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2화. 지각이 아니다, 명분을 기다렸을 뿐
“한참 때려잡은 것 같은데.”
“아직도 바글바글하잖아?”
“임프라서 그나마 다행이야, 진짜.”
현실에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통하는 포탈이 열린 지도 한참.
플레이어들이 대거 합류한 연합군에는 다양한 클래스가 존재했다.
천하의 망직이라 불렸던 악마 사냥꾼조차 빛을 보게 된 지금.
“클래스가 [감별사]라고요?”
비전투직이라고 무조건 차별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전투직도 비전투직 나름.
꺼내 드는 돋보기.
치켜 쓰는 안경.
그녀에게 의심스러운 질문이 던져진다.
“그래서 뭐가 보이긴 보여요?”
“지금 저 의심하시는 거죠?”
“아뇨, 의심을 하는 게 아니라 저도 그렇고 제 친구들도 그렇고.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감별사]란 클래스를 만나봤어야 말이죠.”
클래스, [감별사].
비인기 비전투직 클래스 중에서도 소외당하는 클래스 중 하나였다.
단순한 능력을 떠나 감별사의 필요성을 느끼기 어려웠기 때문.
“솔직히 말해서 악마의 아이템부터 웬만한 아이템 감정은 마탑에서 가능하잖아요? 마탑 이용료가 너무 비싸다 싶으면 왜, 탐험가 연맹을 찾아가면 되고…….”
“경쟁 업체를 대놓고 언급하다니 섭섭한데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괜찮습니다. 전부 사실이니까요.”
감별사, 유메는 피식 웃었다.
전부 맞는 말이었다.
보물섬 고대 왕국 유스라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유메의 행동에선 적당한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고대 왕국, 유스라가 등장하고 보물섬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이템들을 감별하면서 저도 감별사 스킬 숙련도를 향상할 수 있었거든요. 그 과정에서……!”
슥.
전장에 흩뿌려진 잿가루.
잿가루에 돋보기를 대자 반짝거리는 시야.
[스킬, ‘감별’이 흔적에 남겨진 정보를 수집합니다.]
“이런 스킬 활용도 가능해졌고요.”
유메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정보들을 스킬, [필사]로 붙잡았다.
유메의 손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럼에도 의심의 눈초리는 가시지 않았다만.
저벅저벅.
그런 유메의 곁으로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사내가 다가왔다.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유메를 둘러싼 플레이어들이 멈칫했다.
“그래서 어디 밥벌이나 제대로 할 수…….”
“야, 야!”
“뭔데, 갑자기 호들갑……?! 헉.”
뱀눈이다.
차원이 다른 이호열을 제외.
남태민에 이어서 플레이어 랭킹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마창사, 히사기였다. 존재감만으로 웬만한 플레이어들을 움찔거리게 할 수 있는 거물의 등장.
그런데, 자신들이 방금까지 무시하던 감별사가.
그런 히사기를 바라보면서…….
“앗, 길마님!”
길드 마스터라고 부르고 있다?
“감별사님? 이나즈마, 아니, 거대 연합 소속이셨어요?!”
“아이고, 말씀을 하시지.”
“아오, 내가 무슨 소릴. 개 쪽팔려…….”
물론, 어쩔 줄 몰라 하는 플레이어들은 히사기의 관심 밖이었다. 히사기는 유메가 건넨 [감별 기록서 : 베히모스의 아가리]를 받아 들었다.
“먼저 살펴보세요, 길마님.”
“고생했습니다, 유메.”
히사기는 전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이엘이 남긴 총대장님의 전언.
그 명령을 따라 전장으로 나아가니, 그곳에 고귀한 파이몬은커녕 위협적인 악마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을 보고 베히모스의 아가리로 도망치기 바쁜 임프들로 넘쳐났다.
‘대체…….’
총대장님과 파이몬 사이엔 어떤 일이 있던 걸까?
“어, 왔냐.”
“하르콘 단장님, 여기 감별 기록서입니다.”
“말했던 모험가의 이능인가. 고맙네, 히사기.”
“어쭈. 이제 내 말은 아주 들리지도 않나 봐?”
발끈하는 남태민을 뒤로한 채.
성전 연합군 간부진은 감별 기록서를 동시에 읽어 나갔다.
제국군을 이끌었던 황궁 마법사.
내쉬 윌리엄의 마법이 한 건 했다.
“이러면 조금 더 잘 보이지 않을까요?”
