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65화 (465/489)

◈ 465화. 숨바꼭질

달칵.

찻잔을 내려놓는다.

주변을 살펴본다.

결투가 금지된 덕분인가.

다들 얌전하시군.

일단, 사교장에 발을 들인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시선이 분산됐다.’

내게 걸린 현상금이 유독 많아 이목이 쏠리기는 했다만.

귀빈들끼리도 서로를 흘겨보는 게 딱히 사이가 좋아보이진 않았다.

그보다.

“내키지 않거늘.”

아무리 사교장을 싫어해도 이럴 땐 말이야.

존재 자체에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랑펠?

하여튼 고집은…….

나는 혀를 내두르며 열렬한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을 바라봤다.

덩달아 떠오르는 메시지들도.

그런데.

[현재 현상금 : 3 카르마]

[현재 현상금 : 1 카르마]

[현재 현상금 : 1 카르마]…….

뭐냐, 이 깜찍한 숫자들은?

‘아니, 알긴 알았는데.’

전례가 없던 현상금이라고 했으렷다.

덕분에 짐작은 했다.

다른 그림자 회랑의 출입자들과 내게 걸린 현상금엔 꽤 큰 격차가 있을 거라고.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일천 배 차이는 너무 심하잖아, 이거?!

‘막말로.’

여기 있는 귀빈들의 현상금 전부를 합쳐도 내 현상금보다 낮지 않을까? 어이가 없는 와중에도 눈알은 태연하게 굴러가니, 그래 키치가 보였다.

‘내가 유일하게 정체를 아는 존재.’

최악의 범죄 집단, 그림자 용병단 단장.

그런 키치에게 걸린 현상금을 확인한다면.

내게 걸린 카르마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이윽고 키치 곁에 떠오르는 메시지.

[현재 현상금 : 1 카르마]

……진짜?

키치 같은 거물에게 고작 1 카르마라니.

나는 뒤늦게 인정하고 말았다.

나, 괜히 협공을 당한 게 아니었구나?

‘그런 상황에서 잘도 억지를 부렸다, 호열아.’

이래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는 거구나.

[첫 세계수의 축복]으로 상처는 이미 치유된 상태였거늘.

걸린 현상금을 생각한다면…….

그랑펠의 재능이 개화하지 않았다면.

나는 멈추지 않는 협공에 그대로 황천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안도의 한숨을 삼키던 그때였다.

슥.

고용인이 다가오더니 말을 건네왔다.

“귀빈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한 손에 잡힐 정도로 작은 상자가 쟁반 위에 놓여있었다.

고용인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다.

그 테이블엔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사내가 있었다.

‘눈매 살벌하네.’

아니, 살벌한 걸 넘어서 피폐했다.

마치 방금까지 무언가에 시달린 사람처럼.

물론, 중요한 건 인상 따위가 아니겠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칼같이 답했다.

“거절하겠다.”

청렴결백에 감사하게 되는 건 칠죄종 탐욕 이후로 처음인 것 같군. 암투는 여전히 허용된 상황이다. 막말로 이게 진짜 선물이 담긴 상자인지, 상자로 위장한 몬스터 미믹일지 누가 알겠냐?

“그 대신 전해주겠나.”

나는 당당히 말을 이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직접 쟁취해 보라고.”

결투가 금지된 사교장.

덕분에 나는 당당히 주둥이를 놀렸다.

내 말에 고용인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 말씀 분명히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나는 사내와 마주 앉았다.

‘그림자가 그냥 꼭두각시 같은 게 아니었나 본데?’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을 정도의 의식은 있었구나?

하긴 애초에 의식이 있으니까.

내 현상금을 노린 거겠지만…….

달칵.

어쨌거나, 나는 홀로 고고하게 찻잔을 기울였다. 격식에 죽고 못 산다면서 어떻게 마주앉은 상대방에게 차 한 잔 대접하지 않느냐고는 묻지 마라.

‘다른 차라면 몰라도.’

