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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59화 (459/489)

◈ 459화. 새벽, 가장 어두운 시간 (3)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대는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는구나.”

파이몬의 음성은 오직 호열에게만 전해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화신도, 분신도 아닌 실체. 아득할 정도로 드높은 격은 설령 기이의 영역에 도달한 이라고 한들, 말조차 섞을 수 없는 경지.

-□□□ □□ □□□□□…….

육안으로는 파이몬의 군세가 보이지 않는 거리.

들리는 건.

오직 윙윙거리는 뇌리에 울리는 정체불명의 소리뿐.

“뭐야, 이게?”

모두가 고막을 붙잡은 와중이었다.

“역시, 못 알아먹겠네요.”

“……제시 하인네스 양?”

“뭐야,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방금이요.”

뒤늦게 성전 연합군 거대 연합 측에 합류한 제시도.

그녀의 머리 위 고깔모자도.

그저 우려스럽게 상황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파이몬은 그 정적이 나쁘지 않았다.

“나름대로 예의를 갖췄구나.”

공포.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등장에 걸맞은 감정이었으니.

이내, 파이몬이 장신구를 치렁거리며 팔을 들어 올렸다.

목소리는 필요치 않았다.

[파이몬의 군세가 개전을 준비합니다.]

아홉 번째 왕좌의 마왕.

허나, 군세를 대동한 파이몬의 강함은 바알을 제외한 십좌들과 비교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그를 증명하듯 파이몬의 군세는 악마답지 않게 전쟁에 임했다.

철컥.

군세는 섣부르게 날뛰지 않았다.

차분하게 왕의 명령을 이행했다.

심혈을 기울여 활시위를 당기고.

냉정한 호흡으로 다시금 놓았다.

푸슈슈슈슉.

이윽고 하늘을 뒤덮는 무수한 화살 비.

위이이이잉.

거너는 황급히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전투기는 웬만한 물리적 충격은 가뿐하게 튕겨낼 수 있었건만.

저건 이야기가 다르다.

‘……화살의 개수를 떠나서.’

화살촉의 위력이 차원이 다르다.

‘하나하나가 투석기에 버금가는 위력이야!’

타고난 대장장이 종족의 식견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들의 무장이라면, 저 정도의 예리함이라면, 화살촉은 강철 갑피 따위는 우습게 뚫어버리리라고.

거너는 급상승하며 호열을 바라봤다.

“내가 그대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총대장?”

호열에게서 눈을 돌린 거너는 전황을 살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공간을 도약해 나타날 아이언 캐슬 호를 위해 실시간으로 전황을 전달했다.

“베히모스의 아가리, 이곳엔 화살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다! 유감이지만, 아이언 캐슬 호의 갑피라고 해도 저 화살비를 당해낼 순 없을 듯싶다. 어쩌면 아이언 캐슬 호는 고슴도치가 될지도 모르겠지.”

치직.

“그러나 그보다 우려되는 건 지상의 성전 연합군이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제국군. 그리고 모험가가 합류했음에도 그 숫자는 고작 일만에 불과한 반면…….”

치직.

“파이몬 군단의 행렬은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대충 헤아려보아도 족히 오십만에 육박한다. 물론, 우리들의 총대장께서 이곳에 나타나시긴 했지만…….”

치직……?

총대장, 그 말에 체인워커의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총대장께서 그곳에 계시다고?

“그렇다.”

-거너, 자네 당장 그 자리에서 물러서게!

거너는 귀를 의심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더러 지금 후퇴하라는 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가?

아까보다 더욱 희미해진 마력석의 빛.

작은 드워프의 한목숨을.

성전 연합군의 미래를 위해 쓰겠다고 다짐했다고.

물론, 상황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드디어 파이몬이 실체를 드러냈지만, 그의 군단은 여전히 끊일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거너는 마법에 관해선 문외한이었다. 호열의 마력이 먼저 바닥날지, 무한에 가까운 파이몬의 군세가 먼저 전멸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려가 되겠지. 하지만 확실히 전황은 나아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호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보다 더한 반격의 불씨는 없겠지.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거너는 흠칫했다.

체인워커의 다급한 목소리.

-그러니까 휘말리기 싫으면 당장 빠져나오게!!

“?!”

그 목소리가 워낙 다급했기에.

