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70화 (470/489)

◈ 470화. 위하여

[메인 퀘스트 : 흑막 너머의 진실]

바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한 신격인가, 가혹한 진실인가.

신이기를 포기한 자의 눈에 비로소 빛이 비추리라.

-그림자 신을 만신전으로 인도하라. (진행 중)

역시.

‘애초에 말이 안 됐지.’

퀘스트 목표를 보아하니.

어째 만신전은 내가 진입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닌 듯했다.

방금도 그럴싸하게 내뱉었잖냐.

‘난 무교라니까?’

신 따윈 믿지 않는다고, 거창하게.

애초에 신을 믿지 않는데.

신들이 머무는 만신전에 발을 들일 수나 있겠냐고.

‘들어갈 수 있어도 불경하다고 쫓겨날걸?’

나는 무릎을 꿇은 그림자 신을 바라봤다.

“아아…….”

가상 현실 게임이었던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신(神). 그 이름의 무게감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안색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피폐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는 느낌이랄까.

우우우.

고래의 울음이 들려온다.

이윽고, 집어삼켰던 모든 걸 토해내고는.

산화하기 시작하는 ‘신을 삼킨 흉조’.

덩치만큼이나 먼지로 흩어지는 것도 요란하군.

흐트러지는 옷매무새를 반사적으로 가다듬는 나의 손길.

나는 건조하게 말했다.

“퇴장조차도 품격이 없구나.”

매정하게도 만신전의 어귀로 옮겨가는 시선.

‘그래도 슬슬 그럴싸해져 가는데?’

흉조는 집어삼켰던 만신전 어귀의 풍경을 모조리 뱉어냈다. 과연, 신들이 머무는 장소라고 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아니.

‘그럴싸한 수준을 넘어서 눈이 돌아가는데……?’

어쩌면 신은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의 종교관이 흔들릴 정도로 보통이 아니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효과 덕분.

머릿속 모든 광물과 식물에 관한 지식이 말해주고 있었다. 어디 만신전의 보물창고도 아니고, 그저 어귀에 불과한 공간에서 널린 광물과 식물의 희귀도가 미쳐 날뛰고 있다고!

그중에서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있던 거였어?’

무한한 활력.

넘치는 괴력.

요동치는 마력…….

허무맹랑할 정도의 효과 때문.

말 그대로 전설이라고만 여겼던 영약들이 진짜 눈앞에 있었다. 더군다나 히든피스, 품격의 화원의 주인이자 비약초의 육성법을 통해 영약을 재배한 경험이 있는 내가 아니던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생선 가게 앞을 지나치는 고양이의 심정을 저절로 이해하게 되는 기분.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건 물욕을 해탈하지 못한 나, 이호열의 감상이었을 뿐.

“비로소 기본을 갖췄군.”

여전히 평가가 박하구나, 그랑펠.

짧게 감상평을 내뱉고는 그림자 신을 바라본다.

그나저나 이놈의 주둥이.

그랑펠식 화법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그럼에도 나의 화원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넌, 이런 상황에서도 잘난 척이 하고 싶니?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으리으리한 유스라의 황금 궁전 아니겠냐. 게다가 만신전에 수호 신수, 페가수스가 있다면 품격의 화원엔 수호 엘프, 엘시도어가 있으니까.

‘하여튼 한 마디도 지려고 하질 않아.’

그나마 다행인 건 그림자 신에게 내 입방정을 신경 쓸 여유는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왜, 그는 돌아온 만신전의 모습을 눈에 담기에도 바빠 보였으니까.

‘조금은 감격할 시간을 줘야겠지.’

이후에 듣게 될 이야기는 꽤나 충격적일 터.

보자,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이해하기가 쉬우려나?

평범한 아르카나인에게 설명하는 것보다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화법으로는 이해시킬 자신이 없는데.’

백 번 듣는 것보다다 한 번 보는 게 낫다고.

그냥 포탈을 열어서 현실을 보여줄까.

현실을 이해하면.

흉조와 레이먼 션의 관계를 보다 쉽게 이해하지 않을까.

내가 고심하던 순간이었다.

“난 모든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벌써 정신을 차린 건가.

그림자 신이 꿇었던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쪽도 머뭇거릴 이유가 없겠지.

나는 일찌감치 경고했다.

“이제부터 그대가 아는 세계는 무너질 것이다.”

“각오하던 바다.”

