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64화 (464/489)

◈ 464화. 내겐 숨 쉬듯 익숙하다 (2)

익숙한 실루엣.

그 정체는 전(前) 그림자 용병단 단장, 키치가 분명하리렸다.

백번 양보해서 키치라면 내 풀네임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 약속을 어긴 키치가 혼자 대륙을 떠돌던 그때.

‘어디서든 내 풀네임을 듣게 됐을지도 모르지.’

울려퍼지는 전설이다, 뭐다, 하도 요란했었으니까.

근데, 남을 통해 듣게 되는 거랑 내 스스로 내뱉는 걸 듣는 건 차원이 다르다니까? 뭣보다 더 이상 변명을 할 수 없잖냐? 내뱉은 말은 철회하는 법이 없는 그랑펠의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이제 끝이다, 호열아. 포기하면 편해…….’

그런데.

‘……잠깐.’

그랑펠의 예리한 심미안이 움찔거렸다.

섬세하지 못한 나.

이호열이 잠시 잊어버렸던 사실을 상기시켜 줬다.

‘어째 머리카락이 길다?’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나.

이호열의 은발 머리칼을 말하는 게 아니다.

분명, 뺨으로 떨어지는 단발로 머리카락을 잘랐던 키치였거늘.

웬수의 말처럼 붙임머리도 아닐 텐데.

키치는 어느새 긴 생머리가 되어 있었다.

의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츠릉.

경쾌하게 울리는 금속의 치찰음.

그림자 아래.

비수를 꺼내 드는 키치에겐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그랑펠 누이의 머리칼을 내게 돌려준 키치다.

‘키치가 내게 무기를 겨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쯤에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건 키치가 아니다.

키치와 똑같이 생긴 ‘무언가’라고.

어쩌면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키치는 그림자 회랑의 주인.

그림자 신과 계약을 맺었다고 했으니까.

문득, 고용인의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림자 회랑이 열린 지금. 회랑 내부에는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님을 제외한 ‘귀빈’들께서도 입장하고 계십니다.”

설마, 그 귀빈들이 그림자 신과 계약을 맺은 계약자들을 말하는 거였나? 추측에 확신을 준 건 역시나 한번 목격한 건 쉽게 잊지 않는 그랑펠의 식견이었다.

쨍쨍한 햇빛 아래에서도.

귀신처럼 그림자가 없던 키치.

그렇다면 결론이 나왔군.

나는 키치의 그림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섬겨야 할 주인을 착각하고 있구나.”

단순히 키치의 그림자뿐만 아니다.

그림자 회랑을 찾은.

모든 귀빈, 그림자들에게 선언했다.

“그대들의 주인은 그림자 신 따위가 아니거늘.”

불공정 계약의 내용이 뭔지는 몰라도.

그림자엔 본래 주인이 있는 법이잖아?

물론, 그런 내 말에 감화 감동하는 그림자들은 없었다.

고용인이 다음 일격을 준비하며 읊조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당히 말씀하실 수 있다라. 명성대로 대단한 화술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그러나 유감입니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님.”

그 긴 이름을 잘도 계속 읊는데, 입 안 아프냐?

나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긴 채.

귀철을 치켜들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림자 회랑에는 회랑의 규율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전례가 없는 액수의 현상금인 무려 1,000카르마가 걸려있는 상태지요.”

현상금이라.

그 말에 찰나지만, 시선을 옮겼다.

점멸하는 시스템 메시지를 살핀다.

[현재 현상금 : 1,000 카르마]

카르마.

화폐의 단위를 말하는 거겠지. 이례적이라는 고용인의 말. 그리고 내게 달려드는 귀빈들의 숫자만 봐도 대단히 큰 금액이라는 건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기대하기도 했다.

‘이걸로 뭔가 대단한 걸 구매할 수 있는 건가?’

그림자 회랑의 적정 레벨을 생각해 보자.

무려 2천에서 3천.

뭣보다 그림자 ‘신’이라니까.

‘어쩌면…….’

카르마로 [신화]급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지 않을까?

왜, 김칫국이라고 해도 그릇에 입술은 대볼 수 있는 거니까.

그러나 청렴결백, 그 자체.

세속적인 욕구에서 해탈하신.

우리 그랑펠 님께서는 아니신 모양이었다.

“그깟 현상금을 위해 무고한 이를 해친다라.”

하여튼, 그 주인에 그 무기라고.

-주인이여. 검강을 빛낼 때로군.

귀철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고.

“고맙다. 그대들을 보다 진심으로 처분할 수 있겠군.”

어쨌든, 좋다.

어차피 진심으로 대하지 않고서는 살아서 코앞의 사교장에 발을 들일 수 없을 것 같았거든. 여러 개의 복도가 하나의 사교장 입구로 통하는 회랑의 구조였다.