두둥실.
허공에 떠오르는 감별 기록서의 문자들.
그러자 머지않아 차근차근 문장을 읽어나가던 이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리기 시작했다.
먼저 입을 연 건 남태민이었다.
“……감별사에 이런 잠재력이 있었어?”
비전투직 클래스를 꾸준히 지원하던 이유가 있었군.
인정하고 싶지 않다만, 히사기에게 한 수 배웠다.
물론, 감별 기록서는 해당 장소에 있던 사실을 그저 기록했을 뿐.
자세한 정황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근데, 뭐냐. 이 내용은……?”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
1. 대화의 흔적 (고차원의 언어로 해석 불가)
2. 베히모스의 아가리로 퇴각하는 악마의 족적 (의도 불분명)
3. 일순간 무력화된 악마 대군단 (원인 불분명)
──────
평소 같았다면 불분명하고, 해석이 불가하단 말에 의문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장에서 이미 한 차례 경험하지 않았던가?
뇌리 속에서 윙윙거리던 고차원의 언어를.
덕분에 빠르게 이해한 내쉬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총대장님께선 단순한 음성으로 아홉 번째 왕좌의 마왕인 파이몬을 마계로 되돌려보내시고, 그 어마어마했던 대군단을 무력화시키셨단 겁니까?”
누구보다 당황한 건 드워프, 체인워커였다.
“백 번 양보해서 마왕이 도망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악마들에게 전우애라는 게 있기는 하겠나? 승산이 보이지 않으니, 병력을 두고 도망갈 수 있다는 거야. 하지만 그 다음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걸친 장비는 우리가 만든 장비와 비견될 정도였네!”
드워프제 방어구의 성능? 웬만한 마법은 그대로 반사하며 물리적 충격에는 내성이 몇 배나 더 강하다. 오죽하면 적의 무기가 산산조각이 나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한데, 그 모든 게 허상처럼 사라졌다네. 흔적도 없이 말일세.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겠군. 결국, 총대장께서 이번에도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내신 걸세.”
이전 같았으면 막연하게 기뻐했으리라.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
전장에 흐르던 절멸의 기류를.
그러나 가장 먼저 그 냄새를 맡았던 하르콘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하이엘이 전해온 전언.
-“나는 그대들을 믿고 있다.”
그 말씀이야말로 자신이 알고 있는 총대장.
호열 경이 틀림없다는 증거였기에.
믿기지 않아도 믿겠다 다짐했다.
물론, 당사자의 생각은 달랐지만.
찰나였다.
또각.
구두소리와 함께 호열이 모습을 드러낸 건.
“……!!!”
당황한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호열이 입을 열었다.
“그대들에게 전해야 할 중대사항이 있다.”
그 고고한 긍지에 따라 무엇 하나 숨기지 않기 위해서.
*
그래, 네가 봐도 심했다 싶은 거지 그랑펠?
‘아주 그냥 생난리를 쳤으니까.’
철면피와 양심이 없는 건 미묘하게 다르다.
이번에는 마냥 긍지를 넘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잖냐?
그러니까 나는 솔직하게 고백할 생각이었다.
‘딱히 하기 어려운 말도 아니니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각성했다.
그 능력을 다루는 과정에서 미숙함이 있었다.
그러나 우려할 것 없다.
이 성질머리…….
아니, 재능이라면 머지않아 능숙하게 사용할 테니.
그렇다.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누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냐?
막말로 나랑 그랑펠, 우리가 그동안 해온 게 얼마인데.
그러나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대들도 알고 있듯.”
……앞으로도 내 입방정은 바람 잘 날이 없겠다고!
“나의 어둠이 날뛰었다.”
뭐, 뭐라고?
어둠이 날뛰어어어어어?!
세상에 똑같은 말을 해도.
어떻게 그렇게 낯 뜨겁게 할 수 있는 건데?!
뭣보다 저 표정들을 좀 봐라.
다들 단어선택에 엄청나게 놀란 눈치들이잖아?
그러나 그랑펠식 화법이 언제는 청자를 배려했던가.
“어둠, 오직 나만이 통제할 수 있는 어둠이었거늘.”
그리고 나를, 화자를 배려했던가……!
‘아뿔싸.’
애초에 찾아온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온전히 통제하기 위해선 숱한 발버둥이 필요한 법.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자리를 비울 수 있으니. 이번에는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게 실책이었다.
