나.
한 개의 참을 인(忍)이 새겨졌다는 뜻.
차가운 호열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부디 나의 자비를 시험하지 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