거너의 육체가 먼저 반응했다.

머리로는 여전히 체인워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종대를 붙잡은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위이이잉.

그때였다.

파지지지직.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건. 그건 무차별적인 뇌우이었다. 수만 발의 화살, 그와 맞먹는 수만 개의 벼락이 파이몬의 군세를 향해 내리쳤다.

콰콰콰콰쾅.

거너의 호흡이 순간 가빠졌다.

“……!”

-거너, 자네 무사한가? 이제 곧 우리가 그쪽에 도착하네!

체인워커가 계속해서 안부를 물어왔거늘.

거너는 답할 수 없었다.

만약, 조종대를 붙잡는 게 조금이라도 굼떴다면.

체인워커가 윽박지르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

지상을 내려다보자 벼락에 흔적도 없이 증발한 악마들이 보였다.

수준 높은 방어구가 무색하게도 가루가 되어버린 것이다.

전투기가 방패 역할을 하리라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일 터.

거너가 입을 열었다.

“대체.”

어느새 거너의 동공에는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악룡과의 전투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겐가?”

그것이 맹공에도 멈추지 않는 파이몬의 군세를 향한 공포인지.

총대장 호열을 향한 공포인지.

거너,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

.

.

히히히힝.

고삐를 거세게 쥐어도 말은 발굽을 움직이지 않았다. 내려치는 뇌우에 놀란 건가. 아니, 고작 벼락 따위에 놀라 얼어붙을 정도로 나약한 전투마들이 아니었다.

“하르콘 단장님. 전투마들이……!”

예시카의 부름에 하르콘은 뒤를 돌아봤다. 전투마들이 꼬리를 축 늘어트린 것도 모자라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에노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근육이 완전히 얼어붙었습니다. 후방에선 경험이 없는 어린 말들이 그대로 기절. 그 바람에 낙마로 부상을 입은 기사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제국군의 상황은?”

“……역시나 좋지 않습니다.”

하르콘은 다시금 앞을 바라봤다.

전장이 바로 앞에 있었거늘.

어째서인가.

몸이 자꾸만 무거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르콘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이제 와서 악마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늙은 기사의 눈이 전의로 타올랐다.

악마에 빼앗긴 두 다리와 황제.

그리고 제국의 영토와 백성을 떠올리면.

설령 죽어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스킬을 발동해 전황을 살필 수 있는 모험가들. 그들을 통해 이미 소식을 접했다. 총대장께서는 이미 전장에 도착해 범람하는 파이몬의 군세와 맞서고 계시다고.

하르콘이 읊조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군, 나는 경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였어.

검강(劍罡)의 사용자.

죽음의 능선을 숱하게 넘어본 하르콘이다.

죽음의 기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말들이 멈춰선 이곳 너머 전장에는 죽음의 기류가 가득했다.

함부로 발을 들였다가는.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는 절멸의 기류가.

하르콘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설령 아홉 번째 왕좌의 마왕.

파이몬이라고 한들.

단신으로는 그러한 죽음의 기운을 뿜어낼 수 없다고.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하르콘의 음성이 씁쓸하게 잦아들었다.

“……진정으로 모든 걸 죽일 생각이군, 경.”

*

향긋한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시작부터 메인 메뉴라.”

파이몬은 벼락에 타들어 간 악마를 보며 말을 이었다.

“에피타이저부터 천천히 대접하고 싶었는데, 성급하군.”

슥.

파이몬은 군단장이 건넨 화살을 받아 들었다.

그 끝이 예리하게 갈라진 화살촉.

입맛을 돋우는 전채.

생생한 피를 뽑아내는 데에 부족함이 없거늘.

“그럼에도 그대의 호의니 받도록 하지.”

콰콰콰콰쾅.

벼락은 멈출 기세가 없었다.

급속도로 군세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파이몬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표현이 옳았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좋다, 얼마든지.”

파이몬 휘하 200군단.

수백만을 넘어서는 자신의 군세에 비하면 지금 전사한 병력은 새 발의 피조차 되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파이몬은 느긋하게 향을 즐겼다.

오직 십좌만이 소통할 수 있는.

‘의식’의 영역에서.

호열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의 연회를 부럽게 바라보는 이들이 있군.”

성전 연합군.

인간들의 접근이야 진작에 알아차렸다. 쓸어버리고자 마음먹었다면 진작에 쓸어버릴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그들은 전멸이었다.

