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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63화 (463/489)

◈ 463화. 내겐 숨 쉬듯 익숙하다 (1)

콜로세움의 살아 있는 전설, 락키드.

명성과 덩치가 무색하게도.

근육 덩어리는 흙바닥에 볼품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엄살은.”

“닥쳐.”

“그래서 어디 악ㅋ…….”

“그 이름, 듣기만 해도 열 받아 뒈지겠으니까 닥쳐!!”

누가 천하의 락키드를 이런 추한 몰골로 만들었는가?

전(前) 그림자 용병단 3석.

핸더슨이 껄껄 웃었다.

“술과 향락에 찌들었던 게 몇 년인데, 왕년의 체력이 그대로일 거로 생각한 건가?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락키드. 젊음의 혈기를 믿고 덤비다가는 그렇게 쓴맛을 보는 거지.”

감히 내 인생에 훈수를 둬?

그림자 용병단도 정식으로 해산했겠다. 평상시 락키드의 성질머리였다면, 당장 달려가 핸더슨의 멱살을 낚아채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씨벌, 내가 움직일 수만 있었어도 넌 뒤졌어.”

전신의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게다가 말은 살벌하게 내뱉었지만, 핸더슨의 비아냥엔 딱히 화가 나지도 않았다. 정작 지껄인 핸더슨 녀석도 나처럼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으니까.

전(前) 9석, 드쉐브가 늘어지게 하품을 뱉었다.

“알카리 할아버지, 악크샨은 어떻게 생겨먹었던 녀석들이었어? 정말로, 이 말도 안 되는 훈련을 매일매일 수행한 거야? 귀찮은 걸 넘어서 여기서 더 무리했다가는, 숨 쉬는 것도 귀찮아질 것 같은데……?”

그렇다.

모든 원흉은 빌어먹을 악크샨이었다.

끝나지 않는 훈련.

간신히 끝냈다면 다시금 반복되는 훈련.

전(前) 5석, 헤르키오라가 구시렁거렸다.

“그래, 더러운 손을 씻고 새롭게 태어나려면 고생 좀 해야지. 훈련이고 뭐고 다 좋다, 이거야. 그래서 우리 악마는 언제 잡으러 가는 건데?”

세상에 악마의 면상이 그리워질 날이 올 줄이야.

“농담이 아니야. 차라리 그 구역질 나는 새끼들이랑 온종일 부대끼는 게 낫겠다니까? 그럼 적어도 하루 정도는 훈련에 빠질 수 있잖아?”

신체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마법 계열 클래스라고 한들.

악크샨의 새로운 규율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악크샨을 재건한 ‘누구’께서도 겪어온 과정이었으니까.

넝마처럼 널브러진 단원들.

그들 사이에서 그래도 체면을 지킨 이들이 있었다.

키치와 울프였다.

“후우.”

수일째, 극한에 이르는 훈련을 반복했다.

육체는 이미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지만.

두 사람에겐 그보다 더한 명분이 있었으니.

그 자세의 차이일까.

두 사람은 애써 자세를 바로잡았다.

“느껴져, 단장?”

“응, 어느 정도는.”

“말끔하게 사라졌어.”

덕분에 느낄 수 있었다.

흐릿하지만, 콧잔등에 맴돌던 악마의 냄새를.

물론, 둘은 착각하지 않았다.

“대륙 전체에 냄새를 풍길 정도면 대체 어떤 놈일까.”

악마 사냥꾼으로서 자신들의 재능이 특출나서가 아니었다. 그저 풍겨오는 악마의 냄새가 알아차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을 뿐.

그런 두 사람에 락키드가 물었다.

“어이, 단장……. 아니, 이었던 놈들! 그래서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개고생만 하고 있어야 하는 건데? 아무리 영지가 넓다지만, 답답해 뒤지게 생겼다고!!”

클라우디의 영지는 광활했다.

이곳 별채에 전 그림자 용병단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저택의 모험가들은 알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답답하다는 건 변명이겠지, 락키드?”

드쉐브가 정곡을 찔렀다.

“그냥 술이 고픈 거잖아.”

