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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60화 (460/489)

◈ 460화. 새벽, 가장 어두운 시간 (4)

나, 이호열. 솔직하게 자신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걸 뛰어넘는 상황을 반전하기 위해선 반드시 전성기 그랑펠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숙련도 상승을 위해 저주, [어둠의 이해]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내가 이럴 줄 알았겠느냐고……!

눈앞에 동영상처럼 펼쳐져야 할 그랑펠의 과거가 뚝뚝 끊겨 있었다.

노이즈가 가득한 것도 모자라서.

무언가 보이려나 싶으면?

버퍼링이라도 걸린 것처럼 느려졌다가 빨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을 답답해하는데.

‘……생각해 보니까.’

이럴 만한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그렇다.

이 시간대는 내가 아르카나 대륙 전기를 통해 경험하지도.

그렇다고 구체적인 설정을 적어놓은 시기가 아니었으니까.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그런 건가.’

가세가 급격하게 기운 탓.

내가 좋으나 싫으나 중2병을 극복하고.

아르카나 대륙 전기도 덩달아 접었던 시기.

그러니까…….

그랑펠이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후의 시간대는 내 흑역사를 샅샅이 뒤져봐도 뭔가 유추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짐작은 된다.’

끊겨있는 저주의 풍경.

그것만으로 어떻게 짐작을 하냐고?

내 눈치가 빨라서만은 아니었다.

그렇다, 이번에도 빌어먹을 악크샨이다!!

그 시절.

악마 사냥꾼의 일과라고 해봤자 뭐가 있겠냐?

‘심지어 악크샨이 망한 지금도 한결같은데.’

허구한 날마다 한계로 치닫는 체력 단련에.

단순 노동 퀘스트에.

정말 간혹가다가 구마의식 퀘스트나 수행하는 거였겠지.

‘갑자기 긴장이 확 풀리네, 이거.’

왜, 이번 [어둠의 이해]에 진입하기 전에 나름대로 진지한 각오를 마쳤던 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김이 빠지는 그랑펠의 과거를 목격하게 될 줄이야.

‘……잠깐, 이러면 계획도 나가리 아닌가.’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어둠의 이해로 진입했다.

그 덕분에 시차는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만.

문제는 시차가 아니다.

헛수고를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게 문제지.

과거에서 무언가를 알아내야 그랑펠에 관한 이해도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숙련도도 챙길 수 있을 터.

‘이래서야 챙길 수 있으려나?’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고 한들,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막말로 이번 어둠의 이해에서 성과를 얻지 못하면…….

‘각오해야 한다.’

고의적으로 상태이상, [흑화]를 발동.

그랑펠에게 모든 걸 의존해 위기를 극복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내가 진지하게 플랜 B를 떠올리던 순간이었다.

문득, 흐릿하기 짝이 없던 그랑펠의 시야에.

나를 멈칫하게 하는 ‘무언가’가 비쳐왔다.

클라우디 가문의 상징.

은빛의 머리카락.

당연한 말이지만, 그랑펠의 머리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뻔하겠지.’

클라우디가 절멸한 시점.

은빛 머리칼을 가진 이는 그랑펠을 제외하고 단 한 명.

아니, 한 녀석밖에 없었으니까.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나의 아우여.”

클라우디의 배신자, 칠죄종 오만.

그나마 면식이 있는 인물이라서 그런가.

노이즈가 천천히 걷혀갔다.

뚝뚝 끊기던 풍경도 이 부분에서는 부드럽게 이어졌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고풍스러운 장식들.

하인들로 북적거리는 내부.

‘어디 높으신 분의 저택인가?’

그런 곳에서 그랑펠은 치렁치렁한 악마 사냥꾼의 의복.

그리고 악크샨제 은제 무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구마의식 퀘스트 도중이었군.’

그랑펠은 임무 도중 저 녀석과 마주친 거다.

정확하게는 녀석이 그랑펠을 기다린 거겠지.

그렇다면 여긴 녀석의 함정 속.

이 저택도 단순한 저택이 아닐 터.

‘젠장.’

나 이호열의 머리로도 아는 걸.

여신조차 능가할 두뇌를 가시진 그랑펠 님께서 모를 리가 없으시겠지. 근데, 우리 그랑펠 님께선 악마 앞에서 물불을 가리시는 분이 아니시거든.

가문의 원수인 악마에게는 더더욱……!

스릉.

그랑펠이 오만, 녀석을 향해 쇄도한다.

