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1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군
그림자 회랑.
사연을 알고 보니까 시커먼 외관이 어째 쓸쓸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랑펠 님의 심미안에 사적인 감정은 반영되지 않았으니.
[그림자 회랑이 그림자 속으로 파묻힙니다.]
나는 흩어져가는 그림자 회랑을 보며 읊조렸다.
“비로소 청명한 하늘이군.”
넵, 아주 객관적이십니다.
그랑펠다운 클리어 소감을 뒤로한 채.
마지막 말을 떠올려본다.
그림자 신과의 대화에서 나.
이호열은 순수하게 나의 의지로 물었다.
그래서 그 ‘카르마’라는 걸 대체 어떻게 써먹는 건지!
왜, 내가 보유하고 있던 카르마는 현상금과 같은 일천(一千) 카르마였다. 거기에 만신전 어귀에서 프로토타입, 흉조를 사냥하고 습득한 현상금도 간과할 수 없겠지.
[현재 보유 중인 카르마 : 1,171]
전부 때려잡았는데, 고작 171 카르마 상승이라.
내가 보유한 카르마가 얼마나 무지막지한 금액인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더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고.’
그림자 신은 내 질문에 답했다.
-“카르마는 업(業)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동안 내가 걸어온 행보가 카르마로 측정되었단 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워낙 많은 일을 했어야지, 내가.’
제국을 구원하는 것도 모자라서 아르카나 대륙을 구원하고 만물의 어머니, 세계수를 새롭게 싹 틔웠다. 그뿐이냐? 거악 칠죄종과 마왕, 상위 마왕을 사냥하고…….
‘방금 전엔 흑막까지 구원했잖아?’
[흑막의 구원자 : 흑막을 구원한 그대에겐 언제든 흑막과 접선할 권한이 있다. 효과 발동 시 히든피스, ‘그림자 회랑’과 ‘만신전 어귀’에 진입 가능.]
다만, 그럼에도 의문인 건.
내 모든 업적의 총합이 과연.
일천 카르마에 합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림자 신도 그에 관해선 확신하지 못했다.
-“말했듯 나는, 그리고 만신전의 신들은 아르카나 대륙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신들을 인도한 건 신도의 기도였고, 나를 인도한 건 계약자들의 눈과 귀였으니까.”
자신들을 우물 속 개구리라 비유한 데엔 이유가 있었거든.
역시나 설정 때문이었단 거지. 그림자 신만 해도 계약을 통해 계약자를 죽어도 죽지 못하게 할 수 있는데, 그림자 신보다 전능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신들일 터.
‘그들이 아르카나 대륙에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막아둔 거다.’
과거, 마탑이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던 이유와 같겠지.
뭐,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충 넘어갈 여지야 충분했다.
[카르마 : 만신전에서 통용되는 화폐]
카르마라는 화폐가 삭막한 그림자 회랑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만신전에서도 통용되는 모양이었으니까. 진심으로 여러모로 다행이다.
그랑펠 성격에 그림자 회랑에서 소비 활동?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아까운 카르마를 쓰지도 못하고 썩힐까 봐 걱정했거든. 그래도 만신전이라면 언젠가 어떻게든 쓸 기회가 오지 않을까, 싶었다.
-“신들은 카르마를 통해 만신전의 보고에 잠든 전능한 효과를 가진 성유물을 일깨워 사용하곤 했다. 카르마엔 그 정도의 힘이 깃들어 있으니.”
그것도 아주 유용하게.
물론, 모든 건 만신전의 업데이트가 끝났을 때의 이야기였다.
레이먼 션, 그 자식이 어떤 꿍꿍이속인지는 알 수 없다만.
‘당장으로선 접근할 수 없어.’
다만, 레이먼 션조차도 시스템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는 바. 그렇다면 녀석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언젠가는 만신전의 업데이트가 끝나고 문이 열린다는 뜻이었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내뱉었다.
“무의미하게 귀중한 시간을 지연시킨 죄.”
그러고는 포탈을 발현했다.
“그 또한 처분에 반영하겠다.”
포탈의 목표 좌표는 성전 연합군이 있을 베히모스의 아가리였다.
파이몬이 마계로 돌아가고, 기껏해야 임프들만 날뛰고 있을 테니까.
사실 성전 연합군의 안위가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래, 순수하게 걱정되는 건 오직 하나.
