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4화. 군주? 그 이상 (1)
드래곤 피어가 울려 퍼지는 반경 전체에 시스템 메시지 출력됐다. 사실상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플레이어가 알게 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는 뜻.
“드래곤 로드 흑암룡 이호열……?”
“뭐야, 이호열 클래스가 드래곤 로드였어?!”
“클래스? 그러면 흑암룡은 그냥 수식어 같은 건가?”
“클래스든, 뭐든 잘은 모르겠지만 엄청나잖아? 드래곤 로드가 됐든, 흑암룡이 됐든, 용기사랑은 차원이 다른 느낌인데? 스칼, 그거 불쌍해서 어떡하냐.”
“그보다 다들 봤지? 방금 하늘로 날아가는 거!!”
세 마리의 드래곤.
그리고 세 마리의 드래곤을 합친 것보다 거대한 크기의 흑암룡 한 마리가 아르카나 대륙 상공을 가로지르던 장관. 몇몇은 아예 기록으로 남긴 상태였다.
재생 버튼을 터치하자 화면에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드래곤들.
“이야, 잘 찍히긴 했는데……. 여기가 아르카나 대륙인 게 진짜 아깝다. 현실이었으면 실시간 중계로 이 어마어마한 걸 세상에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돌아가서 넷튜브에 업로드하면 되지, 뭐.”
“맞아. 꼭 실시간이 아니어도 조회수 엄청 찍힐걸?”
보자, 영상의 제목이야 거창하게 포장할 필요도 없었다.
담백하게 떠올랐던 메시지 그대로.
‘드래곤 로드 흑암룡 이호열’로도 충분할 테니까.
“글쎄, 이런 건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니까요?!”
‘누군가’가 경악할 만한 대화도 잠깐.
“저기, 회의도 끝난 것 같은데요?”
드디어, 성전 연합군의 간부들이 임시 막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우렁찬 드래곤 피어가 성전 연합군 간부들에게도 힘이 됐던 거겠지.
“들어갈 때 나올 때 표정이 다르시네들.”
“당연하지! 총대장님이 합류하셨잖아?”
“그치? 존재감만으로도 더없이 든든한 기분이야.”
여명의 세트 효과.
최대치의 다다른 사기는 진작부터 효과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안심할 수 없었다.
설령 다른 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도.
‘……남태민, 너는 안심해선 안 돼.’
스스로 다짐하던 남태민이 작게 속삭였다.
“형.”
“응?”
“총대장님. 호열 씨, 평소랑 다를 게 없으셨지?”
얘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 그렇지? 사실 장발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되긴 하지만.”
남철민은 헤헤 웃음을 흘렸다.
말 그대로.
호열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남태민은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형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데.
그렇다면 내가 그날 맡았던 이질적인 냄새는 대체 누구의 것일까? 총대장, 호열 씨는 그저 새롭게 습득한 스킬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로 단순한 스킬의 영향일까. 그렇다면.’
그랑펠 클라우디…….
이하 생략.
그 긴 이름이 뜻하는 건 대체 무엇일까.
바바리안.
단순무식한 클래스의 영향인지.
그게 아니라면 혈육이라서 그런 건지.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구나?”
남철민은 경직된 동생의 얼굴에서 우려를 읽어낼 수 있었다.
물론,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나눌 수 있는 고민이었다면 태민이.
네가 먼저 고민을 털어놓았을 테니까.
남철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내가 더 분발해야 하겠는데?”
“……갑자기? 형이? 뭘?”
“뭐긴 뭐야.”
그러니 남철민이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분석관으로서 차선을 내놓는 것뿐이었다.
남철민이 태블릿을 꺼내 다시금 계획을 확인했다.
“잘 생각해 봐, 태민아. 마왕이나 거악 같은 악마들이 날뛰던 평소와 다르게 이번 전투의 목표는 간단하잖아? 우리가 대괴수 레이드를 성공하면 그걸로 끝이야.”
남태민이 곧장 그 뜻을 알아들었다.
“끝이라면 그 뒤로는 역시……?”
“그래, 뭘 하든 우리 자유겠지?”
“뭣하면 다른 쪽으로 지원을 가도 되는 거고?”
“물론, 짐이 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건 무조건이야!”
그런 형제의 대화에 끼어든 건.
거대 연합의 나머지 두 기둥.
히사기와 레오니였다.
“이거 저희도 분발해야겠네요, 레오니 양.”
“뭘?”
“혼자 앞서나가는 태민 군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이번 대괴수 레이드에서 어떻게든 껍질을 깨야 할 테니까요. 같이 기이의 문을 두들겨 보자구요.”
“……뭐라는 거야, 이건?”
레오니가 어이를 상실하기도 잠깐.
이윽고, 성전 연합군은 자신들의 위치로 흩어졌다.
