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8화. 새벽, 가장 어두운 시간 (2)
대화라고 할 수 없다.
텔레파시 마법이라 할 수도 없다.
격이 다른 공간.
십좌는 자신들의 ‘의식’에서 생각을 주고받았다.
의식에 짙게 깔린 안개가 그들의 본체를 숨겼다.
“나약하지만 나약하지 않다.”
“뜻하는 바가 무엇이지?”
“갈대처럼 휘둘리는 열등한 족속이라는 것이다.”
마안을 통해 지켜본 결과, 떨어진 평가.
“분명 긍지는 위험한 감정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 그 사내가 몰고 다니는, ‘긍지’는 위험하지. 허나 그의 세상을 지켜본 결과, 그러한 긍지를 품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릇이 더없이 비좁기에 고작 한 가지 감정밖에 품지 못하는 것이다.”
“그 말이 옳다.”
바알, 가미긴, 부에르, 그리고 호열.
언급한 이들을 제외한 십좌의 마왕은 마안을 통해 지구를 탐구했다. 비록 호열의 등장으로 애써 퍼트렸던 마안이 모두 파괴되어 추가적인 정보는 얻을 수 없다고 한들.
“덕분에 헤아렸다. 아르카나 대륙의 생명체들보다 나약한 정신력이라니. 마계의 떨거지들이 괜히 그들의 세계에 발을 뻗쳤던 게 아니었더군.”
마계의 떨거지.
십좌가 아닌.
이젠 흉조에 삼켜진 마왕들을 말하는 것이었으니.
그들의 지식이 아득히 높은 곳에 있음을 증명하듯.
십좌는 단순히 바라본 것만으로 수많은 인과관계를 파악해 냈다.
덕분에 그들은 간과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젠 성대하게 마주할 시간이겠군.”
“그래야지.”
“잔뜩 화가 나신 새로운 열 번째 왕좌의 마왕을.”
동시에 터져나간 마안을 떠올려본다.
안개 아래에서.
누군가 먼저 운을 뗐다.
“그가 어떤 진리를 활용한 건지 짐작이 되지 않는단 말이지. 단순한 마법은 아닐 터야. 이 벅차오르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친히 그를 맞이하고 싶은데……?”
그때였다.
극도로 정제된 듯한.
미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선을 넘지 마시게.”
“오호, 존귀하신 파이몬.”
“말석을 맞이하는 귀찮은 일은 어디까지나 나의 몫 아니었나?”
아홉 번째 왕좌의 마왕.
존귀한 파이몬.
그가 자신을 낮추는 태도로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없었다.
“파이몬, 자네에게서 야심이 내비치는군. 영겁의 세월 동안 그대에게선 한 번도 목격하지 못한 감정이다. 역시, 그가 궁금한 건가?”
파이몬은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궁금하다니, 나는 이미 확신하고 있네만.”
파이몬은 느긋하게 손을 뻗었다.
츠릉.
손가락, 팔목, 팔뚝, 그의 육신을 치장한 금과 보석이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옷가지는 피부가 내비칠 정도로 얇았지만, 그러면서도 찬란한 윤기를 내고 있었다.
달칵.
파이몬이 쥔 건 성배였다.
피로 목을 축인 파이몬은 새로운 열 번째 왕좌의 마왕을.
호열을.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를 떠올렸다.
“그 품격만큼은 이미 나와 동류다.”
어째서 ‘존귀한’ 파이몬인가?
그 이유는 누구보다 십좌들이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대와 동류라니, 후한 평가가 아닌가?”
같은 십좌라고 한들.
타고나는 능력과 관장하는 영역이 달랐으니.
파이몬은 마계에서도 비옥한 서부를 관장하는 존재였다.
“이 자리에 그대의 군세가 움직이는 걸 달가워할 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부에르, 그가 여태까지 십좌의 자리를 부지할 수 있던 건 그대의 자비 덕분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홉 번째 왕좌의 마왕.
그러나 그 강함은 아홉 번째가 아니다.
그것이 파이몬을 바라보는 십좌들의 평가였다.
방금 말했던 그대로.
군세을 거느린 파이몬은 자신들에게도 위협적이기 짝이 없었으니.
“자비라.”
찰랑.
파이몬은 성배를 가볍게 흔들었다.
최상품의 핏물이 작게 소용돌이쳤다.
파이몬은 그 파문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언급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십좌.
위대하기에.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헤아리는 것이 빠르다. 그만큼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한 갈망 또한 크다. 파이몬은 그런 십좌들의 결핍을 건드린 것이었다.
음험한 목소리가 울린다.
“잊지 말게나, 파이몬.”
