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73화 (473/489)

◈ 473화. 대괴수 (2)

당연한 이야기다.

[대괴수, ‘벨라의 거신병’이 필드를 변화시킵니다.]

어디까지나 아르카나인.

유그위드 뤼펭은 시스템 메시지를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위협을 직감했다. 혼신을 다한 발현이었거늘. 최상위 마력 회로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골렘조차도 녀석의 전진을 저지할 순 없었으니까.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닌데.”

유그위드는 타들어 가는 마력을 가늠했다.

거신병에게 대응할 수 있는 크기의 골렘을 발현하는 데에만.

이미 상당한 마력을 소진했다.

그럼에도 역부족이었다.

쿵!

양손을 맞대고 힘을 겨루는 골렘과 거신병.

쿠구구궁!

겨루기의 압력만으로 일대가 요동쳤다.

내 방식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나.

유그위드는 고집을 꺾고 대지 마법에 약간의 기교를 섞었다.

파삭.

거신병이 디디고 있는 지반을 일순간 약화시킨 것.

덕분에 거신병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골렘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가속하는 골렘의 육체.

그에 대한 반발.

거세게 타오르는 골렘의 마력 심장.

“큭.”

심장이 저절로 부여잡아진다. 유그위드는 마력 탈진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했다. 그렇다는 말은 지금의 일격으로 거신병과의 전투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뜻.

콰득.

골렘이 거신병의 한쪽 팔을 붙잡고 그대로 드러눕는다. 뭉툭한 파열음과 동시에 뽑혀나가는 거신병의 팔뚝. 균형을 잃으며 휘청거린 녀석은 팔 하나를 잃었다.

전신을 감싸고 있는 갑옷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지금의 일격은 갑옷을 착용한다고 막을 수 있는 피해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뭐냐, 이 녀석은?

“!”

공격을 적중시킨 유그위드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유그위드는 볼 수 없었지만.

이 순간 그런 메시지가 떠올랐을 테니까.

[대괴수, 벨라의 거신병에게 ‘출혈’이 발생합니다.]

[대괴수, 벨라의 거신병에게 ‘마비’가 발생합니다.]…….

대지에 흩뿌려지는 혈액.

덩치답게 그 출혈량이 상당했기에.

유그위드의 뺨에도 피 한 방울이 튀어올랐다.

슥.

유그위드가 손으로 뺨을 닦아내자 피가 번진다.

유그위드는 거신병의 피를 눈으로, 온기로 확인했다.

덕분에 내뱉을 수 있었다.

“넌 살아 있구나.”

덕분에 메시지를 볼 수 없는 유그위드도 녀석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랬군, 골렘 소환 마법의 영감이 되었다던 아르카나 대륙의 존재들.

“거신병.”

다르게 말하자면 거인족의 전사들.

유그위드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이러니까 골렘으로는 대적할 수 없던 거겠지.

“모방품으로는 진짜를 뛰어넘을 수 없으니까.”

후드득.

마력 탈진이 가까워진다.

유그위드의 골렘이 천천히 흙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에 반해서 거신병은 중상을 입었어도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래서는 누가 골렘인지.”

원로 마법사로서 쌓아온 지식이 흔들리는 기분이군. 거인족이 대륙에 생존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그 거인족이 무자비한 파괴를 자행하고 있었다.

“내 이명이 괜히 온순한 거인이 아닌데 말이야.”

전설에 따르면 거인족은 온순하다고 여겨졌다.

그런 거인족 중에서도 거신병들은 과거.

고대 아르카나 대륙의 수호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했다.

그런데, 눈앞에 거신병은 어떠한가?

콰득.

유그위드가 복원한 마을뿐만이 아니었다.

거신병은 두 발로 울창한 숲을 짓밟고.

그 아래 살아 숨 쉬는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뒤였다.

‘심지어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

유그위드는 직감할 수 있었다.

분명, 거신병에겐 이상이 생긴 것이라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그위드는 마법사답게 입을 열었다.

“내겐 이 수석 같은 섬세함이 없어.”

이 수석, 그대라면.

거칠게 날뛰는 거신병조차도 구원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런 성격이 되지 못하네.

나는 타고나기를 천상 마법사이지 않은가?

“성질머리부터가 괴팍하단 소리지.”

