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9화. 신이라고 하기엔 (2)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그림자 신은 잊을 수 없었다.
흉조가 만신전에 출현한 그 어느 날을.
아름다운 절경도, 고고한 신수도, 드높은 신전도 구분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걸 집어삼켰다.
감히 저항할 수 없었다.
거스를 수 없는 본능과도 같았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만신전 어귀를 집어삼킨 것도 모자라서.
만신전 내부로 진입하는 그것들의 모습을.
-어째서……?
의문에 휩싸이기도 잠깐.
경직에서 벗어난 그림자 신은 만신전을 향해 달려갔다.
굳게 닫힌 만신전의 문을 두들겼다.
쿵쿵!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진정한 신격으로 거듭나지 못했기에.
원래도 진입할 수 없는 만신전이었다.
조금도 달라진 건 없다고 믿어야 했거늘.
두둥실.
만신전 어귀를 떠다니는 그것들.
공허한 풍경은 무엇보다 큰 변화였다.
그림자 신은 문득, 떠올렸다.
만신전 내부로 헤엄쳐 간 그것들은.
어귀를 떠다니는 놈들과는 차원이 달리할 정도로 거대했단 걸.
불길한 직감은 어긋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만신전의 어떠한 신도 아르카나 대륙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대륙엔 불신이 팽배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넘쳐흘렀다. 그런 변화는 악마에게 큰 힘이 되었다.
-신격을 갖추지 못한 내가 그들을 대신할 수 있는가.
그림자 신은 스스로를 의심하면서도 기도에 응답했다.
허나, 가장 비열한 신에게 갈구하는 자들의 목적은 불순하기 짝이 없었다. 아르카나 대륙의 혼란은 더욱 심해졌고, 그림자 신은 자책했다.
-모든 게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나?
그렇게 시작된 자책은 끝나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신격을 갖췄다면.
그래서 만신전에 진입할 수 있었다면.
그것들을 막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만신전에 진입하기 위해선 신격을 갖춰야 한다.
신격을 위해서.
아르카나 대륙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그림자 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더욱 많은 이들의 비열한 소원을 들어줬다.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이냐?
그럼에도 만신전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림자 신의 눈에 피폐가 깃든 건 그때부터였다.
그는 무정한 시선으로 대륙을 관조했다.
-너희에겐 목적이 있구나.
온전한 신격을 갖추진 못했지만, 신의 그릇으로 태어났기에.
그림자 신은 넓은 시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덕분에 그것들의 목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너희는…….
그리고 깨달았다.
만신전의 그것과 아르카나 대륙의 그것.
그것들에게는 단 한 가지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모험가들을 위해서 먹어치웠구나.
그것들은 모험가의 성장에 방해되는 적대 세력들을 집어삼켰다.
모험가의 수준에서는 절대 쓰러트릴 수 없는 괴수들을 집어삼켰다.
그러한 관점에서 만약.
-만신전이 온전히 존재했다면…….
난세에 출현하는 영웅이다.
평화로운 아르카나 대륙에 영웅은 출현할 수 없었을 터.
모험가들은 지금처럼 가파르게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째서냐.
그것에서 모험가로.
증오의 대상이 바뀐 건 그때부터였다.
모험가.
-네 녀석들이 대체 무엇이길래.
만신전의 신들조차 저항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에게 총애를 받는단 말이냐? 그림자 신이 증오를 불사르는 와중에도 모험가들은 계속해서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결국, 신격에 도달했다.
은빛 머리칼의 모험가. 한낱 인간에 불과했던 모험가는 마계의 십좌를 사냥하고, 그의 신격을 거머쥐고야 말았다. 그림자 신은 확신할 수 있었다.
-너희는 그것의 편애를 받고 있다.
결론을 내렸다.
만신전이야말로 오직 저들을 위해 희생된 것이라고.
그림자 신은 차오르는 증오를 억누르고 초대장을 적어나갔다.
-누구보다 네놈은 진실을 알 필요가 있다.
모험가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건.
누구보다 많은 총애를 받았다는 뜻일 테니까.
그림자 신은 그의 그림자를 강탈할 생각이었다.
-총애를 받는 너라면 열 수 있지 않겠느냐.
굳게 닫힌 만신전의 문을.
과연,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반신으로서 업을 쌓아온 자신보다 월등한 카르마.
그 카르마를 제외하더라도 은빛 머리칼의 사내 앞에 회랑의 그것은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했다. 자신의 등을 내어주었다. 물론, 예상치 못한 상황도 있었다.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거늘.
계약자 중 하나가 사내를 그것 위에서 밀쳐 떨어트려 버렸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신격을 갖춘 사내는 반드시 자신을 찾아올 테니까.
-기다리는 동안 어울려 주겠다.