“뭐? 안 닥쳐, 이 쥐새끼만 한 게.”

“너, 악크샨의 규율이 금주인 거 몰라?”

“뭐뭐뭣?! 그, 금주라고?! 진짜야, 단장?!”

울프가 키치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런 규율은 없는데 말이야, 역시 제대로 안 읽어본 거겠지?”

물론, 규율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 서열은 말석이지만, 누구도 쉽게 통제할 수 없던 락키드였다.

그런 락키드가 이런 훈련에 제대로 참여할 줄이야.

과거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울프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저 정도면 잘 지키고 있는 거지, 안 그래…….”

……단장?

답지 않게 조용한 키치에게 말을 덧붙이던 울프.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키치의 동공에 초점이 사라졌기에.

“!”

툭.

그대로 꼬꾸라지는 키치를 울프가 붙잡았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없었다면 붙잡지 못했다고 여길 정도로.

키치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 무게가 깃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키치의 그림자가 사라졌을 때부터 예상했던 바였다.

그러니 울프는 당황하지 않았다.

“단장, 괜찮아?”

“울프, 무슨 일인가?”

“뭔데, 갑자기? 힘들어서 기절한 건 아니지?”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챈 단원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그리고 이내, 모두가 알아차렸다.

클라우디의 영지.

아르카나 대륙과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모험가들의 언어로 [히든피스]이기에 잠시 간과하고 있었다.

울프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단장이 끌려갔다. 『그림자 회랑』이 열린 거야.”

*

한 걸음.

나는 당당하게도 활짝 열린 그림자 회랑 내부로 진입했다.

과연, 외관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그 내부도 웅장하다.

두 걸음.

무엇보다 연출에 상당히 공을 들였는데?

화륵.

내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밝혀지는 촛불들.

스멀스멀.

그 촛불에 요란하게도 일렁거리는 나의 그림자.

‘스산하다, 스산해.’

그리고 무엇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스템 메시지로 떠올랐던 나를 향한 그림자 신의 적대감까지.

그 모든 게 맞물려서 그런가,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복도 맞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건.

스윽.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오는 걸로 봐서는…….

아무리 그래도 손님 대접은 해주는 모양이구만?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솔직히 찝찝한데.’

그러나 이놈의 격식과 절차.

긍지 높으신 귀족으로서.

타인의 고용인에게도 적절한 격식을 갖춰 대해야 하는 법.

덕분에 나는 태연하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초대장의 기한을 지키지 못해 유감이군.”

……그래.

네 성격에 첫마디는 당연히 그거라고 생각했다, 그랑펠.

이유를 막론하고, 시간 약속에 죽고 못 사는 너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윽고, 다가온 형체가 정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전신을 검은 베일로 가리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온화한 여성의 음성이었다.

“그림자 회랑의 주인께서는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님께서 초대에 응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의 뜻을 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아니, 갑자기 튀어나오니까 적응이 안 되네.’

감사하다면 말이야.

풀네임으로 부르는 것부터 자제해 달라고 전해주면 안 될까……?

간절한 부탁이 목구멍까지 올라왔거늘.

“그럼 이제부터 정식으로 그림자 회랑의 규율에 관해 안내를 드리겠습니다. 이곳은 아르카나 대륙, 일반적인 장소와는 완벽히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장소로서…….”

나는 퀴즈라도 맞추듯 답했다.

“히든피스라는 건 이미 파악했다.”

“……네? 히든피스라니요?”

“기이의 언어이니 그대는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치졸하게 그런 걸로 자존감을 채우지 마라, 그랑펠.

아니, 자존감은 언제나 최대치라 굳이 채울 필요도 없으려나? 어쨌든, 고용인은 멈칫하면서도 그랑펠식 화법에 휘말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회랑의 초대장은 오직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님에게만 발송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자 회랑이 열린 지금. 회랑 내부에는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님을 제외한 ‘귀빈’들께서도 입장하고 계십니다.”

다른 귀빈들이라.

‘그럼 조금은 안심해도 되려나.’

누가 그림자 회랑에 발을 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법.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흘러나오려던 안도의 한숨은 흩어지고 말았다.