고오오.

유그위드는 마지막 마력을 끌어올렸다.

서클을 형성하지 못한 마력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다.

오래 전부터 한계점을 알려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그위드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유야 간단하지 않은가?

거신병이 나아가는 방향엔.

자신의 손길이 닿은 대지가 있었으니까.

유그위드가 입을 열었다.

“애써 일군 대지에 타락한 씨앗을 심을 생각은 없으니.”

쿠구구궁……!

.

.

.

대현자, 라이즈.

“힘없는 노인에게 너무하지 않은가.”

그는 대괴수, ‘살육의 맹수’를 쓰러트렸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쳤다.

라이즈는 놈의 행동을 돌아봤다.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게냐.”

대현자라 불리는 나조차도.

죽음을 향한 공포는 극복하지 못했거늘.

어떻게 한낱 짐승이 원초적인 본능을 뛰어넘을 수 있었는가.

대현자의 현명한 머리가 답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죽음의 공포조차 뛰어넘는 ‘무언가’에 시달린 거겠구나. 그래,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느냐? 이런, 죽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겠구나.”

이럴 땐 판도라의 다락방이 그리워졌다.

그러나 라이즈는 고개를 저었다.

다락방의 점괘를 믿지 않겠다고 선언한 게 얼마 전이다.

결심을 헛되이 하면 안 되겠지.

그러나 노파심은 어쩔 수 없군.

스오오오…….

멀리서 불길한 굉음이 들려온다.

“……내 기억력이 아무리 흐릿해졌다고 한들.”

한 마리의 대괴수를 처치했다는 게 무색하게도, 또 다른 대괴수들이 대륙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흉흉한 살기를 내뿜으며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다락방에서도 이러한 예지를 목격한 기억은 없는데.”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클라우디.

당신 말고도 다락방의 점괘를 벗어난 존재가 있다는 것.

라이즈는 웃었다.

“이런,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일까요.”

그 말은 아까도 말했듯 판도라의 다락방이 내놓은 점괘를 마냥 신뢰할 수 없다는 뜻과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라이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클라우디께서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피해 가실 수 있을 테니.”

이윽고.

라이즈, 그의 머리 위로.

또 다른 대괴수의 그림자가 엄습했다.

[대괴수, ‘팔색조’가 필드를 변화시킵니다.]

*

대현자, 라이즈.

오크 옥션.

마지막으로 마탑의 전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

‘대괴수, 기어코 이름값을 하겠다는 거냐.’

아무래도 나, 이호열의 우려가 현실이 된 모양이었다. 다른 세력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앞서 언급한 셋은 고작 일천 레벨짜리 몬스터에게 패배할 이들이 아니었다.

‘설령, 급이 다른 보스몬스터라고 해도.’

승부를 내는 데에.

시간이 지연되었을지언정.

패배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뜻이다.

초월자 사교장, 상층에 출입할 수 있는 대현자 라이즈. 마탑의 원로 마법사였던 유그위드. 천하의 그림자 용병단도 그들의 세력에선 그들의 법을 따랐다던 오크 옥션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역시, 발을 들인 거다.’

옥시딘, 녀석도 기이의 영역에.

아르카나 대륙에서 대괴수를 움직인 것만 해도 그 증거였다.

AAU는 내게 대괴수에 관한 정보를 보내왔었다.

-“거신병, 살육의 맹수, 팔색조. 전부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 개발 콘셉트가 남아 있는 레이드 보스 몬스터로 판명됐습니다! 다만, 그 시절엔 등장할 수 없을 정도로 고레벨로 예정된…….”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클래스, [폭군]의 능력으로 설정 탓에 잠들어 있던 대괴수를 일깨울 수 있던 거겠지. 더욱이 그 능력을 휘두르고 있는 게 평범한 아르카나인이 아닌 초월자니까.

‘쉽지 않겠는데.’

그러나 말하지 않았냐?

아무리 그래도.

내가 옥시딘을 두려워 할 처지는 아니라고.

“준비는 되었나.”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미 대괴수의 공습이 시작된 지금.

여유를 부릴 새는 없었다.

이쪽도 시작부터 전력을 다해야만 한다는 뜻.

[여명을 기다리는 자 5/5]

[세트 아이템 효과가 적용됩니다.]