“성급하구나, 그랑펠.”

과연, 내 예상은 적중했다. 그랑펠이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도, 악크샨에 몸을 담았다는 걸 알면서도, 제 발로 그랑펠을 찾아온 프라이드였다.

고오오오.

과연, 저택 전체가 함정이다.

내 예상을 배신하지 않는구나.

곧바로 저택에 새겨진 마법진이 발동한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가엾은 목숨들이지 않느냐?”

가엾은 목숨.

“으, 으아아아악!”

저택의 시종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시종들의 동공이 검게 물들었다.

그쯤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저주받은 저택의 악마에게서 시종들을 구원하라.

만약, 퀘스트였다면 그런 목표가 갱신됐겠지.

처음부터 모든 게 녀석의 계획이었단 것.

하지만 악마 사냥꾼의 공격은 오직 악마에게만 피해를 주는 바.

그랑펠이 멈출 리가 없다는 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과연, 그에 관해서도 대책을 세웠단 건가.

“악크샨은 인간과 악마, 그 다름을 구분할 수 있다지?”

쾅.

프라이드가 지껄이자 저택의 문이 부서지고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 귀족 가문의 사병이라고 하기엔 그 차림새가 자유분방했다.

“잡아서 죽여라!”

“헤헤. 금 덩어리다!”

“비켜, 녀석의 목은 내 거다!!”

용병이군.

악마에 빙의당한 하인들과 단순히 돈에 눈이 먼 용병이 뒤섞여 내게 달려든다. 나는 그쯤에서 생각했다. 내가 아는 그랑펠이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검을 휘두를까?

‘솔직히 모르겠는데.’

그랑펠은 자비롭다.

그랑펠은 자비롭지 않다.

머릿속에 상반된 생각이 충돌한다.

그러나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말했었잖냐, 그랑펠?

뭐가 됐든 복잡하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뭐가 됐든 실현해 내면 되니까.’

나는 감각을 곤두세웠다.

[집념이 근력으로 환산됩니다.]

[집념이 민첩으로 환산됩니다.]

스킬, [천적관계]는 이미 발동 중.

나는 뒤섞여 달려드는 인간과 악마를 감각만으로 구분해 냈다.

그리고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확실히 옛날 같았으면 곤란했겠는데.

‘단순한 검격으로는 효율이 떨어지니까.’

힘 조절도 어렵고 말이지.

하지만 그림자 신의 사도와 합을 겨루며 습득한 수준 높은 대인전 기술들이 있었다. 사각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회피하고 그대로 되돌려준다.

“크앗!”

“뭐, 뭐가 이렇게 빨라?”

“이게 악마 사냥꾼이라고……? 날 속였겠다!”

“다, 다리. 내 다리가!”

“사, 살려줘……!”

하인들에게 빙의한 악마는 그대로 숨통을 끊어놓고, 단순하게 돈을 좇아서 움직인 용병들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근육을 베는 선에서 그쳤다.

그때였다.

“훌륭하다, 아우여.”

프라이드가 나를 보고 지껄였다.

나부터가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아우라고 하는 게 굉장히 거슬렸거든.

당연하지 않겠냐?

나, 이호열.

이미 누나만 셋인 이씨 집안의 막내로서.

새로운 형님을 모시고 싶은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거늘.

‘내가 마음 같아선 말이야.’

벌써 몇 마디 했을 텐데…….

사냥감과는 말을 섞지 않는 자세.

지금은 재잘재잘 떠들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쩌면 이건 기회다.’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시간선.

과거를 바꾸면 현실도 바뀐다는 사실을.

과거에서 칠죄종 오만, 녀석을 사냥해낸다면?

나는 현실에서 짐 하나를 덜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더더욱 가속했다.

고오오오.

저택 곳곳에 새겨진 마법진이라.

나름대로 공을 들여 함정을 준비한 모양인데 말이야.

그런 마법으론 내 치렁치렁한 옷자락도 스칠 수 없다.

『반전 마법』.

그랑펠의 찬란한 재능.

그저 목격하는 것만으로 마법진의 간섭 과정을 완벽하게 이해. 그걸 역순으로 발현해 반전한다. 발현을 억제하는 걸 넘어서 그런 마법진을 새긴 발현자의 마력을 추적.

“……으, 으아아아악!”

다른 개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마나 번(Mana Burn)까지 발현.

마력을 그대로 증발시켰다.

쉽게 말하자면…….

이제 나와 오만.