‘여기서 시간이 끌리면 더 많은 귀빈들께서 몰려드시겠지.’

그러니 나는 첫 번째 목표를 설정했다.

사교장이 어떻게 생긴 공간인지는 알 수 없다만.

계속해서 몰려들 그림자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귀철이 공명해 왔다.

-주인이여. 이 순간, 나의 이름은 무엇인가.

올 것이 왔구나.

불현듯 떠오르는 아찔한 그 이름, [허상을 베는 검 : 일루젼 브레이커(Illusion Breaker)]. 레이먼 션의 프토토타입을 썰기 위해 내디뎠던 긍지의 검로 제1길.

‘그래, 필요하겠지.’

악마가 없기에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은 상태다.

이제 막 1천 레벨을 넘어선 내가 적정 레벨 2~3천짜리 히든피스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뜻.

드디어 긍지의 검로 제2길을 개척할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빌어먹을 작명 센스로 내뱉었다.

“삼켜라.”

하다하다 이젠 시동어까지 덧붙인 거냐, 그랑펠?

“섀도우 슬레이어(Shadow Slayer).”

정말이지,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주 그냥 겉만 과하게 그럴싸한 이름의 향연이었거늘. 불행 중 다행히도 수치심에 고통스러워 할 틈은 없었다.

스와아악.

빠르다.

그리고 예리하다.

오직 나의 급소를 향해 기습이 쏟아진다.

과연, 그림자 신의 계약자들이라는 건가?

쉽게 말해 하나하나가 그림자 용병단 단장.

키치급이라는 소리겠지.

그러니 나는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를 삼키는 검 : 섀도우 슬레이어(Shadow Slayer)]

[등급 : 전설]

[제한 : 알려지지 않음]

[효과 : ‘그림자’와 전투 시, 파괴력이 대폭 상승한다.]

[설명 : 고귀한 자아를 가진 에고 소드.]

쾅.

파괴력이 대폭 상승한 덕분. 그저 합을 맞댄 것만으로 달려든 그림자를 일격에 내동댕이칠 수 있었으니까.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숨통을 끊기 위해 달려드는 상대를 적당히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

-모조리 삼켜주마.

검강(劍罡).

은빛의 검기가 불처럼 일렁거리는 형태로 변해간다.

집어삼키겠다는 선언이 허세가 아니라는 듯.

내가 날아드는 공격을 되받아치는 순간.

고오오.

“!”

귀빈이 휘두른 무기를 막는 걸 넘어서 그대로 증발시켜 버렸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타오르는 과정을 생략하고는.

곧장 잿가루로 만들어 버렸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근데, 저쪽도 보통이 아닌데.’

악마 혹은 일반적인 몬스터였다면 아군이 압살당하는 광경에 멈칫이라도 했을 터. 하지만 감정이 없는 그림자라는 건가. 귀빈, 그림자들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젠장.’

쉴 새 없는 일격.

스친 거겠지.

팔뚝이며 옆구리며 곳곳이 욱씬거렸다.

‘역시, 천민 클래스 악마 사냥꾼인가.’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에고 소드를 쥐어도, [집념]이라는 고유 스탯을 활용해도, 갖가지 고급 기술들을 활용해도, 그 진가를 제대로 이끌어낼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나도 진심으로 임할 수밖에.’

애초에 이 위험한 초대에 응했던 목적이 무엇인가?

그랑펠 누이의 빚도, 그림자 용병단의 새로운 고용주로서 불공정 계약을 파기하는 것도 물론 중요했다. 그러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폭주를 통제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목적.

그러나.

‘아니지, 내가 어디서 이런 경험을 해보겠냐?’

조금 더 욕심을 내보자, 호열아.

키치의 그림자이기에 진짜 키치와 비교했을 때 누가 더 강한지, 무엇이 다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키치 정도의 강자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쉽게 겪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나는 몰라도 그랑펠의 재능이라면.’

이 결투에서 영감을 얻어 기이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어? 그러니 나는 데미지에도 몸을 웅크리지 않았다. 항상의 자세,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는 입을 열었다.

“느리구나.”

그랑펠식 화법을 번역하자면.

“하품이 나올 만큼 정도로.”

조금 더 발버둥을 쳐보겠다는 뜻이었다……!

쌔액.

물론, 발끈하거나 흥분해서 달려드는 그림자는 없었다.

그저 일정 속도로.

시야의 사각에서 내게 공격을 쏟아낼 뿐.

‘점점 적응이 된다. 보인다.’

나는 공격을 눈으로 뒤쫓으면서 회피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 와중에도 자세는 올곧기 짝이 없다.

오죽했으면 말이야.

귀철.

아니, 섀도우 슬레이어도 한마디를 보탰을까.

-그런가……!

그렇기는 뭐가 또?