“고용인으로서 주제넘은 조언을 드리자면, 그 귀빈들을 예의주시하시길 추천드리겠습니다. 그림자 신을 섬기는 그림자 회랑의 규율에는 별다른 ‘제약’이 없기 때문이지요.”

제한이 없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눈앞이 반짝였다.

[당신에게 그림자 회랑의 규율이 적용됩니다.]

[1. 자유 결투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2. 현상금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3. 암투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그림자 신이 누구던가?

무려 아르카나 대륙 최악의 범죄집단.

그림자 용병단이 섬기는 신이다.

과연, 규율 한번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 예상했다.

자유 결투야 뭐, 치고받고 싸우는 거니까 이해가 필요하지 않았다. 현상금도 뭐, 오직 돈에 움직였던 그림자 용병단을 떠올리면 이런 규율이 존재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됐다.

그런데.

‘암투의 활성화?’

암투라니.

암투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때부터였다.

앞서 가던 고용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느껴지기 시작한 건.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웃는 얼굴에 살기를 숨기고 있어.’

당연한 말이지만, 클래스엔 한계가 존재한다.

내가 암살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타 클래스의 고유 스탯인 [예감]이나 [통찰]을 보유한 것도 아니고, 악마가 아닌 이가 품은 살기를 곧장 감지할 순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순간, 명백하게 느끼고 있었다.

화륵.

내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하나씩 밝혀져 가는 촛불들.

덕분에 서서히 드러나는 그림자 회랑의 풍경.

그 울렁거리는 그림자 밑에서 나를 노리는 수많은 기척을.

그렇다.

이건 내가.

나, 이호열이 느끼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랑펠이 불과 7세의 나이에 가문의 후계자로 선택된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클라우디 가문의 차기 가주로 선택되기까지.

그리고 가문이 몰락하는 날까지.

숱한 암투에 시달려 왔을 그랑펠.

그 사선에서 살아남은 그랑펠의 감각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숙련도가 70퍼센트를 넘어선 나, 이호열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었다.

암투의 뜻을 떠올려본다.

웃는 얼굴 뒤에 적의를 숨긴 채.

간교한 계략은 기본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제거하는 것.

그러니까 나는 고용인에게도 방심하지 않았다.

“문 너머부터가 사교장입니다.”

철면피를 고수하며 선수를 쳤다.

“과연, 그림자 회랑의 규율은 귀빈들뿐만 아니라 회랑에 머무는 그대들에게도 적용되는 규율인가 보군. 옳고 그름을 떠나서 공평하기에 적합한 규율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규율에 예외는 없어야 하는 법이니.”

“……!”

그 속내가 발각된 이상.

숨길 필요는 없다는 거겠지.

찰나의 순간, 그녀의 손에서 비수가 빛났다.

타닥.

이런 돌발적인 패턴까지 적정 레벨에 반영된 건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만, 어쨌든 그림자 회랑에선 누구의 말도 믿어선 안 된다는 건 확실하게 깨달았다.

스릉.

나는 귀철을 꺼내 고용인의 엄습을 되받아쳤다.

그리고는 다시금 확인했다.

나중에 가서 딴소리하면 안 되잖아?

“그렇다면 회랑의 주인 또한 규율에서 예외일 순 없겠군.”

그래, 호열아.

“누구든 그대들의 주인에게 전하도록 하라.”

아르카나 대륙과는 동 떨어진 그림자 회랑이다.

나를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풀네임 좀 내 입으로 내뱉으면 뭐 어떠냐?

“나,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가 그대의 귀빈 대접을 흔쾌히 받아들이겠다고.”

내가 그림자 회랑 입구부터 당돌하게 선언한 순간이었다.

오소소─

순간, 등골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초대장을 받지는 않았다만.

모종의 이유로 그림자 회랑에 입장했다는 다른 귀빈들.

그중에서.

‘……잠깐만, 저거?’

어째 익숙한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으니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보고 들었다는 거잖아?

나,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내가 내 입으로.

그 빌어먹을 풀네임을 내뱉는 걸……?!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현재 현상금 : 1,000 카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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