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67화 (467/489)

◈ 467화. 그렇다, 이 또한 허상에 불과하다

가브리엘은 중층 결계.

‘그림자를 비추지 않는 거울’에 삼켜지는 호열을 바라봤다.

간만에 만난 악크샨의 동지라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감정이 실렸군.”

악크샨에서의 파문?

진심으로 즐겁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 지긋지긋한 과정을 떠나서.

악크샨에서 쌓아온 업적이 모조리 부정당한 듯한 기분이었으니.

“사실 업적보다는 체력 단련, 그 개고생이 더 억울하지만.”

가브리엘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그래도 궁금하긴 하군.”

생전의 육신은 이미 아르카나 대륙 어딘가에서 썩고 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접한 악크샨의 소식을 떠올려본다.

“어디, 성전은 무사히 마쳤는가.”

뒤늦게 호열의 태도를 생각해 본다.

드높았던 기품과 꼿꼿한 자세가 떠올랐다.

뒤늦게 후회가 치솟았다.

“……사실 그냥 권유했어도 이해해 줬을 것 같은데.”

굳이 호열을 밀쳐서 떨어트린 이유?

간단했다.

세상만사를 통달한 듯한 그 눈빛으로도.

아직 자신만큼은.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비록 파문당했지만.

“어쨌든, 악크샨 선배로서의 권유라고 하지.”

가브리엘은 호열이 스스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데에 더없이 적합한 공간이 바로.

‘그림자를 비추지 않는 거울’이었을 뿐.

“그대는 조급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미 충분히 많은 걸 이룬 것 같았으니.

거울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대는 곧장 결계를 돌파하고 내 뒤를 쫓을 수 있겠지. 물론, 이 녀석의 등에서 떨어진 이상.

“악크샨답게 정직하게 걸어서 올라와야 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더 미안해지는걸?

중층 결계를 돌파한다고 해도 회랑에는 또 다른 역경과 시련이 도사리고 있다. 그중에는 가브리엘, 자신을 가로막은 상층 결계도 있었다.

그러나.

“아니, 그대에겐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

고심하던 가브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나는 그대가 올라오기를 바라야 하나, 올라오지 못하기를 바라야 하나? 지은 죄가 있는 나로서는 마냥 응원할 수 없는 처지군.”

이럴 줄 알았으면 역시, 밀치지 말 걸 그랬군.

“떨어지는 순간에도 표정이 살벌했는데…….”

고민하는 와중에도 한 가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회랑의 최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격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몸뚱아리.

그림자 신과 마주할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덧붙이자면…….”

가브리엘은 작은 미소를 흘렸다.

“어쩌면 나는 방해받지 않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군.”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집단, 그림자 용병단.

그들을 사냥하기 위해서 대륙을 떠돌았고, 그들의 배후에 그림자 신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근원인 그림자 신을 사냥하기 위해 녀석과 계약을 맺었다.

새삼스럽게 웃음이 나온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변명거리가 없어.”

그 판단은 가브리엘이 악크샨에서 파문당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가브리엘에게 후회는 없었다. 설령 악크샨의 규율을 어겼을지언정.

가브리엘은 자신의 행동에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었으니까.

스릉.

“여러모로 내게는 족쇄로군, 악크샨.”

그런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비장하게 울렸다.

“그럼에도.”

이윽고, 그림자 신이 가브리엘을 맞이했다.

“악크샨을 위하여.”

철컥.

*

[클래스 퀘스트 : 그럼에도 악크샨을 위하여]

악크샨의 파문 악마 사냥꾼, 가브리엘.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을 사냥해 왔다.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최후의 악을 사냥하길 바란다.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여, 선택하라.

그대가 바라는 것은 규율의 준수인가.

악마가 아닌 새로운 악의 사냥인가.

-악크샨의 규율을 준수한다. (선택)

-가브리엘의 그림자 신 사냥에 합류한다. (선택)

악크샨의 주적?

어디까지나 악마로 한정되어 있었다.

솔직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악마보다 더한 자식들도 많지.’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이 넘치는 세상 아니겠냐?

그들 전부를 적으로 돌려서 살아남을 능력은.

나사 빠진 악마 사냥꾼에겐 없었으니까.

가브리엘이 파문당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악크샨의 규율을 어기고, 악마가 아닌 악인들을 사냥했다는 것.

나는 퀘스트 목표를 바라봤다.

‘나더러 선택하라는 건가.’

아마도 이 선택에 많은 게 걸려있겠지.

그야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에서.

이젠 진짜 악크샨의 지도자가 된 내가 아니겠냐?

‘새로운 악크샨이 나아갈 방향을.’

사실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내뱉은 말이 있으니까.’

악마와 다를 바 없는 레이먼 션을 사냥하겠노라.

