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1화. 비로소 여명
뭐가 이렇게 반짝거리냐……?
시야를 어지럽히는 시스템 메시지들.
어둠의 이해도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숙련도 대폭 상승 알림. 그리고 폭주를 알리던 메시지 말고도 상당한 양의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시선을 돌릴 새는 없다.
눈앞에 파이몬이 있다.
베히모스의 아가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녀석의 군세가 있다.
이미 어마어마한 숫자의 병력이 아르카나 대륙으로 넘어왔거늘.
그 행렬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물량보다 두려운 건 파이몬이었다. 어지러운 메시지 중에서도 유독 존재감을 드러내는 메시지.
[아홉 번째 왕좌의 마왕, 고귀한 파이몬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아무리 견적을 내봐도 승산이 보이지 않는다.
구마의식을 발동한다고 해도.
사좌(四座), 가미긴에게서 습득한 천마군림보를 내디딘다고 해도.
당장 파이몬과 군세를 막아낼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더 의문이네, 이거.’
대체 나 어떻게 살아있는 거냐……?
보다 넓게 전장을 둘러보자 성전 연합군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위치는 베히모스의 아가리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아직 파이몬과는 조우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도움을 바랄 수 없겠지.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뿐.
숙련도가 급상승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폭주.
나는 그 폭주 덕분에 이렇게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거였어.
‘그런데 정작 폭주는 끝나버렸고.’
아니, 폭주할 거면 조금만 더 폭주하지 그랬냐?
어떻게 파이몬이 무리라면.
저 병력까지만 처리를 해주고 자제를 하든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하나하나가 보통이 아니야.’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덕분에 습득한 모든 광물에 관한 지식. 덕분에 파이몬의 병력이 착용한 장비들이 범상치 않다는 걸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 드워프들조차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한 광물로 장비를 도배했다니. 파이몬이 대단한 건지, 마계라는 땅덩어리가 금싸라기 땅인 건지, 알 방법이 없다만.
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무의미한 치장이구나.”
정말이지, 한마디도 지지 않으시는 입방정이다.
“지옥의 불 앞에서는 모두 녹아내릴 테니.”
내뱉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다.
첫 세계수의 축복 덕분에 무한에 가까운 마력은 십좌에 오르며 또 한 번 격을 초월한 덕분에 그 효율은 나도 가끔씩 흠칫할 정도.
‘하지만…….’
수십만은 가뿐히 넘을 것 같은 저 병력을 막아낼 수 있을까.
[천적관계]는 발동 중이다만.
역시 확실히 들지 않았다.
‘게다가 마력을 낭비할 순 없어.’
군세는 어디까지나 군세일 뿐.
진짜 문제는 자칭 고귀하시다는 파이몬이었으니까. 저 눈빛으로 보았을 때 한눈을 팔았다가는……. 잘못했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나의 우려와 무관하게도.
스윽.
나는 다시금 전투를 준비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폭주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싸웠는지는 알 수 없다만. 지금의 내가 해야 할 일은 간단했거든.
언제나 그랬듯 처절한 발버둥이다!
머릿속에서 기이를 조합해 본다.
일단, 머릿수부터 맞춰야 하지 않을까. 지옥의 악크샨 선배님들에게 손을 빌리고, 드래곤 로드가 된 흑암룡도 실체화시키고, 하이엘에 디엔드, 그리고 템페스트까지…….
머리로는 구질구질하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건만. 내뱉는 말은 더없이 간결하고, 도발적이 짝이 없었으니.
“과연, 열등한 족속답게 인내심이 부족하구나.”
제발 좀……!
“분명, 내 친히 마계로 내려가겠다고 말했거늘.”
마계로 가겠다.
틀린 말도, 하지 않았던 말도 아니다.
근데 말도 때와 장소, 그리고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지.
잔뜩 화가 난 파이몬에게 저런 말을 내뱉으면.
성질을 더 돋우기밖에 더 하겠냐고…….
“그대여. 그 말을 증명할 수 있는가?”
