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72화 (472/489)

◈ 472화. 대괴수 (1)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식상하게도.”

그랑펠이 내게 질 새라 한마디를 거든다.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군.”

그림자 신이 아르카나 대륙 최대 흑막으로 거듭나는 원래의 스토리가 나, 이호열로 인해서 비틀어진 지금. 레이먼 션이 할 수 있는 건 긴급 업데이트를 통한 밸런스 조절일 터.

‘그림자 신의 대타가 바로 대괴수렷다.’

대괴수는 대격변. 그리고 마계의 범람 속에서도 악마에게 굴복하지 않은 아르카나 대륙의 몬스터를 뜻하는 말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개체 하나하나가 최소 제로 산맥의 보스 몬스터급이라고 보면 되겠지.

‘최소 1,000레벨.’

그 압도적인 레벨을 향한 나의 평가는 간단명료했다.

“숫자밖에 내세울 게 없다니, 가엾구나.”

가엾기는 개뿔.

상위 마왕 파이몬이 물러가자마자 저런 거랑 싸우게 생긴 우리가 훨씬 가엾기 짝이 없구만. 아르카나와 현실, 플레이어들은 이미 긴급 업데이트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

또각.

이 순간, 마탑의 계단을 거닐고 있는 나의 귓가에도 쉴 새 없는 담화가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그 속삭임엔 비단 플레이어의 목소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대괴수라면, 제 고향에도 전설로 전해지는 엄청난 녀석이 있었죠! 커다랗고, 화려한 빛을 내뿜는 새……. 아니, 이번에는 진짜로 허세가 아니라니까요 지브릴 양?!”

마르셀로, 선임 마법사들을 넘어서 이젠 숙련 마법사들까지도 ‘누구’의 가르침을 따라 기이의 탐구에 익숙해진 모양이군. 그 탓이겠지.

마탑에도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수석님.”

약속 시간 정각.

크리스탈 홀에 진입하자 탑주, 마르셀로가 나를 맞이했다.

피골이 맞닿았던 과거에 비하면 얼굴이 많이 폈구나, 마르셀로.

물론.

‘다시 피골이 상접해질 정도로 바빠지겠지만.’

크리스탈 홀.

강단에 올라 청중을 바라본다.

마탑의 선임, 숙련 마법사들.

AAU 지부장.

성전 연합군의 플레이어들까지.

좌중의 분위기는 무겁기 그지없다.

대괴수보다 더한 마왕도, 거악도 사냥했으면서 괜히 호들갑을 떠는 거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솔직히 말해 대괴수 정도면 반가울 정도였다.

‘전리품, 경험치를 떠나 귀중한 경험이 되겠지.’

보스몹은 흔치 않고, 그런 보스 레이드 경험은 더더욱 쌓기 어렵다.

성전 연합군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건 물론, 실전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마탑의 마법사들도, AAU도 그를 통해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지.

돌려 말하지 않는 성질머리.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대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간단하다.”

역시나 그랑펠식 화법으로.

“기이의 탐구 도중 의문과 마주했기 때문일 터.”

……그 몇 번이나 말하지만, 기이의 탐구는 인터넷 서핑의 거창한 표현이다. 이런 나의 화법에 익숙하지 않은 몇몇 숙련 마법사들이 멈칫했다.

나도 덩달아 흠칫했다.

“기이의 탐구? 뭔진 몰라도 엄청 대단한 것 같죠?”

크흠, 그들이 자세한 뜻을 알아차리기 전에 말을 잇는다.

“초월자, 옥시딘.”

옥시딘.

나는 그 이름을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냐?’

초월자 동맹이라는 음흉한 판을 계획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그는 플레이어의 클래스를 강탈한 아르카나인이었으니까.

그렇다, 그 결과가 세상에 드러난 것이었다.

거대 연합의 분석관, 남철민.

그가 준비한 자료를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여기를 보시면……!”

허공에 떠오른 광활한 화면.

아르카나 대륙 전기 공식 홈페이지가 떠오른다.

화면이 전환되고, 플레이어 랭킹이 갱신된다.

‘진심, 일찍이 비공개로 바꾸길 잘했지.’

수치스러운 풀네임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걸 막기 위해서.

각성 초창기부터 곧장 랭킹 정보를 비공개로 수정했던 나였다.

벅차오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잠깐.

남철민.

그가 청중석에서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는 혈육.

남태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플레이어 공식 랭킹이 1위가 바뀌었습니다.”

──────

1. 옥시딘 : Lv.1,280

2. 남태민 : Lv.706

3. 히사기 카즈마 : Lv.692

4. 레오니 벨루치 : Lv.665

5. 스칼 : Lv.664

6. 제시 하인네스 : Lv.642…….