내뱉으면 반드시 실현해 내고야 마는 주둥이로 지껄였잖냐?

물론.

‘이걸 저쪽에서 거절할 줄은 몰랐지만.’

나는 새롭게 갱신된 퀘스트 목표를 바라봤다.

-악크샨의 규율을 준수한다. (선택)

-가브리엘의 그림자 신 사냥에 합류한다. (실패)

-가브리엘을 추적한다. (선택)

가브리엘.

우리 대선배님께서 어째서 나를 밀친 건지.

악크샨식 화법으로 내뱉으신 말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나, 이호열은 몰라도.

“부디 합당한 이유를 준비하길 바란다, 가브리엘.”

우리 그랑펠 님께선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용납할 수 없는 분이라서 말이야. 적절한 이유가 없다면 선배고, 뭐고, 적절한 처분을 각오해야 할 거다……!

다시 거울로 둘러싸인 사방을 살핀다.

[히든피스 : 그림자를 비추지 않는 거울]

과연, 그 이름처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엔 그림자가 없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진짜 큰 문제는 거울 속 나의 행동이었거든.

정신을 차린 순간부터 지금껏.

나는 제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거늘.

또각─

거울 속 나는 구두 소리를 내며 걸음을 내딛고 있었으니까.

이럴 때 쓰는 말이 역지사지였나?

마탑 마법사들이나 AAU 지부장들.

그들이 내 등장에 어째서 화들짝 놀랐는지 알 것만 같다.

이거…….

‘……압박감이 장난 아닌데?’

찰나의 순간, 정보를 규합한다.

‘아마도 저건 내 그림자겠지.’

귀빈들과 같은 나의 그림자.

그렇게 추측한 이유는 간단하다.

거울에 비치지 않는 내 그림자가 어디로 갔는가?

거울 속에서 멋대로 움직이는 저게.

내 그림자라고 생각하면 상황이 딱 들어맞았으니까.

그렇다면.

[적정 레벨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저런 해괴한 적정 레벨 책정도 이해가 되는군.

나, 이호열.

솔직하게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최근 들어 고민이 깊어지던 참이었거든.

그랑펠은 자비롭다, 자비롭지 않다.

내가 생각해 온 그랑펠과 실제 그랑펠의 행보에서.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단 말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스쳐 가는 가브리엘의 말.

-“나는 이미 백골이 된 육신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귀빈, 나를 포함한 모든 그림자는 이성으로 움직이는 게 아닌 타고난 본성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땐 죽어서까지 본분을 잊지 않는 게, 역시 내가 아는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확신하는 바람에 뒤통수를 맞아버렸지만…….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래, 과정이야 어찌 됐든.

히든피스 ‘그림자를 비추지 않는 거울’에 진입.

나는 나의 그림자와 마주할 수 있게 됐다.

그 덕분에 어쩌면.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랑펠의 타고난 본성.

그 진의를.

물론,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그랑펠답게.

속내를 확인하는 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척.

거울 너머 그랑펠이 손을 치켜들자 풍경이 변한다.

고오오오.

허공에 떠오르는 무수한 마법진.

‘!’

목격하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역시, 나한테도 자비가 없구나 그랑펠?!’

서운하다기보다는 내가 저걸 막아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그럴 수밖에.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발동하지도.

그렇다고 상태이상, [흑화]에 빠지지도 않았다.

순전히 나, 이호열이 쌓아온 것만으로.

자비 없는 그랑펠과 맞서야 한다는 것.

그나저나 생각하는 틈조차 주지 않는 거냐……?

스오오오.

속성, 순수 마력, 파괴, 마법부여, 황혼의 마력…….

셀 수 없이 많은 학파 마법이 발현.

나를 향해서 쏟아져 내린다.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군.

나라는 인간이 보잘것없이 느껴질 정도의 박력이랄까.

‘건축 마법……. 아니, 벽을 세운다고 저런 걸 막을 수 있나?’

건축 마법엔 어디까지나 주재료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방이 거울인 히든피스였다.

거울을 재료로 발현한 빈약한 벽으로.

저런 마법 덩어리를 막아낸다?

건축 마법의 창시자로서 단언한다.

‘절대로 불가능해.’

그렇다면 역시, 반전 마법밖에 없다.

쏟아지는 마법의 구조를 파악한다.

물론, 반전 마법도 만능은 아니다.

타인의 마법에 간섭하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정신력 소모가 필요하다. 하나의 마법을 반전하는 것도 원래는 벅차단 뜻. 근데,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완전 남은 아니잖냐?’

보다 빠르게 사고를 가속한다.

꼿꼿한 자세로 마법을 관조하고 구조를 분석한다.

젠장,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결국, 역순으로 발현하는 데 성공했다.