순간, 나는 멈칫했다.
‘잠깐, 그냥 흘러가는 메시지가 아니었던 건가?’
파이몬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
그 메시지의 뜻을 곧장 이해했다. 파이몬의 황금빛 동공이 내 전신을, 내면을 훑어보는 듯한 기분이었거든. 정확하게는 내가 내뱉은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했다.
나는 대담하게 생각했다.
‘제발 좀 확인해 봐라.’
가끔은 나도 궁금하다니까?
입방정이 진짜로 자신감이 넘쳐서 내뱉는 건지, 아니면 자동반사적으로 내뱉는 건지……! 물론, 그런 나의 의구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뭔데, 갑자기?
마치 언제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때가 있었냐는 듯 파이몬의 얼굴이 온화하게 변해 있었다. 비로소 이해가 된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스템 메시지가 어째서 파이몬을 고귀하다고 칭했는지를.
악마라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고귀한 용모다.
‘심미안으로 봐도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
악마.
그중에서도 격이 다른 상위 마왕이라는 것만 빼면 어쩌면 그랑펠과 말이 잘 통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니까 더더욱 의심스럽다.
어째서.
“그렇다면 연회는 이쯤에서 마치도록 할까.”
파이몬은.
“그들의 처분은 그대에게 선물로 맡기지.”
제 발로 순순히 마계로 되돌아간 걸까?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나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마계로 가겠다는 말이 사실이란 걸 알아차려서.’
그러니까 간담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파이몬, 녀석의 목적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으니까. 그렇다. 파이몬은 아르카나 대륙을 집어삼키려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니었다.
‘단순하게 나를 위해서였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파이몬은 곧바로 사라졌다.
그러자 녀석의 군세에 변화가 생겼다.
“파이몬 님……?’
“나의 왕, 고귀한 파이몬이시여!”
“제 부름에 응답하소서, 서부의 전왕이시여!!”
“으으으, 제 보잘것없는 육신이……!!”
하나하나가 초정예였던 파이몬의 병사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근육이 흘러내려 볼품없는 피골이 훤히 드러난다.
착용하고 있던 드워프의 무구와 견줄 만한 장비들도 실시간으로 그 빛을 잃기 시작했다. 깡통처럼 변해갔다.
‘그런 능력이었나.’
아무리 상위 마왕이래도.
이건 밸런스 붕괴다 싶었지.
마계에 그런 자원이 넘쳐나면 뭣 하러 다른 세계를 침공했겠냐고. 군세는 오직 파이몬의 영향으로 강성해졌던 것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나니까 파이몬이 더더욱 대단해 보인다는 부작용이 있기는 했다만.
‘어쨌든, 어떻게든 넘겼나.’
나는 파이몬의 선물을 바라봤다.
낙오된 병사들로 그 숫자는 대략 십만.
그러나 파이몬이 사라진 지금, 이전과도 같은 위엄은 없다.
임프가 대부분이니까, 평균 레벨로 따지자면 기껏해야 300레벨은 되려나.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성전 연합군 선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겠지.
‘그나저나.’
이거 또 막막하구만.
마계를 밟는 건 어차피 예정된 일이었다. 파이몬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들.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그랑펠 님께선 제 발로 마계를 찾아갔을 테니까.
물론, 내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욱이 확인했으니까.’
구좌(九座) 파이몬.
그 등장만으로 아르카나 대륙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존재. 저런 걸 대륙이나 현실에 불러들일 바에는 내가 가는 게 낫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으니.
물론, 그 속내를 여전히 짐작할 순 없었다. 애초에 우리가 언제 봤다고 말이야. 마계에서의 재회를 확인하면서 흔쾌히 물러설 수 있는 거냐고.
‘어쨌든, 휴식은 개뿔. 더 박차를 가해야겠군.’
보통 마계도 아니고 파이몬이 잔뜩 벼르고 있는 마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욱 성장해야만 했다. 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바라봤다.
‘뜻하지 않은 숙제도 풀어야 하고.’