녀석을 가로막을 걸림돌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검을 바로 세웠다.

척.

대충 상대하고 싶지 않았거든.

사실 여태까지 마주한 악마나 마왕들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지만, 너만큼은 얘기가 좀 다르다.

‘너는 반드시 내 손으로 사냥한다.’

내가 끄적거린 클라우디의 설정인 먼저일까. 우연의 일치를 넘어선 운명의 장난으로 클라우디 가문의 잔혹사가 내게 중2병으로 찾아온 걸까.

‘글쎄.’

아르카나 대륙이 먼저인가.

아르카나 대륙 전기가 먼저인가.

그 논쟁은 전 세계 석학들도 답을 내놓지 못했으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프라이드, 네게 갚아야만 할 빚이 있다는 거.

‘그랑펠의 몫까지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타닥.

전력을 다해 땅을 박찼다. 방심하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언제나와 같은 호흡으로 검강(劍罡)을 발산. 녀석의 목을 그대로 절단할 생각이었다.

“역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그랑펠.”

그래.

“진정 『클라우디의 원죄』를 망각한 것이냐?”

그따위 말이 듣기 전까지는.

악마는 간사하다.

더욱이 자신의 가문을 악마에게 팔아먹은 새끼의 말은 얼마나 간사하겠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프라이드의 말 따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리고 내가 아는 그랑펠이라면, 저런 말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았어야 했다. 벌레만도 못한 악마의 지껄임이 귓가에 들릴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나는 정말로 너를 4할밖에 이해하지 못했나 보구나, 그랑펠. 클라우디의 원죄. 그 단어가 입에서 나오기 무섭게 그랑펠의 발이 멈췄다.

검이 녀석의 목젖에 닿고도 남을 간격이었거늘.

“정말로 잊었다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상태이상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랑펠이 스스로 움직임을 멈춘 것이었다.

그런 그랑펠에게 프라이드가 비아냥거렸다.

“무엇이 너를 망각하게 만든 걸까?”

상당히 재수 없는 면상.

“무엇이 천하의 그랑펠을 그리 만든 걸까?”

이윽고, 그 번들거리는 눈빛이 ‘나’를 향했다.

“그날, 네게 비췄던 그 ‘한 줄기의 빛’일까?”

그날이라면…….

클라우디가 멸문당하던 그날이었다. 나는 그날, [어둠의 이해]를 통해서 그랑펠을 구원했었다. 아마, 프라이드 녀석도 그날 무언가를 알아차렸던 거겠지.

나는 순간, 위기감을 느꼈다.

‘위험할지도.’

그 순간, 감각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눈앞이 흐려지고 과거와 현재.

구분이 불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젠장, 이런 타이밍에……?

[저주, ‘어둠의 이해’ 이해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스킬,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그랑펠의 과거가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노이즈가 다시 심해지고.

녀석의 움직임이 뚝뚝 끊기기 시작한다.

‘대체 클라우디의 원죄가 뭐길래.’

그 단어를 들은 것만으로 이해도와 숙련도가 전례에 없던 수준으로 대폭 상승한 건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모든 게 네 계획대로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랑펠은 혼자가 아니거든.

과거에는 온전한 악크샨이.

현재에는 성전 연합군이.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대에는 내가.

나, 이호열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을 거니까.

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물어라, 템페스트.”

“아우우우우─”

저택 밖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악크샨 늑대가 하울링으로 화답했다.

“……그런가.”

그러자 프라이드, 녀석의 눈동자에 확신이 깃들었다.

녀석이 연기처럼 흩어지며 말했다.

“알게 되었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가지.”

그러냐?

그럼 피차일반이군.

나도 확실하게 알았거든.

네 녀석이 어떤 존재인지를.

‘그러니까 다음에 마주치면 끝을 보자고.’

밝아지는 시야 속에서 나는 메시지를 목격했다.

[대폭 상승한 숙련도의 부작용.]

[스킬, ‘천상천하 유아독존’ 폭주합니다.]

[스킬,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폭주가 중단됩니다.]

……잠깐만.

폭주?

내가 폭주 중이었다고?

.

.

.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밝아지는 시야를 부여잡았다.

그래.

뭐가 됐든 다 좋은데 말이야, 그랑펠.

내가 어둠의 이해에서 발버둥 치는 동안 무슨 짓을 했길래.

내 눈앞에 아홉 번째 왕좌의 마왕.

파이몬이 있는 거냐?

그리고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파이몬.

저 자식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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