파파파팟.

그야말로 광오한 초고위 마법들.

스스스스.

그 마법 세례가 하나둘 차례대로 순수한 마나 입자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흩날리는 마나 입자 사이로, 거울 너머의 그랑펠이 쇄도해 온다.

또각.

반전 마법을 발현하느라 시야도.

머리도.

육체도 엄청난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거늘.

자비가 없구나, 거울 속 그랑펠아. 구두굽 소리가 저렇게 섬뜩하게 들릴 줄 알았으면, 진작 소리가 덜 나는 구두로 바꿔 신었을 텐데……!

콰카칵.

천마군림보의 압력만으로 육체가 뒤로 튕겨져 나간다.

‘……젠장.’

어쩌면 더 이상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닐지도 모른다. [폭주]를 각오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사용해야만 할 상황이 온 건지도 모른다.

간신히 균형을 잡은 내가 벅찬 숨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나의 입방정이.

아니, 그랑펠의 입방정이 입을 열었다.

“애써 흉내 내는 모습이 안쓰럽구나.”

그 말에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잠깐만.

어째서 나는 거울 속 존재를 그랑펠이라고 확신했던 거지?

단순하게 적정 레벨에 그랑펠의 풀네임이 명시되어 있어서?

‘……아니야.’

그렇다.

거울에 비친 건 어디까지나 나, 이호열이었다.

머리카락이 길어지는 바람에 잠깐 착각할 수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이호열이란 뜻이다.

그야 당연하다.

나는 지금 폭주하지도, 흑화하지도 않았으니까.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거울 너머의 형체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저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 뒤에 어떤 감정이 숨겨져 있는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철면피 뒤에서 내색하지 않아도 훤히 보인단 뜻이다.

‘아니지, 어디 그것뿐이겠냐?’

어깨에 걸치고 있는 여명의 재킷을 고정하기 위해 마력을 접착제처럼 발현했다는 것도, 그 화려한 재킷 안주머니에 녹차 티백이 고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도, 나는 전부 알고 있단 말이다.

주둥이가 질 새라 말을 거든다.

“결국, 허상에 불과하거늘.”

그래 말 한번 잘했다, 그랑펠.

주제 파악이 특기인 나다.

덕분에 자만은 없다.

내가 쌓아온 업적에 어떤 금칠, 포장, 착각이 더해졌는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거든!

‘만약. 내가 아니라 진짜 그랑펠, 너였다면 말이야.’

나는 진심으로 두려워했을지도 모르지만……!

저게 나 이호열이라면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정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내 기구한 팔자야. 가엾기 짝이 없게도 거울 속에서도 흑역사에 시달리고 있구나, 하면서 말이지.

슥.

그쯤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인벤토리에서 장갑을 꺼냈다.

히든피스의 진실을 완벽하게 간파한 순간.

더 이상 이런 곳에서 발목을 잡힐 시간은 없었다.

왼손부터 오른손.

[지휘관의 장갑 - 노룡의 지혜]

[등급 : 신화]

[제한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효과 : 신화에 기록될 위대한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가 선포했다. “나의 유산으로 하여금 클라우디께서는 용언을 이해하고 내뱉을 수 있게 되시리라!”]

이윽고 나는 만물의 왕으로서 용언을 뱉었다.

【깨져라, 허상이여.】

차원을 찢는 드래곤의 용언이다.

구조를 파악한 결계 따위는.

보다시피.

와장창.

단번에 무너트릴 수 있다는 의미다.

사방의 거울이 깨지면서 거울 속의 나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가 돌아오고 눈앞이 점멸했다.

[히든피스, ‘그림자를 비추지 않는 거울’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나를 이런 곳에다가 밀쳤겠다, 가브리엘.’

고오오오.

나는 곧바로 비산하는 마력에 간섭, 포탈을 발현했다.

목표 좌표는 당연히 가브리엘이다.

좌표를 어떻게 대상으로 설정할 수 있냐고는 묻지 마라.

‘격이 다른 마력으로는 상당히 많은 걸 할 수 있으니까.’

왜, 지금처럼.

“……!!!”

콰드드득.

포탈에서 빠져나온 나는 가브리엘을 휘감은 사슬을 모조리 박살을 내버렸다. 그리고 마주했다. 그림자 신, 아니, 어쩌면 레이먼 션일지도 모르는 녀석과.

사냥에 앞서서.

나는 경건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펄럭.

어깨에 걸쳤던 여명의 재킷에 양팔을 끼웠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쓰러진 가브리엘에서 그림자 신으로.

시선을 옮겼다.

“귀빈을 대하는 태도가 형편없군.”

뒤끝 있게 선언했다.

“그 위선 또한 처분에 반영하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