그것이 그림자 신이 가브리엘을 적당히 상대한 이유였다.
그리고 머지않아서.
그림자 신은 증오하는 만큼 기다려오던 모험가.
은발의 사내와 마주했다.
그리고 목격했다.
“다시 묻겠다. 그 망상은 여전히 유효한가.”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듯.
단호하게 만신전을 부유하던 그것.
프로토타입을 모조리 터트려 버리는 호열을.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아르카나 대륙의 흑막.
플레이어를 증오할 수밖에 없는.
그림자 신의 설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쉽게 말하자면 밸런스를 위해서다.
‘직접 목격했었잖아?’
목격만 했냐, 직접 해결도 했다.
내가 이래 봬도 마탑의 수석 마법사잖냐?
너무나도 강대했기에.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최근까지.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던 마탑을 보면서 깨달았다는 거지.
‘남겨진 설정은 어떤 식으로든 실현된다고.’
나는 그쯤에서 생각했다.
『아르카나 대륙 최악의 흑막』
어쩌면 그림자 신에겐 단 한 줄의 설정만 주어졌을지도 모른다. AAU 지부장들 말을 들어봐도 대략적인 콘셉트가 존재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보다 구체적인 정보는…….
-“오직 CEO였던 레이먼 션만이 답을 알고 있을 겁니다.”
지부장들이래도 알 수 없던 모양이었거든.
하지만 설정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걸 마탑의 진리를 바로 세우며 깨닫게 나였다. 그러니까 나는 일루젼 브레이커를 휘둘렀다.
그러면서 물었다.
“그대는 확신하는가.”
적정 레벨 2~3천에 육박하는 그림자 회랑.
출현하는 프로토타입의 레벨도 상당한 게 당연하다. 내가 선공하는 순간, 반격을 해오는 녀석들. 거기엔 사교장에서 굴복시켰던 고래처럼 생긴 프로토타입도 포함이었다.
[프로토타입, ‘신을 삼킨 흉조’가 폭주합니다.]
“……!”
나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던 그림자 신.
그가 흉조 앞에서 멈춰버렸다.
그 역시도 이미 알고 있는 반응이다.
왜, 흉조에 삼켜졌던 세력들을 통해서 이미 들었었거든.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마치 본능적인 공포랄까요.”
-“흉조, 그 괴물에겐 조금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흉조는 아르카나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삭제하는 도구였다.
강함과 약함을 떠나서.
아르카나 대륙의 존재는 흉조 앞에서 저항할 수 없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지.’
하지만 방금도 말했듯.
“진정으로 거스를 수 없는 존재였나.”
보고 있잖아?
[허상을 베는 검 : 일루젼 브레이커(Illusion Breaker)]
[등급 : 전설]
[제한 : 알려지지 않음]
[효과 : ‘프로토타입’과 전투 시, 파괴력이 대폭 상승한다.]
[설명 : 고귀한 자아를 가진 에고 소드.]
그럼에도 프로토타입은 허상에 불과하다.
아르카나 대륙 전기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르카나 대륙의 존재들에게 상태이상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가진 미완성 몬스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증거가 바로.
[레벨이 올랐습니다.]
처치하는 순간, 떠오르는 메시지들에 있었다.
[현상금을 획득하셨습니다.]
[보유한 카르마 : 1,041 카르마]
심지어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께서도 증명하셨거든.
그 어떤 상태이상에도 저항할 수 있는 악크샨의 집념이라면. 흉조의 뱃속에 집어삼켜지고도, 오히려 흉조를 남쪽 바다에 붙들어 둘 수 있다고.
‘그러니 거스를 수 없는 게 아니라고.’
멈칫하는 그림자 신.
“나는……!”
우우우.
그리고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채.
이쪽을 향해 돌진해 오는 ‘신을 삼킨 흉조.’
그래, 화가 날 만도 하다.
‘이건 네 계획이 아니었을 테니까.’
레이먼 션의 속셈? 아직 전부를 알진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녀석이 아르카나 대륙, 그리고 현실의 붕괴를 바란다는 것이다.
‘패치하는 꼬라지만 봐도 알 수 있어.’
정기 업데이트가 됐든, 긴급 업데이트가 됐든.
클리어하는 순간, 더 큰 시련을 던져준다.
그게 레이먼 션이 생각하는 난이도 조절인 모양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림자 신이 아르카나 대륙의 흑막이라는 정해진 설정을 깨트린다면 더욱 지랄 맞고, 극복하기 어려운 긴급 업데이트가 쏟아져 나올지도 모르겠지.
아니, 그동안 해온 꼬라지를 보면 확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랑펠이 어디 사냥감과 타협하는 거 봤냐?
아니, 그랑펠이 아니더라도.
나, 이호열도 너한텐 당한 게 있어서 말이다.