‘……그래서 전설 말고는 뭐 안 떴겠지?”
내가 그림자 회랑에 머무는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월드 메시지가 출력되었는지. 혹시라도 그 메시지에 내 빌어먹을 풀네임이 떠올랐는지, 떠오르지 않았는지.
오직 그것뿐이었으니까……!
*
“!”
키치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울프는 피부에 느껴지는 열감에 움찔거렸다. 몸을 휘감고 있던 『그림자 신의 낙인』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키치 곁을 지키던 전 그림자 용병단원들.
“괜찮은 겐가, 울프?”
“너, 낙인이 지워지고 있잖아?”
“잠깐만 키치 단장……? 뭐야, 언제 일어난 거야?!”
클라우디령 별채에 작은 소란이 일어나기도 잠깐.
“……봤어.”
키치가 입을 열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조용해진 덕분일까.
키치는 그림자로서 목격한 흐릿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림자 회랑에서 총대장님을 봤어.”
“……총대장님께서 그림자 회랑에?”
“잠깐, 회랑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
나도 못 가본 그림자 회랑에 어떻게 간 거야?
락키드가 쓸데없는 곳에서 질투심을 느끼기도 잠깐.
키치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 그림자가 총대장님께 달려들었다는 거야. 아니, 나뿐만이 아니었지.”
키치가 호열에게 달려들었다.
“…….”
그 소리에 놀라는 단원은 없었다. 수많은 의뢰를 수행하며 숱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덕분에 모두가 한 번쯤은 키치의 그림자를 목격했었으니까.
그러니 의문은 다른 쪽으로 향할 수밖에.
“그래서 총대장님은 무사하신 거지……?”
다른 누구도 아닌 울프가 물었다.
호열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울프였다.
그럼에도 안위를 물은 이유?
역시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림자 신의 총애를 받는 계약자, 그림자.
그림자 회랑에 출입했다는 것만으로 차원이 다른 강자라는 뜻.
심지어 그림자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쓰러트릴 수도 없다는 걸.
키치가 답했다.
“……글쎄.”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도 사교장에서의 장면이 끝이었다.
그마저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어서 목격했다고.
키치는 쉽사리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뭔가 이상할 정도로 긴 이름…….’
이호열.
총대장님께서는 세간에 익히 알려진 이름이 아닌 클라우디의 이름을 내뱉고, 그것도 모자라 웬 고래에 올라타서는 회랑의 상층으로 날아가셨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확인이 필요했다.
“울프, 낙인은?”
“잠깐……. 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회랑에서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락키드가 인상을 쓰며 머리를 굴리던 순간.
알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상황을 정리했다.
“혹 그림자 신과의 계약에 변화가 생긴 거라면.”
키치는 말을 아꼈다.
덮고 있던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창가로 나아갔다.
바람에 고풍스럽게 하늘거리는 커튼을 걷었다.
쏴아아.
“…….”
그러자 햇빛이 내려앉았다. 햇빛 아래에서 서서히 드러났다. 키치의 뒷모습 뒤로 늘어진 그림자. 락키드를 시작으로 모두가 놀라서 소리쳤다.
“그림자가 돌아왔잖아, 키치!”
……역시.
키치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이번에도.
당신께서 해내신 거라고.
벌써 몇 번째지, 이래서야 갚을 수나 있긴 한 걸까, 고작 내 목숨을 바친다고 수지타산이 맞을까, 찰나의 순간, 고뇌를 끝마친 키치가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자.”
그 말에 모두가 되물었다.
“갑자기 뭘 말이야. 설마, 새로운 계획이라도 세운 거야?”
화색이 도는 표정들.
다들 심심했던 모양이네.
키치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긴 뭐야, 악크샨식 체력 단련이지.”
“……아.”
*
AAU 각 지부에도 소식이 전해져 왔다.
성현준과 윤수겸.
둘은 박민재가 건넨 서류를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유스라 총책임자 님께서. 이호열 플레이어께서 그림자 신과 담판을 짓고 돌아오셨단 말씀이시죠? 아니, 제가 지금 제대로 이해한 거 맞죠?!”
박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르카나 쪽 플레이어들을 통해 교차 확인했어.”
아르카나 대륙에 출력된 월드 메시지.