[어둠의 이해 (저주) : 적합한 마력 친화력을 대폭 상승시켜 준다. 단, 적합한 마력의 원천이 되는 과거와 직면해야만 한다. - 현재 적합한 마력 친화력 : 70%]
[천상천하 유아독존 (70%) : 불세출, 여신조차 모독하는 희대의 천재.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재능을 발휘한다.]
무려 30퍼센트가 급상승.
‘폭주’라는 부작용까지 알게 된 지금.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통제하기 위한 연습이 필요했다.
물론.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
이해도가 대폭 상승하게 된 원인.
『클라우디의 원죄』
여러모로 정말로 되돌아보고 싶지는 않다만, 클라우디가 아르카나 대륙에 남긴 발자취도 제대로 파헤쳐봐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뭣보다 막막한 건 그래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였다.
달라진 전장의 기세를 포착한 거겠지. 아이언 캐슬 호, 그리고 성전 연합군이 전장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서 생각해 본다.
폭주 상태라 그 과정이 어떻게 된 건지는 당사자인 나도 짐작할 수 없다만, 결과만 본다면 누가 봐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승리.
쉽게 말하자면…….
언제나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승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뻔뻔할 수밖에 없는 이 파멸을 부르는 주둥이가 나불거릴 시간이라는 것이다.
“하이엘.”
나의 부름에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하이엘.
어째, 오늘따라 고개를 유달리 더 푹 숙이는구나.
이유는 모르겠다만, 나는 언제나처럼 말했다.
“전하거라.”
“전하겠습니다, 주군.”
“패잔병의 처리는 그대들에게 맡기겠다.”
나는 덧붙였다.
“그대들을 믿고 있기에.”
임프 정도야 충분히 사냥할 수 있겠지, 뭐.
“……!”
하이엘이 한 차례 흠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올리고 답했다.
간만에 하이엘의 입꼬리가 조금이지만.
선명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 뜻을 따르겠습니다, 주군.”
*
어지러웠던 시스템 메시지들.
그리고 요란법석한 기사들.
마지막으로.
[읽지 않은 메시지 수 : 999+]
혈육들과의 단톡방까지.
뒤늦게 되돌아보는 폭주의 경과는 심히 가관이었다.
현실에 떠오른 마안을 전부 터트려 버리질 않나, 혼혈의 악마를 짓밟질 않나.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행적이었다.
‘물론, 나도 포함이다.’
전성기 그랑펠의 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게 와닿는다.
만약 내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제어하지 못한 채.
다시 폭주 상태에 빠지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데.’
[행운]에 스탯을 투자한 덕분인지.
뭣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만…….
뒤늦게 확인하는 결과엔 적잖은 우연이 반영되어 있었다.
‘다음에도 우연에 기댈 순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있었다.
‘어쨌거나 내가 어둠의 이해 속에서 사투하는 동안.”
그랑펠, 네가 나를 살렸다는 것.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파이몬과 맞설 능력 따윈 없거든.
그러나 마냥 고마워하지만은 않을 거다.
네가 현실에서 나를 살렸듯.
‘나도 과거에서 나를 살렸으니까.’
그리고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더 있겠지.
슥.
나는 슬그머니 웬수, 이예림의 톡을 확인했다.
“누님…….”
아련하게 말하지 마라, 그랑펠.
나는 저 웬수의 톡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치솟아 올랐으니까.
또각.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긴다. 그러고는 옷매무새를 다듬을 때 사용하는 전신 거울 앞에 멈춰 섰다. 그랑펠의 예리한 심미안을 언급할 것도 없다.
이호열의 눈으로 봐도 그냥 보인다.
여전히 찰랑거리는 장발의 머리카락이……!
그렇다.
상승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영향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더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다만…….
내 머리카락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이예림의 톡을 확인했다.
-야, 이호열
-너 그거 붙임 머리냐???ㅋㅋㅋㅋ
-얼마 주고 붙였냨ㅋㅋㅋㅋㅋㅋㅋ
……여러모로 시련이 끝나지 않는구나,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