레이먼 션.
네가 원하는 대로 판이 흘러가는 꼴은 도저히 봐줄 수 없다.
-신을 삼킨 흉조인가.
신검합일 상태.
덕분일까, 일루젼 브레이커.
너도 나랑 같은 생각이구나?
-그렇다면 나는 신과 흉조를 동시에 베는 검으로 거듭나리라.
서걱.
꼿꼿한 자세로 검을, 검강을, 검강과 하나가 된 나의 육체를 내지른다. 남쪽 바다의 흉조를 봉인할 때야 선배님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콰직.
신을 삼킨 흉조, 녀석의 옆구리가 그대로 베어져 나간다.
그와 동시에 녀석이 삼켰던 것들이 역류하기 시작한다.
공허했던 만신전 어귀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다.
[프로토타입, 신을 삼킨 흉조에게 ‘과다출혈’이 발생합니다.]
일격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과거와는 다르게 그럴싸한 검술을 꽤 많이 익혔거든.
찰나의 순간, 수십 번도 넘게 네 몸뚱이를 베어냈다는 뜻이다.
콰카카칵.
더욱더 커다란 굉음과 함께. 더욱더 많은 검상(劍傷)에서 더욱더 많은 삼켜진 것들이 역류한다. 더욱더 많은 메시지가 어지럽게 떠오른다.
[만신전의 수호신수, 페가수스가 다시금 날개를 펼칩니다.]
[만신전의 영약, 푸른 석류가 다시금 뿌리를 내립니다.]
[만신전의 구름다리가 다시금 수놓아집니다.]…….
보자.
남쪽 바다의 흉조 때를 생각하면, 어쩌면 이번 역류에서도 크고 작은 버프가 뒤따를지도 모르는 일이겠군. 물론,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건 그런 사소한 메시지 따위가 아니었다.
“……만신전? 어떻게?”
그림자 신은 전의를 상실한 채 동요하고 있었다. 내가 흉조를 베어낼 줄은, 그리고 베어낸 흉조에게서 삼켜졌던 것들이 멀쩡하게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 한 모양이겠지.
그러나.
“……아니, 나는 납득할 수 없다.”
제 모습을 찾아가는 만신전의 어귀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이 정말 사실이라면……. 모든 건 진정으로 내가 신격을 갖추지 못했기에. 내 신격이 부족하여 벌어진 일이 되지 않느냐……!”
그림자 신의 피폐한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모든 게 내가 신격을 갖추지 못해 만신전에 진입하지 못했기에. 그것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었기에. 이 모든 사태가……!”
만신전.
나는 그림자 신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그곳엔 정말 굳게 닫힌 문이 있었다.
정말이지, 누구도 들이지 않겠다는 것처럼 굳게 닫혔군.
그러나.
‘이유는 제대로 알고 있어야지.’
나는 입을 열었다.
“신(神)이라, 유감이지만.”
그랑펠식 화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신 따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신전의 존재 또한 믿지 않는다. 그림자 신을 자처하는 그대 또한 내게는 위태롭게만 보일 뿐.”
“……!”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듯한 눈빛.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림자 신과 만신전.
모두를 눈앞에 두고 이딴 소리를 내뱉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짜로 그렇게 보이는 걸 어떡하냐?
“만신전에 진입하는 데 필요한 건 신격 따위가 아니다.”
또각.
나는 만신전 입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그림자 신이 흠칫했다.
물론, 나도 만신전의 문을 열 순 없었다.
그럴 수밖에.
[아직 접근할 수 없습니다.]
[현재 업데이트 중입니다.]
[진행도 : 94.7%]
‘부족한 건 우리가 아니라 레이먼 션, 그 자식이니까.’
나는 메시지를 보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레이먼 션이 만신전 내부에 있노라고.
하지만 아직 제대로 알지 못했다.
‘만신전의 입장 조건을 말이지.’
그러니 보험이 필요했다.
내가 만신전 진입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을 때, 나를 대신해서 만신전에 진입할 수 있는 아군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적임자가 눈앞에 있었다.
‘누구긴 누구겠어, 그림자 신이지.’
나는 입을 열었다.
“선택하라.”
“……선택하라고?”
“바라는 것은 허상과 다를 바 없는 신격인가, 진실인가.”
“……!”
이윽고 눈앞이 점멸했다.
[메인 퀘스트, ‘흑막을 들추다’를 실패하셨습니다.]
털썩.
위태롭게 짊어지고 있던 모든 걸 내려놓았다는 듯.
그림자 신이 그대로 무너져 무릎을 꿇었다.
나를 올려다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대여, 내게 진실을 보여다오.”
[그림자 신과의 관계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흑막 너머의 진실’이 시작됩니다.]
[칭호, ‘흑막의 구원자’를 습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