──────

평상시 같았다면 세상은 달아올랐을지도 모른다.

여태까지 랭킹 정보를 비공개해 왔던 은둔 고인물이 등장했다며.

어쩌면 나의 라이벌이 등장했다고 난리를 치고도 남았겠지.

그러나 초월자, 옥시딘의 이름은 이미 홈페이지에 언급된 후였다.

다른 곳이 아닌.

이번 긴급 업데이트 내역에 말이야.

AAU의 지부장.

그들을 대표해 미합중국 지부장, 조슈아가 손을 들어 올려 내게 양해를 구해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준비했던 자료를 읽어나갔다.

“대격변 이전에도 이후에도 플레이어에게 공식 랭킹은 증명과도 같았습니다. 플레이어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랭킹 정보를 비활성화할 이유는 전무하다는 뜻입니다.”

……과연 그럴까?

조슈아 지부장.

그건 당신이 내 사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나는 그런 뜻을 담아서 조슈아를 바라봤건만.

철면피인 내 속내를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이호열 유스라 총책임자님처럼 증명조차 필요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면, 플레이어 랭킹을 비활성화할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쨌든,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진심으로 고맙구만.

속으로 심심한 감사를 표하기도 잠깐.

조슈아가 AAU 측의 결론을 내놓았다.

“옥시딘, 그는 아르카나인이 확실하다는 게 저희 AAU의 결론입니다. 또 다른 증거가 있다면 긴급 업데이트 내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옥시딘의 이름이겠지요.”

AAU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물론, 나도 그 생각에 동감이다.

말했듯 나는 옥시딘이 어떤 인물인지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추측이 옳다.”

이번에도 단도직입, 곧바로 정답을 제시했다.

“옥시딘, 그는 플레이어의 클래스를 강탈한 아르카나인이다.”

“?!!”

어떻게 클래스를 강탈할 수 있느냐는 듯한 표정들이군.

나도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강탈한 클래스는 군주.”

“……군주라면, 설마?”

남철민, 그리고 성전 연합군 측에서 들려오는 음성.

“그렇다. 그는 류오쥔춘의 왕관을 강탈했다.”

그제야 AAU는 의문이 완전히 풀린 모양이었다.

“……대괴수의 ‘군주’! 이제 보니까 처음부터 그 정체가 명시되어 있었어요. 우리 아르카나 대륙 전기에서 군주라는 수식어는 이유 없이 따라붙지 않지 않습니까?”

이윽고, 강단 위의 나를 향해서.

어떻게 그런 사실까지 알고 있는 거냐는 듯한 시선이 쏟아진다.

부담스러운 시선에도 철면피는 한결같은 표정을 짓고 있겠다만.

나, 이호열은 그럴 수 없었다.

‘옥시딘, 1,280레벨이라.’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흑암룡, 천외천, 십좌의 주인, 기이의 대종사, 흑막의 구원자]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1,061]

[능력치]

근력 : 230 / 민첩 : 236 / 마력 : 960 / 행운 : 16 / 심미 : 上 / 집념 : 25 / 매력 : 有

[보유 포인트 : 10]

‘누구’처럼 레벨이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레벨이 전부가 아니라는 건 경험을 통해서 학습한 나였다.

그러나.

‘옥시딘, 그가 기이의 영역에 진입했다면?’

초월자, 옥시딘은 엄연히 아르카나인이었다.

그러나 류오쥔춘의 클래스를 강탈하게 되면서 플레이어 랭킹에도 그 이름이 떠오르게 된 지금. 옥시딘은 기이의 영역에 진입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솔직히 견적이 나오지 않아.’

플레이어가 아르카나 대륙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이유?

모든 게 [시스템] 덕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레이먼 션조차도 간섭할 수 없는 시스템이 상태창, 퀘스트, 갖가지 경고 메시지를 통해 플레이어를 성장시켰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다들 우려하고 있는 거겠지.

당연한 말이지만.

사정을 전부 알고 있는 나도 우려가 된다.

‘흑막이었던 그림자 신을 대신하기 위한 긴급 업데이트.’

그렇다면 옥시딘이야말로 아르카나 대륙의 새로운 흑막.

플레이어 전부가 달려들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적과 같단 뜻이었으니까.

‘……정말이지.’

넌 어떻게 죽어서까지 나를 괴롭히는 거냐, 류오쥔춘?

그런 의미에서 이번만큼은 그랑펠.

네게 감사 치레라도 받아야겠다.

‘혼자였으면 분명, 몸이 고생했을걸.’

대괴수의 군주로 거듭났다고 했겠다. 대괴수를 몇 마리나 이끌고 올지는 몰라도, 이쪽에도 대괴수라 불려도 무방한 괴물급 전력이 많아서 말이야.