그림자 신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아니, 어쩌면 그저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겠지. 어차피 우린 우물 속 신에 불과했다. 우물 밖 세상은 제대로 바라볼 수조차 없는…….”

우물 밖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라.

‘역시, 뭔가 사연이 있군.’

아무래도 만신전과 신들에 관해서는 자세한 사연을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은 그림자 신에게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그리고 모든 사태의 원흉인 레이먼 션을 이해시키기도 바쁘다.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나.’

아르카나 대륙 전기.

대격변.

레이먼 션의 업데이트.

어떤 순서로 이야기를 풀어야 그림자 신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호열의 얄팍한 사회 경험으로 떠올려본다. 원래 이야기에 앞서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우선인데…….

‘그래야 서로 뭘 알고 모르는지 알 수 있으니까.’

생각하는 와중에 나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림자의 우두머리여, 그대는 알고 있는가.”

……잠깐, 아무리 공감대가 중요해도 그렇지.

“위대한 클라우디를.”

나와 그림자 신.

마찬가지로 설정에 휘둘렸다는 공감대가 있다고 해도.

그 흑역사부터 이해시킬 필요는 없거든?!

*

죽어도 죽을 수 없는 그림자 신과의 계약이다.

덕분에 부러졌던 척추와 뼈가 회복되고 있었다.

숨조차 내뱉을 수 없었거늘.

이젠 공기 반, 소리 반이지만 목소리가 나온다.

“……놀랍군.”

힘겹게 뜬 눈으로 가브리엘은 호열을 바라봤다. 이 순간, 펼쳐졌던 장면을 몇 번이고 회상해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게 진정으로 내가 알고 있던 악마 사냥꾼이 맞단 말인가? 악크샨에 저런 화려한 검술을, 그리고 비범한 마력을 갖춘 이가 발을 들일 이유는 없었을 텐데…….

그러나.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흐른 건지는 몰라도…….”

이젠 더 이상 악크샨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가브리엘은 달라진 풍경과 공기를 느꼈다.

“그대가 구해냈군.”

그는 악마에게 빙의된 게 아닌, 스스로의 악의에 잠식된 그림자 신을 구원했다. 악크샨처럼 외면한 것도 아니요, 자신처럼 사냥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구마의식이었다.

주책맞게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보이는가? 나도, 그대들도 틀렸군.”

가브리엘은 시선을 옮겨 곁을 지키는 하이엘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물었다.

순수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대는 어째서 명령을 따르는 거지?”

분명, 나의 만행을 지켜보고 있었을 터.

“나는 그대의 주군을 밀쳐서 낙오시킨 전력이 있는 글러 먹은 인간이네만. 어디 그뿐인가? 악크샨의 인연을 내세우기 이전에 나는 악크샨에서 파문된 악마 사냥꾼이다.”

하이엘은 한결같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께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고귀한 시선에 깃든 흔들리지 않는 신뢰.

무엇을 말하는 걸까.

가브리엘이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무엇을 말하는 거지?”

“당신께선 자신이 주군을 밀쳐서 떨어트렸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당신의 행동이 진정으로 주군을 추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건지, 묻고 있는 겁니다.”

“……!”

가브리엘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런가, 이거 내가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군.”

신을 삼킨 흉조를, 만신전 어귀의 프로토타입을 가볍게 사냥하던 호열의 모습에서 차원이 다른 강함을 목격했다.

앞서 말했듯 그건 악마 사냥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그렇다면 설령 아득한 상공에서 추락했다고 한들.

‘……추락을 멈추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멈췄겠지.’

굳이 마탑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됐다.

웬만큼 이름을 날리는 마법사들이라면.

공중부양 정도는 얼마든지 발현할 수 있었으니까.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 거야.”

하이엘이 곱씹던 가브리엘에게 덧붙였다.

“주군께선 그저 당신을 신뢰하고 싶어 하셨던 거겠지요.”

“……!”

호열의 분신과도 같기에.

하이엘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주군이 어떤 존재인지를.

가브리엘이 답했다.

“그가 나를 믿고 싶어 했다라. 그렇지 않아도 후회하던 찰나에 죄책감이 더욱 심해지는군, 그래? 무엇보다 내가 그 믿음에 보답했는지 모르겠는데…….”

중층 결계, 『그림자를 비추지 않는 거울』.

가브리엘은 호열을 바라봤다.

그는 거울 너머에서 무엇을 목격했을까.

그러고는 작게 읊조렸다.