“십좌의 증명은 누구에게나 유효한 바.”
“그 이상의 만용을 용납할 생각은 없다.”
파이몬이 성배를 쥔 채로 답했다.
“좋을 대로 행동해도 좋다. 그러나 그대들에게 그것이 과연 득이 될까? 누가 봐도 나와 새로운 열 번째 왕좌의 마왕을 붙여놓는 편이 그대들에겐 득이 될 텐데.”
대답은 없었다.
말했다시피 파이몬의 군세는 어떠한 십좌도 간과할 수 없는 강함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이 자리 없는 바알이라면 또 모를까……. 덕분에 협상은 어렵지 않았다.
파이몬이 의식에서 먼저 물러나며 말했다.
“나는 즉시, 베히모스의 아가리로 향할 것이다.”
“목적은?”
“아르카나 대륙도 모험가들의 세계도 아니다.”
나의 목적은 오직 하나.
확인.
파이몬의 입매가 포물선을 그렸다.
“어쩌면 처음으로 친우를 사귀게 될지도 모르겠군.”
*
파이몬의 군세.
그 실체와 마주한 거너의 반응만 봐도 눈앞에 그림이 그려지는 듯했다. 아이언 캐슬 호 최고의 조종사이자 위대한 정찰병인 거너였다.
덕분에 숱한 경험을 해온 그였거늘.
-“……이건 말도 안 돼.”
거너가 내뱉는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체인워커는 그쯤에서 기계장치에서 귀를 멀리했다.
그와 동시에 월스와일이 망치를 내려놨다.
“기본적인 수리가 끝났네!”
“공간 도약까지 남은 시간은?”
“1분이면 충분해!”
체인워커가 다른 기계장치에 대고 말했다.
“들었나, 제군들? 우리는 1분 뒤에 베히모스의 아가리에 도착하게 되네. 첫 번째 공간 도약 사용 후, 다음 공간 도약까지는 대략 1시간 남짓한 시간이 필요한 바.”
체인워커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즉, 우리가 파이몬의 군세를 막아설 수 있는 시간은 최대 1시간에 불과하다는 소리겠지. 그렇다면 그대들은 그 1시간 동안 어떤 성과를 낼 수 있겠는가?”
두 마리의 악룡을 상대하느라 이미 큰 피해를 입은 성전 연합군 소속 모험가들이었다. 헤어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재촉하는 듯해 마음이 편치 않았거늘.
‘총대장님이 자리를 비운 지금.’
나는 더욱 냉철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체인워커는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질문을 던진 것.
대답은 곧장 들려왔다.
안토니움.
히사기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조금 전 안토니움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출정을 준비 중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체인워커 님에게 이 광경을 보여 드리고 싶군요.”
내게 보여주고 싶은 광경이라니, 무슨 뜻인가?
체인워커가 흠칫하며 되물었지만.
히사기에겐 구체적으로 설명할 묘사력도 여력도 없었다.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
성문 앞 평야를 가득 채운 제국의 군대.
선봉장에 선 이들은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었다.
기사단장, 하르콘이 입을 열었다.
“들어라. 오늘 우리가 맞이할 악마는 그동안 마주한 녀석들과 차원이 다르다. 일개 잡졸이 입고 있는 갑주가 드워프의 무구와 비견될 정도이며 그 잔혹함 또한 진명의 악마를 능가할 것이다!”
하르콘은 거너가 전해온 절망적인 소식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제국의 병력에게 선언했다. 남태민이 그런 스승의 모습을 보고 씨익 웃었다.
“숨기지 않는 게 똑같으시네. 그러니까 친하신 건가?”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선언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제국군의 사기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렇다. 제국은 지금 절멸의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가 우리에게 처음인가? 아니다! 그대들은 이미 수많은 시련을 극복해 왔다!”
반란군, 마왕, 그리고 전황의 서고까지.
정말로 수많은 시련을 겪고, 극복한 제국이었다.
하르콘이 고삐를 틀었다.
자신의 기계 다리를 병사들 앞에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손가락으로 무덤가를 가리켰다.
“그 증거는 우리에게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다!”
“와아아아!!!”
하르콘의 선언에 터져 나온 함성은 안토니움 북부에서 세계수를 지키고 있던 햇병아리, 프로즈낙스의 귓가까지 들려왔다. 프로즈낙스가 부리를 재잘거렸다.
“슬슬 날아볼 시간인가.”
“예?”
“너는 이곳이나 잘 지키고 있거라, 애송이 용기사.”
“아, 넵.”
애송이 용기사.
스칼은 흠칫했다가 곧장 머리를 숙였다.