탑주, 마르셀로를 필두로 한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

기이의 영역에 진입을 앞둔 플레이어들.

그리고 아르카나 대륙에 있는 거물들까지.

그러니까 나는 입방정이 아닌.

나의 입으로.

당당하게 내뱉을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거라.”

그랑펠도 마찬가지란 게 문제였지만.

“만물의 왕이 친히 그리로 가겠다.”

드래곤이야말로 만물의 왕이요.

내가 바로 흑암룡이로소이다.

이번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쏟아지는 이 시선들을 봐라, 그랑펠.

제발……!!

때와 장소를 좀 가리고 말하자고 우리……!!

*

전(前)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

온순한 거인은 아르카나 대륙을 떠돌았다. 그녀의 대지 마법이야말로 쑥대밭이 된 아르카나 대륙에 가장 필요한 마법 중 하나였으니까.

“흐음.”

폐허가 된 마을을 수습했지만.

이번에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그위드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호열의 반전 마법을 떠올렸다.

고오오.

그러나 탐색 과정에서 실패.

“역시 늙은이의 굳어버린 머리로는 무리려나.”

발현 과정을 역순으로 계산해 재발현이라니. 이 수석은 이런 말도 안 되는 마법을 어떻게 그리 쉽게 발현할 수 있는 건지. 새삼스럽게 마르셀로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내가 탑주 자리에 앉지 않아 다행이군요.”

나라면 틀림없이 이 수석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을 테니까요, 마르셀로. 당연한 말이지만, 이미 폐허가 된 마을 인근에 인기척은 없었다.

“부디 안식을 찾길.”

그럼에도 유그위드는 폐허를 수습하고, 훤히 드러난 희생자들의 시신을 흙으로 덮어주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이젠 원로 마법사도 아니니, 한 명의 대지 마법사로서 그럴싸하게 대답해 볼까.

“지금은 땅을 고르는 시기니까.”

언젠가 자신이 고른 땅에서 다시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번성의 꽃이 피게 될 날이 오게 될 테니까. 늙은 마법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묵묵히 땅을 골라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그래요? 그런 소식을 들었단 말이죠?”

유그위드는 우연하게 마주한 대지의 정령과 대화를 나눴다.

자연 상태의 정령은 아니요.

계약 정령, 정확하게는 마탑 마법사와 계약을 맺은 정령이었다.

유그위드의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글쎄요.”

중위 대지의 정령, 클레이.

소식에 밝은 정령이 전해온 건 그림자 용병단에 관한 소문이었다. 그림자 용병단이 해산하고, 아르카나 대륙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은 아르카나 대륙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의 대사건이었으니까.

유그위드는 그림자 회랑이 자취를 감춘 하늘을 바라봤다.

“마주하기 전까진 확신할 수 없겠죠.”

그림자 용병단과의 악연을 청산하지 못한 유그위드였다.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말하던 순간이었다.

……쿵.

문득, 거대한 진동이 대지를 울렸다.

더군다나 진동이 전해져 온 건 불과 하루 전.

자신이 수습했던 작은 마을 방향이었다.

고오오.

순식간에 텔레포트한 유그위드가 진동의 근원과 마주했다.

그건 거대한 ‘무언가’였다.

한눈에는 담기조차 힘들 정도로 비대한 대괴수였다.

쿵……!

뭉툭한 발이 유그위드가 바닥까지 긁어낸 미적감각으로.

힘겹게 복구한 마을을 완전히 짓밟았다.

그 순간, 온순한 거인이 잠에서 깨어났다.

폐허가 된 고향.

그림자 용병단의 갱생 소식.

그렇지 않아도 혼란한 유그위드의 내면에 지진을 일으켰다.

“누군지는 몰라도, 상대를 잘못 골랐군.”

발산하는 마력과 동시에 주문이 읊조려졌다.

“일어나라, 성난 대지여.”

*

마탑.

정령학파의 연구실.

대식가, 페이얀이 우물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던 그곳에.

“페, 페이얀 선임님!”

정령학파 숙련 마법사들이 들이닥쳤다.

기이의 공간, 균열에서 계약 정령을 소환.

그 과정에서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을 접한 탓이었다.

그들에게서 소식을 전달받은 페이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모두들 알겠습니다.”

이윽고, 그녀가 양피지에 깃털펜을 휘갈겼다.

스스슥.

그녀의 필적은 한 줄로 끝나지 않았다.

──────

아르카나 대륙에 대괴수 출현.

현재 파악된 대괴수의 숫자는 대략 10여 마리.

오크 옥션의 오크 전사 다수가 대괴수와의 전투에서 사망.

대현자, 라이즈 대괴수와의 전투로 중상.

──────

잘근, 페이얀이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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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 뤼펭 대괴수와 전투 도중 생사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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