행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 이유?

“얌전히 바라보는 태도가 마음에 들어.”

그저 변덕이었다.

연회의 장을 두려움에 떨며 바라보는.

공포에 질린 태도가 흡족했기 때문이었다.

“공포에 질린 표정들이 보이는가. 전장에 발을 들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이는가. 아주 훌륭해. 틀림없이 자네의 교육 덕분이겠지.”

파이몬의 눈매가 처음으로 가늘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더욱 은밀한 대면을 원하네, 클라우디. 저들은 우리의 대화를 들을 수 없을지라도 ‘그들’은 우리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지 않은가?”

여기서 그들은 십좌를 말하는 것이었다.

파이몬의 말에 마안을 통해 엿듣고 있던 십좌들이 동요했다.

그들의 동요가 마인의 동공을 통해서 전해져 오는 듯했다.

꾹.

파이몬이 입꼬리를 비틀며 주먹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떠오른 마안이 일제히 터져나갔다.

“자, 이제 염탐하는 자들은 없다. 우리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자들이 없으니, 이 고귀한 파이몬은 허심탄회하게 그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

파이몬의 목소리엔 어느샌가 혐오가 담겨 있었다.

“어째서 아홉 번째 왕좌를 자처했는가? 그것은 녀석들이 저열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귀한 파이몬.

“품위와 격식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이들과 무슨 만찬을 들고, 예술에 관해 논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타협했다. 그들에게 시달리고 싶지 않아 아홉 번째 왕을 자처했다.”

그런 파이몬에게 부에르를 처치하고.

새로운 십좌로 올라선 호열은 위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파이몬의 동공이 희열로 번뜩거렸다.

“그러나, 그대가 내 앞에 나타났다.”

인간인가, 악마인가, 사내인가, 짐승인가, 괴물인가.

그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경계를 허문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이상.

그따위 관념들은 껍데기에 불과했으니까.

그보다 중요한 건 껍데기에 감춰진 타고난 고귀함이었다.

품격과 기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존재는 대등한 친우가 될 수 있었다.

“날뛰는 모습마저 완벽하구나, 그대여.”

파이몬은 이 순간에도.

자신의 군세를 무차별로 학살하는 호열을 바라봤다.

그대와 마찬가지로 고귀한 오직 나만이.

그대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겠지.

“나 역시 겪어봤기에 알고 있다.”

그 얼굴에 가려진 슬픔을 어찌 내가 알아채지 못할 수 있으랴?

그렇다, 나 또한 겪어본 공허함이다.

그러나 그대를 통해 극복했듯.

“그대에겐 내가 있다.”

그대도 나의 존재를 알았으니.

그 슬픔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전략가를 넘어선 암략가.

파이몬은 이 순간을 위해서.

십좌 버러지들의 비위를 맞추던 나날을 떠올렸다.

“그들과의 대화는 떠올리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오지만 괜찮다. 덕분에 이렇게 그대와 마주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대 또한 내게 화답한 듯싶으니까.”

화답의 증거가 바로.

감히 연회를 방해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태도였다.

저들은 자신의 군세에 압도된 게 아니었다.

“나는 인간 따위엔 신경조차 쓰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그대여. 가엾은 짐승들이 거품을 물고 기절하고, 사자심의 기사들조차 공포에 질리게 한 건 순전히 그대이지 않은가?”

그 시점에서 파이몬은 확신했다.

“역시, 그대가 있을 곳은 그곳이 아니다.”

그대를 나의 하나뿐인 친우라 부를 수 있겠다고.

“그대여, 나와 함께 가자꾸나.”

그러나 파이몬의 기대감이 뭉개지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서히 떨어지는 호열의 입술 사이로 음성이 흘러나왔다.

“혼자가 아니다.”

혼자가 아니라니?

그런 공허한 눈빛으로 부정하는 것인가.

아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대는 혼자다.

홀로 고귀한 오직 나만이.

그대의 공허함을 이해할 수 있단…….

비수와도 같은 말이 파이몬의 심장을 꿰뚫었다.

“보아라.”

그러자 찬란한 후광이 시야를 뒤덮었다.

“내게는 ‘한 줄기 빛’이 있으니.”

.

.

.

[스킬,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폭주가 중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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