“역시, 그대의 주군‘들’은 복잡하군.”

하이엘이 그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주군‘들’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브리엘은 여전히 호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주시는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 또한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림자를 비추지 않는 거울』을.

덕분에 가브리엘은 짐작할 수 있었다.

호열이 제대로 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중층 결계를 간파했다는 걸.

그야 옷매무새가 지나치게 깔끔하지 않은가? 자신을 비롯한 귀빈들이 중층 결계에서 겪었던 꼴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호열의 경우엔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역시나 답은 하나뿐.

‘거울 속 ‘그대’가 자비를 베풀었군, 그래.’

가브리엘이 하이엘에게 답했다.

“아무것도 아닐세. 죽을 때가 돼서 그런가, 말이 헛나왔군.”

그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보이는가.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네, 악크샨.”

정말이지, 믿지 못할 풍경의 연속이었다.

가브리엘은 만신전 어귀에서 솟아난 나무들을 바라봤다.

어느새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날을 보기 위해 죽지 못했던 거라면…….”

그래도 억울함을 풀고 눈을 감을 수 있겠군.

가브리엘이 생각하던 그때였다.

별안간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가브리엘은 진심으로 말했다.

“자네는 기척만으로 간 떨어지게 하는 재주가 있어.”

농담이었는데, 더없이 진지한 대답이 돌아온다.

“익히 알고 있다.”

“……?”

차림새도, 능력도,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거늘.

이렇게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가브리엘이 피식 웃었다.

“그 역시, 악크샨이군.”

이내, 쓰러졌던 그의 몸이 허공으로 흩어져가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은 직감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림자 신과의 계약이 파기되었노라고.

호열이 읊조렸다.

“이 시간부로 그림자 신이 맺었던 모든 계약은 파기되었다. 그대를 포함한 귀빈, 그림자 회랑의 고용인, 모두의 그림자가 자신의 주인을 찾아갈 것이다.”

“그렇군.”

“유언을 남겨라, 가브리엘.”

그 말에 가브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하이엘을 바라봤다.

이런, 나처럼 형편없는 놈의 유언을 들어주겠단 건가.

정말이지.

‘자비롭기 짝이 없는 주군들이시군.’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파문되었지만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이었던 자로서 우선 그대에게 사죄를 구하지. 나는 그저 그대가 스스로를 돌아보기를 원했네. 그러나…….”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있을 그대들일 터.

그런 그대들이 아직.

서로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줄이야.

“나는 주제넘은 행동이었음을 깨달았네.”

가브리엘은 차오르는 말을 삼켰다.

“사실 그대에겐 묻고 싶은 게 많군. 말했다시피 나의 육신은 이미 땅에 파묻혀 백골이 되었으니. 악크샨은 여전한지, 거악과 마왕이 설치지는 않는지, 여러모로 궁금하군. 그러나 묻지도 듣지도 않겠네.”

호열과 눈을 맞췄다.

“그대도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악크샨에서도 파문된 글러먹은 악마 사냥꾼이라는 걸. 그러니 나는 나답게, 그대에게도 글러먹은 유언을 남기겠네.”

정확하게는 ‘그들’을 향해서 말했다.

“만약, 감당하기 벅찬 시련에 직면했다면 그대들은 아르카나 대륙 동부 어딘가에 묻혀있을 나의 시신을 찾게. 그리고 품속에서 나의 유물을 회수하도록. 그것이…….”

그대들에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테니까.

가브리엘의 그림자는 짧은 유언을 남긴 채.

서서히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런 가브리엘에게 호열은 말했다.

“내가 감당하기 벅찬 시련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그러기냐며.

누군가가 탄식을 내뱉었을 입방정도 잠깐.

더없이 진중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악크샨을 위했던 그대를 위해.”

“……?”

“내가, 악크샨이 그대의 최후를 지켜보겠다.”

악마 사냥꾼답지 않게.

환하게 웃는 가브리엘의 얼굴이.

이윽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거 고맙군.”

.

.

.

그래, 다 좋은데 말이야.

[클래스 퀘스트, ‘그럼에도 악크샨을 위하여’를 성공하셨습니다.]

[클래스 퀘스트, ‘가브리엘의 무덤’이 시작됩니다.]

[아르카나 대륙에 전설, ‘만신조차 모독하는 존재’가 울려 퍼집니다.]

울려 퍼지는 전설은 왜 또 이 모양인데, 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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