[현재 적용 중인 세트 효과 : 5/5]

[1. 지휘관일 때 아군의 사기가 ‘최대치’가 됩니다.]…….

최대치에 다다른 사기의 효과는 언제 봐도 대단했다.

제대로 각이 잡힌 성전 연합군을 대표로.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이 고개를 숙인다.

“부디 명령을.”

베히모스의 아가리 인근.

파이몬이 나와 약조 아닌 약조를 맺고 돌아간 지금.

당분간 아가리에서 악마가 역류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녀석일 테니까.’

덕분에 당분간은 레이먼 션의 트롤링을 진화하는 데에, 대괴수를 사냥하는 데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곧장 병력을 나눴다.

“안토니움 기준, 서쪽으로 아이언 캐슬 호가 진격한다. 동쪽으로는 성전 연합군과 추후 합류할 모험가들을 주축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북부로는 프로즈낙스, 그리고 안토니움 본성에 대기 중인 나의 사병이 진격할 것이다.”

대충 들으면 적당히 역할을 분담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부 이유가 있는 병력 배치였다.

이번 긴급 업데이트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합류한 남철민.

슥.

그가 지도를 펼치고 설명을 덧붙였다.

“안토니움 서부는 산맥지대로 지상군이 활약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상공에서 활약할 수 있는 아이언 캐슬 호가 나서는 게 옳겠고, 동쪽에 가장 많은 병력이 배치된 이유는 가장 많은 네 마리의 대괴수가 포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론, 남철민 이상으로 안토니움의 지리에 해박한 제국 마법사 내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스스스. 지도 위로 떠오르는 마력 모형이 설명을 보완한다.

“그런 의미에서 안토니움 북부엔 최정예 병력이 투입될 수밖에 없겠지요. 새롭게 싹을 틔운 세계수, 그런 세계수를 노리는 태초 악의 부산물이 여전히 마수를 뻗쳐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본대에 합류한 든든한 지원군.

자랑스러운 마탑의 탑주.

우리 마르셀로가 입을 연다.

“저희 마탑은 모든 방향에 적절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탑의 전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 뤼펭의 신병을 확보하겠습니다.”

마르셀로는 유그위드만 언급했지만, 비단 유그위드뿐만이 아니다. 대현자 라이즈, 그는 클라우디의 초대장에 응답했던 이들 중 하나였던 바.

나는 마르셀로에게 부탁했다.

“대현자의 행적 또한 부탁하지.”

“그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양해를 구하며 입을 연 건 남태민이었다.

남태민의 손가락이 지도 아래, 남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쉬가 마력 모형으로 생생함을 더한 덕분.

곧바로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안토니움의 남부령.”

안토니움 남쪽으로는 무려 베히모스의 아가리가 있었다.

아까 말했듯 파이몬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만.

상위 마왕엔 파이몬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어디까지나 악마잖아?’

그의 말을 순진하게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뜻.

성전 연합군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겠지.

위험도로만 따지자면 남쪽이 제일 위험하니.

가장 많은 병력이 투입되어야만 했거늘.

‘정작 내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다들 걱정할 것 없다.

그렇지 않아도 투입할 생각이었거든.

어떤 대괴수, 악마에도 무너지지 않을 최강의 전력을.

나는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곳엔 내가 있다.”

그렇다.

내가 남쪽에서 진격해 오는 대괴수를 막아설 생각이었다.

나의 선언에 성전 연합군엔 잠깐 소란이 일었다.

“총대장님,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는……!”

물론, 나는 한결같은 태도로 우려를 종식시켰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윽고, 막사 밖에서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

“이미 그곳에 내가 있다.”

크롸롸라.

고막을 때리는 드래곤 피어와 동시에.

나의 시야.

그리고 플레이어들의 시야가 점멸한다.

[드래곤 로드, ‘흑암룡 이호열’이 아르카나 대륙에 거대한 날개를 드러냅니다. 흑암룡 휘하, 세 마리의 드래곤이 울부짖습니다.]

“!!!”

……모두가 놀란 만큼 나도 놀랐다.

‘드래곤 로드, 흑암룡 이호열? 그, 그걸 이렇게 떠벌린다고?!’

진짜, 미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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