홀로 대륙의 한 축을 떠맡은 호열의 무게를 간과하지 않은 채.
그러나 남태민을 포함.
성전 연합군의 어느 누구도.
호열이 있는 안토니움의 남쪽으로는 진격할 수 없었다.
천리를 내다볼 수 있는 시야.
정찰병 역할을 수행하던 플레이어들.
그들이 지평선 끝 대괴수.
아니, 대괴수‘들’을 포착했다.
“잠깐. 저 새끼들, 뭔가 이상해!!”
다중 보스 레이드의 위협이 엄습해 오고 있었으니까.
*
AAU 대한민국 지부.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으니.
실시간으로 정보와 소식을 교환할 순 없었다.
성현준이 작게 중얼거렸다.
“유스라 총책임자님이시라면 가능하시겠지만…….”
혼자서 포탈을 열고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을 드나드실 수 있는 총책임자님이셨다.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와 다름없으실 터.
“그럴 새가 없으실 테니까요.”
유스라 총책임자이자 플레이어, 이호열.
한 번쯤은 자신의 업적을 뽐내며 으스댈 법도 하시건만.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신 이후로.
단 한 번도 초심을 잃지 않으신 분이 아니시던가?
윤수겸이 대꾸했다.
“업적 같은 데에 욕심이 있으셨으면 뭣보다 플레이어 랭킹 정보부터 공개로 수정하셨을걸? 랭킹보다 직관적으로 강함을 증명할 방법은 없으니까.”
“하긴, 그거야 그렇죠.”
“애초에 레벨은 숫자에 불과하시다 여기시는 분이니까. 자, 지금도 고생 중이실 총책임자님 이야기는 그쯤하고……. 그래서 다들 어떻게 생각해?”
회의실.
두 사람은 평소처럼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게 아니었다.
긴급 업데이트.
그것도 대괴수라는, 간만에 밥값을 할 수 있는 상황.
AAU 구성원들의 눈에는 피곤보다 활력이 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윤수겸이 피식 웃었다.
“현준이, 너부터 마탑 물을 맛보더니 변했구나?”
묘하게 계륵 취급을 받던 집단, AAU였다.
그에 관해선 사실 불만을 토해낼 순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티 나요, 선배?”
“그래, 완전 눈이 이글거린다 너?”
“마탑에서 귀빈 대우를 받았는데 열심히 해야죠!”
호열이 유스라 총책임자로 취임하면서.
AAU 또한 성전 연합군에 편성되면서.
과거의 부정적인 평가는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쵸, 저희도 뭐라도 해야죠!”
“플레이어들은 저희보다 네 배는 바쁘게 사투를 벌이고 있잖아요?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오갈 데 없는 우리를 한배에 태워줬는데.”
“맞아요. 칼퇴근할 때보다 지금이 낫다니까요!”
“……현준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성현준의 마지막 말에는 윤수겸마저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열의를 다하지 않는단 뜻은 아니었다.
그 덕분일까, 회의는 생산적인 결과를 이끌어냈다.
“알다시피 보스 몬스터는 격이 달라. 일반 몬스터와 레벨이 같다고 해도 체력부터가 차원이 다르지. 당연해. 엇비슷한 레벨의 플레이어 수십, 수백이 달라붙어야 사냥할 수 있는 놈들이니까.”
“그렇죠. 그에 따르는 연출도 상당하고요.”
“맞아, 놈들은 기본적으로 필드를 변화시키지.”
그렇다면 한 가지 우려가 따르는 게 당연했다.
“최소 1,000레벨. 뭐, 한 마리라면 어떻게 수만 명이 달려들어서 레벨 차이를 상쇄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물량에는 장사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한 마리 이상이 되면……?”
윤수겸이 무겁게 답했다.
“서로 크래쉬를 낼지도 몰라.”
한때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개발자였던.
AAU의 직원들이었기에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었다.
성현준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렇죠? 한 필드에 한 마리 이상의 보스 몬스터가 출몰하는 건 대륙 전기 시절에도 금기였으니까요. 보스몹의 영향력이 충돌하면 어떤 결과를 일으킬지 모르니까요!”
성현준이 애써 동의를 구했다.
“그러니까 그 설정도 어렴풋이 남아있지 않을까요? 서로가 너무 강해서 대괴수들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알아서 피하는 그런 느낌으로……?”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업데이트 내역에 녀석이 없었다면 말이지.”
“녀석이라면……?”
“대괴수의 군주, 옥시딘.”
성현준의 추측은 날카로웠다.
보스 몬스터는 서로를 회피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스를 수 없는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거라면?
윤수겸이 불길하게 입술을 떼었다.
“어쩌면…….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부터 내려오던 금기는 이미 깨졌을지도 몰라. 그로 인해서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겠지.”
*
안토니움 남부.