천하의 그랑펠에게 여명의 재킷 안주머니에 고이 품은 녹차만큼은. 마르셀로나 하르콘에게도 큰마음을 먹고 내어줘야 하는 소중한 보물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나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암투는 여전히 허용이라고 했겠다…….

소란을 피우지 않고 내 숨통을 끊을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터.

‘그래서 꿍꿍이가 뭔데.’

궁금하지만, 철저하게 내색하지 않는다. 이럴 땐 철면피가 도움이 된다. 아쉬울 게 없다는 듯한 태도는 대화에서 우위를 점하게 해주니까.

하지만 나, 이호열.

대화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개뿔.

사내가 입을 열자마자 경악하고 말았으니.

“그대는 악크샨이군.”

……그렇다!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단어, 악크샨.

그제야 몰골이 어째서 저 모양인지 이해가 갔다.

‘백 퍼센트다.’

당신, 빌어먹을 체력 단련 때문이었구나?

나는 순전히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 때문에 멀쩡할 수 있는 것뿐. 악크샨 선배님들은 하나같이 저런 기운 빨린 듯한 표정들을 짓고 계셨거든……!

나는 곧바로 말을 바꿨다.

“받겠다.”

“무엇을?”

“그대의 호의를.”

호의란 사내가 건넸던 선물, 상자를 말하는 것.

……크흠.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게 멋쩍구만.

그래서인가, 사내가 되물었다.

“고용인에게서 듣지 못했나. 그림자 회랑에선 누구의 말도 신뢰할 수 없다고. 더욱이 그대에게 걸린 현상금은 전례가 없는 액수다. 그대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나?”

후회하지 않을 수 있냐고?

글쎄, 후회는 몰라도 당신이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라는 건 확신할 수 있거든. 그 말투에서 느껴지는 까칠함이 그 시절 악크샨 NPC랑 똑같아.

툭.

사내는 말하면서 내 앞에 다시 상자를 내밀었다.

자신을 신뢰한다면 상자를 열어보라는 거겠지.

당연한 말이지만, 내 손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눈앞이 점멸했다.

[클래스 퀘스트 : 그럼에도 악크샨을 위하여]

역시,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클래스 퀘스트가 떠올랐으니 눈앞의 사내는 정말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 맞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퀘스트 내용을 읽어나가려던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

클래스 퀘스트에 명시된 사내의 이름이 익숙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때부터 십 년 하고도 수년이 지났다. 십 년이면 변한다는 강산으로도 모자라 대격변이 일어났고 세상이 뒤집어졌다.

그 긴 세월에 다른 플레이어들은 잊었더라도, 나 이호열은 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보잘것없는 취급을 받던 악크샨의 개천룡.

유일무이했던 악크샨의 네임드 NPC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그대를 알고 있다, 가브리엘.”

……그 화법은 대선배님에게도 예외가 없구나?

*

그림자 회랑.

사교장 고용인들의 시선은 오직 한 사내,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보유한 카르마, 그의 현상금을 떠올려본다.

무려 일천(一千) 카르마. 잔을 닦는 고용인도, 테이블을 정리하는 고용인도, 품에서 맹독을 꺼내는 고용인도 군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인간 주제에 그런 카르마를 소유하고 있는 건지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납득이 됐다.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회랑의 주인께서도 그를 위해 특별히 회랑의 문을 개방한 것이겠지.

“…….”

더욱이 지켜볼수록 납득이 되기 시작했다.

‘귀빈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극복했다.’

귀빈.

그들은 강하다.

고용인들이 귀빈들의 현상금을 노리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와 다르게.

귀빈들은 전부 그림자 신의 계약자들.

하나하나가 아르카나 대륙에서 강자로 꼽힐 이들이기도 했지만.

귀빈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들은 오직 본능만이 남은 존재들이니.’

실체가 아닌 그림자이기에.

저들에게 통제는 없었다.

오직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저들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귀빈들은 타고난 악한 본능에 따라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괜히 그림자 신의 눈에 들어 계약을 맺은 게 아니라는 거겠지.