[그림자 회랑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음지가 배후를 상실했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치안이 대폭 상승합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범죄 발생이 대폭 감소합니다.]…….
성현준이 중얼거렸다.
“정말인가 본데요, 선배……?”
그야말로 경악할 수밖에 없는 성과.
누군가는 묻겠지.
박민재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언론에서의 반응은 평소와 다를바 없어. 그냥 이번에도 이호열이 이호열했다라는 반응이지.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아니겠어? 그렇지 않냐?”
“말씀이 전부 사실이라면…….”
윤수겸의 안경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총책임자님께서 증명하신 게 한두 개가 아니란 말씀이신 거잖아요? 아르카나 대륙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부터. 그 신들과 만날 수 있다는 거. 그리고 그런 신을 처치하신 거라면…….”
“아니, 한 가지가 틀렸어.”
“네?”
“그림자 신을 처치하신 게 아니야.”
박민재는 호열의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음지가 양지가 된 것뿐이지.”
“??”
그렇다, 그대로 전달하는 그랑펠식 화법이었다.
“음지가 양지……?”
성현준과 윤수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박민재는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었다. 박민재도 그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한 참이었으니까.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래서 너희는 어느 쪽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냐?”
“네?”
“신을 처치하는 쪽과 갱생시키는 쪽.”
그림자 신은 아르카나 대륙 전기 스토리의 흑막이었다. 지금껏 봐왔던 대격변의 규칙대로라면, 어떤 식으로든 플레이어들의 발목을 붙잡았어야 하는 존재였다.
질문의 뜻을 알아들은 성현준이 입을 열었다.
“당연히 갱생시키는 쪽이 더 어렵고 대단하죠!”
“좋은 대답이야. 드디어 신입 티 좀 벗었는데, 성현준이?”
“박 지부장님. 제가 십 년 넘게 막내라고는 해도, 이제 근무한지 십 년이 넘었는데. 드디어 신입 티를 벗었다고 하시는 건 너무 가혹한 말씀이 아니신지……?”
그러나 성현준의 투정을 받아줄 새는 없었다.
가짜에 불과했지만, 어쨌거나 레이먼 션과 독대해 본 박민재가 아니었던가? 덕분에 레이먼 션의 속내가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갔으니까.
“내가 가혹하다고? 진짜 가혹한 건 이제부터 시작인데? 당분간은 계속 야근이야. 이유는 짐작되지? 자기 계획이 망가졌는데. 레이먼 션, 그 자식이 가만히 있으리란 법이 없거든.”
당연한 말이지만, 반발은 보통이 아니었다.
“당분간 계속 야근이라니.”
“아니, 지난주도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진짜 내가 미쳤다고 코스모에 발을 들여서 이 나이에……!!”
악크샨 못지않은 AAU의 고된 일과.
그러나 악크샨이 토를 달 수 없듯.
AAU의 직원들도 토를 달 수 없었다.
박민재가 말을 덧붙였다.
“유스라 총책임자님이 그렇게 당부하셨는데?”
“……아.”
스륵.
이호열.
그 이름 석자에 벌떡 일어났던 직원들조차 얌전히 착석한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기약 없던 야근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롭게 갱신되는 아르카나 대륙 전기 공식 홈페이지.
“떠, 떴다!!”
예상대로 긴급 업데이트가 떠올랐으니까.
그 내역을 AAU 대한민국 지부 전원은 관제실 모니터로 동시에 확인했다. 업데이트 내역을 정독한 박민재. 그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다들, 오늘은 이만 퇴근해.”
“……!!!”
그 말에 흠칫하는 몇몇 직원들.
그러나 기뻐하는 게 아니라 흠칫이었다.
그래, 업데이트 내역을 함께 확인했기에.
이어지는 박민재의 뒷말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다들 짐부터 챙겨 와. 내일부터 숙직 시작이니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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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곁으로 새로운 이벤트가 찾아옵니다.
신규 대형 이벤트, ‘대괴수의 군주’가 시작됩니다.
신규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
대괴수 : LV.1,000 이상의 신규 몬스터
대괴수의 군주 : 초월자 옥시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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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성현준이 멈칫했다.
잠깐만…….
뭔가 이상했다.
성현준이 가방을 챙기던 윤수겸의 옆구리를 찔렀다.
“서, 선배? 저기, 저기! 플레이어 랭킹에 이상한 이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