[업적 : 만물의 왕, 드래곤에 올라타다]
[효과 : 모든 탈것에 관한 숙련도가 최대치로 상승]
[지속시간 : 영구지속]
나는 흑암룡의 머리 위에서 꼿꼿하게 선 채로 주위를 둘러봤다.
나의 뒤로는 여전히 흉흉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베히모스의 아가리가 있다. 앞에는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는 대괴수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곁에는.
“크르르.”
아직 악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드래곤들이 있다……!
실로 간담이 서늘해지는구만.
한 마리라면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척이라도 해볼 텐데.
무려 셋이다.
‘……막말로 쟤들이 달려들면 감당할 자신이 없는데?’
그러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옮겨간다.
‘흑암룡. 너, 어떻게 한 거냐?’
실체화 한 나의 전설, 흑암룡에게로.
내가 드래곤 로드의 왕좌를 분신인 네게 양보하기는 했다만.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단 말이다.
‘내 흑암룡 전설엔 워낙 많은 거품이 꼈으니까.’
그러나 순수하게 얼마나 널리 울려 퍼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전설의 위력이렷다……. 덕분에 흑암룡은 드래곤 로드의 능력을 온전히 다룰 수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슬피 울지 마라, 동족이여.”
흑암룡은 입방정마저도 나의 분신답게 거창했지만.
“대지는 아직 비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 용이 울면 비가 내리긴 하지.
얘네들은 다른 의미로 울고 있는 것 같았다만.
어쨌든 대단하구나, 흑암룡.
‘괜히 히든 클래스가 아니란 건가.’
만물의 왕.
드래곤을, 그것도 악과에 의해 제정신이 아닌 드래곤조차도 따르게 하는 힘이라니. 셋 모두 해츨링이라고 해도 엄청난 능력이다. 이게 바로 내가 단신으로, 남부의 대괴수를 맡겠다고 선언한 이유였다.
점멸하는 시야.
[아르카나 대륙에 대괴수, ‘만근의 거북’이 출현합니다.]
[아르카나 대륙에 대괴수, ‘고통의 목마’가 출현합니다.]
[아르카나 대륙에 대괴수, ‘해오름의 독사’가 출현합니다.]
모습을 드러내는 대괴수들.
각자가 웬만한 뒷산보다 덩치가 크다.
저런 덩치를 가진 놈들이 사이좋게 전진해 오는 모습에선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저게 바로 폭군으로 거듭난 옥시딘의 [『기이』]일 터.
내가 단신으로 나선 이유가 바로.
그 잘난 옥시딘의 기이를 정면으로 박살 내기 위함이었다.
나는 입술을 떼었다.
“우습지 않은가.”
거 듣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누구의 존경도 받을 수 없기에. 스스로 짐승들의 군주를 자처하는 모습이. 하지만 그마저도 조악하기 짝이 없구나.”
누군가 듣고 있었다면 인성 논란이 제기될 정도로.
심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구나, 그랑펠.
그러나 이번만큼은 잘했다.
‘이 정도는 해줘야지.’
옥시딘과 대괴수가 날뛰기 시작한 이유?
아르카나 대륙의 새로운 흑막으로서 아르카나 대륙 전기 플레이어 모두를 적으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바로 레이먼 션, 녀석이 원하는 업데이트의 방향이겠지.
그러니까 나는 그걸 박살 내야만 했다.
‘녀석이 다시는 허튼 생각을 품지 못하게.’
이미 악마와 다를 바 없는 레이먼 션이다.
당연하게도 자비는 없으니.
처분의 강도 또한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
‘그래서, 대체 누가 대괴수란 말이냐?’
크롸롸롸─!
대륙에 울려 퍼지는 흉포한 드래곤 피어.
이성을 잃은 만물의 왕 드래곤을 앞에 두고.
덩치만 커다란 거북이, 말, 뱀 따위가.
대괴수를 자처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냐?
‘그리고 뭐라고?’
히든 클래스, 폭군?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뭐가 됐든, 히든 클래스인 드래곤 로드를 능가할 수 있을까?
‘이쪽은 전직 난이도부터 차원이 다르거든.’
그리고 마지막으로.
옥시딘, 네가 이제 막 기이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면.
나는 이미 『기이의 대종사』란 말이다.
“침묵을 지키거라.”
그러니 서운하더라도.
내게서 배움을 구걸할 생각은 하지 마라, 옥시딘.
내 강단에 너를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래, 이 시간부로 시작되는 건 너를 위한 훈육이 아니다.
“명심하거라.”
입을 다문 세 마리의 드래곤들.
그 어린 해츨링들을 향해서.
나는 가르치듯 읊조렸다.
“자세를 바로 세우고 목도하라.”
어린 드래곤들에게 참…….
“이것이 바로 만물을 굽어살피는 왕의 자세다.”
좋은 취향을 심어주고 있구나, 그랑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