고용인들은 명심했다.

‘귀빈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다.’

오직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면 충분하다. 그는 이 비열한 그림자 회랑에서 격식과 품격을 집어던지지 못한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조금 전에도 확인하지 않았는가?

그는 자신에게 비수를 겨눴던 고용인을 너그러이 용서하고 사교장에 착석. 자신의 잔을 사용할 정도로 독살의 위험성을 익히 간파하고 있었으면서도, 독살을 시도한 고용인에게 단 한마디 말만을 남겼다.

-“나를 즐거이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군.”

그걸로 상황은 끝이었다.

잔을 닦던 고용인은 생각했다.

‘……귀족을 넘어 마치 회랑의 주인 같은 태도가 아닌가?’

그러나 불경한 생각은 곧장 털어냈다.

말했다시피.

그림자 회랑은 계약과 이행밖에 남지 않은 비정한 공간이었다.

‘그 같잖은 긍지가 결국,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격식을 갖춰 대화를 요청한다면 받아들이겠다.

과연, 그는 내뱉은 말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고용인은 장담할 수 있었다.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와 마주 앉은 귀빈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그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라고.

아니, 애초에 그가 건넨 상자를 아무런 의심도 없이 열어본 것 자체가 실수였다. 권모와 술수, 모든 암약과 비열함을 관장하는 그림자 신의 계약자다.

손바닥만 한 작은 상자로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 것? 고용인으로서 어깨너머로 본 풍경만으로도 수십, 수백 가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전개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슥.

의자를 바닥에 끄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그랑펠.

그가 절도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스스.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허공으로 흩어지게 하는 것도 잠깐.

고오오.

“……?!”

그의 육체에서 가공할 정도의 마력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전의 삶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세월 그림자 회랑에 종속된 고용인들.

그렇기에 마법적 식견 따위는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느낄 수 있었다.

그랑펠, 그의 마력 흐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님, 규율을 잊으신 겁니까?”

아니, 어쩌면 잊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설마, 벌써 당한 건가?’

규율을 충실하게 준수하던 그가.

귀빈이 건넨 상자를 열어보고는 갑작스럽게 규율을 어겼다?

장담할 수 있었다.

상자.

그 내부에.

그랑펠을 날뛰게 할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고.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던 상대에게 비수를 꽂는 귀빈의 비정함에 놀라서? 아니다. 귀빈이 저런 존재라는 건 익히 봐왔기에 알 수 있었다.

사교장의 모두가 멈칫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문득, 허공을 향하는 고용인들의 시선.

누군가 말을 더듬었다.

“내, 내려오고 있어.”

규율 위반자를 회랑에서 추방하는 존재.

아니, 삭제하는 존재.

이제 곧, ‘그놈’이 이 사교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 테니까.

검은 베일 아래에 가려진 얼굴에 두려움이 깃든다.

그럴 수밖에.

그것은 이 세상 존재가 아니었다.

그 생김새부터 이 세상의 언어로는 도저히 형언할 수 없다.

회랑의 아득한 천장에서부터.

화륵.

화륵.

화륵.

천장의 샹들리에가 하나둘 불길하게 밝혀진다.

귀빈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상금에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는 거겠지.

그때였다.

츠릉.

강림하는 그것을 향해서.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가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이해하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허상을 부숴라.”

고용인들로서는 평생을 곱씹어도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일루젼 브레이커(Illusion Breaker).”

.

.

.

언제나 의문이었다.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존재로는 아르카나 대륙의 드래곤, 마계의 상위 마왕이 있다. 그렇다면 누가 봐도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게 분명한 대격변의 원흉이자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개발자.

레이먼 션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해답을 이렇게 찾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점멸하는 메시지를 바라보며 선언했다.

“숨바꼭질은 끝이다.”

[프로토타입, ‘신을 먹는 흉조’가 출현합니다.]

“이 시간부로 구마의식을 시작하겠다.”

.

.

.

[악마 사냥꾼, ‘가브리엘’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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