-그런 거였군. 반격하는 움직임이 커지면 커질수록 빈틈과 시야의 사각 또한 넓어지는 바. 주인이여, 그대는 자신의 움직임을 극도로 통제하여 도리어 결계를 형성해 냈군!

뭐, 결계를 형성해?

그게 뭔 개소리냐.

당장에라도 부정하고 싶었는데.

‘어째, 얌전하다?’

아무래도 나도 모르게 간과한 모양이었다.

그랑펠의 천부적인 재능을.

그렇다, 섀도우 슬레이어의 말이 옳았다.

그랑펠은 오가는 합에서.

이미 새로운 태세를 창조한 것이었다.

말했다시피 그림자들에게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냉철하게 허점만을 노려 공격해 온다는 것.

도발이 통하지 않는 건 물론이요, 방심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끝인가.”

그런 그림자들이 자리에 멈춰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우뚝 선 나를 그저 빤히 노려볼 뿐이었다.

물론.

‘아, 쓰라려.’

처음이기에 완벽할 수는 없었다.

확실히 억지를 부렸다고 했잖아? 적정 레벨이 무려 2~3천이었다. 육체가 새로운 태세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몇 차례 더 비수가 몸을 훑고 지나간 탓이었다.

그러나 이 철면피에 고통이 드러날 리 있으랴?

“환영인사는 이쯤 해두는 게 좋겠군요.”

결국, 먼저 가면을 쓴 건 고용인이었다.

검은 베일 아래에서 올라가는 입꼬리.

드러냈던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숨기는 게 대단하군.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삼키던 순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사교장에 관한 안내를 계속하겠습니다.”

끼긱.

완전히 고용인의 태도로 돌아왔다는 듯.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사교장의 문을 연다.

그렇다면 이쪽도 귀족답게 화답할 수밖에.

“고맙군.”

무수한 테이블.

그 위에 놓인 촛불만이 빛을 내고 있다만.

드넓은 사교장을 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고용인이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를 맡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반대편에서 허리를 숙이는 누군가.

마찬가지로 검은 베일로 몸을 감쌌지만.

그 목소리가 조금 전까지 함께 하던 고용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쌍둥이 같은 건가.’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

“귀빈들께 사교장의 특수한 규율을 명시하겠습니다. 이곳, 사교장에선 회랑의 제1규칙이 일시적으로 정지됩니다. 그러니 귀빈께서는 지금 즉시, 들고 계신 무기류를 착용 해제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무기를 내려놓아라.

모든 말을 의심하자고 했거늘.

그래도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1. 자유 결투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비활성화됩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숨 돌릴 공간은 있구나?’

그와 동시에.

익숙한 사교장 시스템을 떠올려봤다.

[시공간의 사교장]에선 [시공간의 금화]로 아이템을 구입했다.

‘여기선 카르마라는 걸로 구매할 수 있겠지?’

[현재 보유 중인 카르마 : 1,000]

현상금과 동일한 액수의 카르마.

솔직히 내가 뭘 했다고…….

이렇게 많은 카르마를 보유하고 있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뭐가 됐든 일단 뭐라도 사볼까?’

어쩌면 그림자 회랑에서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아이템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구경이라도 해보자.

나는 직전까지 사투를 벌이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좌석에 착석했다.

척.

그런 나의 뒤를 따라서 귀빈들께서도 하나둘 자리를 찾아서 앉는데……. 과연, 어째서 콕 집어서 첫 번째 규율만 비활성화가 된 건지 알 것만 같았다.

암투.

사교장이기에. 격식을 지키기 위해서 치고받고 싸우는 결투만 금지되었을 뿐. 이곳에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상금 사냥은 계속되는 모양.

‘한시도 방심할 틈이 없다는 건가.’

악질적이구나, 그림자 신.

과연, 내게 최저치의 호감도를 품고 있는.

녀석의 손바닥 안이라고 할 만하다.

“실례하겠습니다.”

혀를 내두르던 중 사교장의 고용인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쪼르륵.

잔을 내려놓고는 도자기 주전자로 잔을 채워나갔다.

“카르마는 받지 않고 있습니다. 부디 즐겨주시길.”

축하주 같은 건가?

채워져 가는 잔을 바라보자 그랑펠의 감각이 경고했다.

독살이야말로 암투의 단골손님.

이유 없는 호의를 의심해야 한다고.

그러나 이번 위기만큼은.

딱히 그랑펠, 네가 경고하지 않아도 넘길 수 있었을걸?

그렇다.

그림자 회랑, 온갖 암투가 빗발칠 장소라고 한들.

나는 쉽게 당해주지 않을 테니까.

“유감스럽게도.”

자연스럽게 안주머니로 향하는 손.

허공에서 발현되는 찻잔.

나는 전용 잔에 능숙하게 녹차 티백을 걸치며 입을 열었다.

“나를 즐거이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군.”

……그냥 녹차가 먹고 싶었던 거면서 참 말은 잘해,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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