프로즈낙스는 그런 스칼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곳은 너를 태울 정도로 호락호락한 전장이 아니다.”
“……?”
그 말인즉.
호락호락한 전장이라면 나를 태워줄 수도 있다는 뜻인가?
축 처졌던 스칼의 어깨가 바짝 올라갔다.
“그, 그럼 다음에는 기대해도 되는 겁니까?”
하지만 프로즈낙스에게 대답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프로즈낙스는 이미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반짝거리는 병아리의 눈동자.
저건 조금 흥미로운걸?
“오호, 그대들도 나서는 것인가?”
프로즈낙스가 말한 그대들은 모험가 플레이어들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이 멸망한다고 해도.
어쨌거나, 남 이야기라 여길 줄 알았거늘.
다들 제 발로 제국군에 합류하고 있지 않은가?
결과만 보자면 프로즈낙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백 퍼센트라니까요!”
“하긴 월드 메시지가 출력됐으니까.”
“그것도 보통 월드 메시지가 아니죠! 아르카나 대륙 전역에 메시지가 출력됐다? 이거는 파이몬이 아르카나 대륙을 뒤흔들 몬스터라는 소린데!”
그 동기가 어쨌든.
플레이어들은 나름대로 각오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안토니움 성전 연합군에 속속들이 가세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하르콘의 외침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걸어야지. 발동 중인 버프를 생각하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도 모자라 끝까지 살아남아야 해. 다들, 경험치만 실컷 먹고 죽어서 떼깔만 좋은 귀신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을 거 아냐?”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연결된 지금.
아르카나 대륙의 위협은 현실에 닥칠 위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현실에도 십좌들의 마안이 떠오른 지금에는 더더욱.
그런 의미에서 플레이어들의 판단은 더없이 합당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플레이어 전원이 안토니움으로 집결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
“아씨, 안 비켜?”
“앗, 언니. 어떻게 목마라도 태워줄까?”
“닥쳐, 확 그냥.”
레오니는 인파를 헤치고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드미트리의 죽음으로 비장감이 깃든 샤이닝부터.
보헤미안, 워로드, 올림포스, ACDC…….
“평소 얼굴 보기 힘든 얘들도 다 모였다, 언니?”
“뭐, 잔뜩 기대한 거겠지.”
“그렇습니다.”
“그래.”
히사기와 남태민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합류했다. 날카롭지도, 그렇다고 해서 곱지만은 않은 시선이 플레이어들 방향으로 향했다.
“우선순위는 다르더라도, 쨌든 목적은 같으니까.”
같은 랭커이기에.
저들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바라고 있는 건 [전쟁 퀘스트]겠지.
“이런 규모라면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할 때도 없었던 ‘대전쟁 퀘스트’가 떠올라도 이상하지 않아. 발동 중인 버프를 생각하면 적당한 공적만 쌓아도…….”
“상당한 전리품을 거머쥘 수 있다고 계산이 나온 거겠죠.”
“총대장님이 보셨다면 한소리 하셨겠지만…….”
당신부터가 청렴결백.
그 자체시니 타인을 나무랄 수 있는 거지.
자신들에게 그럴 자격은 없었으니까.
그러니 남태민은 그저 바랐다.
“뭐가 됐든, 악마 앞에서 물러서지나 않았으면 좋겠네.”
이윽고, 성전 연합군이 안토니움에서 출격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안토니움에는 방어를 위한 병력이 남아 있었다.
4가문, 붉은 눈의 듄, 다이아몬드 상단…….
호열이 불러들였던 거물들이었다.
그들의 주인, 호열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에.
그들은 안토니움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럼 포탈을 열겠습니다!”
황궁 마법사, 내쉬 윌리엄.
고오오오.
그가 안토니움의 마력석을 담보로 포탈을 발현했다. 그 좌표는 베히모스의 아가리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이었던, 이젠 폐허가 되어버린 카나리아로드.
“……어라?”
그러나 포탈에 진입하고.
심상치 않은 공기를 들이마실 때까지도.
플레이어들의 눈앞은 잠잠했다.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쯤 되면 뜨고도 남아야 하는데, 전쟁 퀘스트?!”
그 이유는 간단했다.
존귀한 파이몬은 이미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으니까.
기나긴 대군의 행렬 가운데.
드디어.
파이몬이 베히모스의 아가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홉 번째 왕좌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마주하게 되어서 반갑군.”
하늘 위.
호열을.
그랑펠을 향해서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어쩌면 나의 친우가 될지도 모르는 그대여.”
그 말에 비정을 넘어서 무정한 시선이 파이몬에게 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