나, 이호열의 오만함이었다……!
그러나 나의 간절한 내적 호소에도.
멈추지 않는 주둥아리.
“밤이 유달리도 깊었던 탓이겠지.”
……아주 그냥 오늘 날을 잡았구나!
‘근데 또 마냥 틀린 말은 아니야.’
유달리도 깊었던 밤을 시궁창 같은 상황에 비유하면…….
내가 어둠을 통제할 수 없던 이유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됐으니까.
그런데.
‘그걸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겠냐고.’
무슨 수능 문학 문제 푸는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시달리는 나도 가끔은 이해할 수가 없는 그랑펠식 화법이었거늘.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째 다들 갈수록 표정들이 풀리기 시작한다……?
하르콘이 작게 읊조렸다.
“기우였습니다. 당신께선 평소와 다를 바가 없으시거늘.”
평소와 다를 바 없다고?
하르콘 경.
그거 설마 그랑펠식 화법으로 돌려서 욕하는 건 아니지?
되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건만, 나는 꾹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괜한 소리를 했다가는.’
흑암룡이 날뛰었다, 한없이 깊은 어둠이 도졌다, 뭐다…….
더한 소리를 지껄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리고 그럴 여유가 없기도 했고.
나는 좌중에서 시선을 옮겨 인벤토리를 바라봤다.
유달리 반짝거리는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했다.
그와 동시에 섬뜩한 메시지가 점멸한다.
[그림자 회랑의 초대장]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히든피스, 그림자 회랑에 진입 가능]
[설명 : 그림자 신의 초대장이다. 소지한 자는 그림자 회랑에 도달할 수 있다. 빛이 있는 곳에도, 어둠만이 가득한 곳에도 그림자는 존재하니. 그림자의 초대를 외면할 순 없으리라.
회랑이 열리기까지 앞으로 : 기한이 경과되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아니, 나도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지.’
제시 하인네스가 우르스와 시공간의 결투를 벌이고 쓰러졌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쉴 새 없이 바빴다. 그림자 신의 초대장을 생각할 여유 따윈 없었다.
더욱이 마지막엔.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아르카나보다 느린 현실 시간이라고 해도 기한을 훌쩍 넘겼거늘.
[히든피스, ‘그림자 회랑’이 여전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탓에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야 초대장을 보낸 그림자 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메시지를 통해서 이미 확인했잖냐?
[그림자 신과의 우호도가 최저치에 도달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곱게 보이지 않는 상대가 시간 약속도 어겨버렸다라……. 이거 보나 마나 잔뜩 벼르고 있겠군. 솔직한 심정 같아서는 말이야.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저 하늘에 불길하게 떠있는 그림자 회랑에 진입하겠냐? 하지만 내뱉었다면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그랑펠의 성질머리를 떼어두고 생각해 봐도…….
‘……나쁘지 않겠는데?’
썩 괜찮은 견적이 나왔다.
왜, 과거엔 그림자 회랑에서 얻을 게 없을지도 몰랐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폭주를 온전히 제어해내야만 했으니까.
‘그림자의 회랑엔 누구도 다가갈 수 없었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장소라는 의미.
다르게 말하자면 만에 하나 내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통제하지 못하고 폭주한다고 하더라도, 그 영향이 아르카나 대륙이나 현실에 퍼질 위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상.
고민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발길을 옮겼다.
“말했듯 패잔병은 그대들에게 맡기겠다.”
“그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총대장님.”
고개를 숙여 배웅하는 성전 연합군을 뒤로한 채.
나는 천마군림보를 내디뎠다.
한 걸음에 시야가 바뀌더니, 그림자 회랑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여전히 형편없는 건축양식이다.”
역시, 건축마법의 창시자로서 독설로 시작하시는군.
.
[그림자 회랑의 초대장이 접수되었습니다.]
메시지가 떠오르자 비로소.
신기루처럼 흐릿하던 그림자 회랑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히든피스 : 그림자 회랑]
[붕괴도 : 100%]
[적정 레벨 : 2,000~3,000]
나는 또 한 번 후회하고 말았다.
저, 적정 레벨이 2천에서 3천이라고?
감히 장담하겠다.
이 세상에 적정 레벨 2, 3천짜리 히든피스에 스킬 연습을 하려고 진입하는,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은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을 통틀어도 나밖에 없을 거라고……!
물론, 그런 나의 경악과는 무관하게 구둣발은 움직였다.
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