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7화. 새벽, 가장 어두운 시간 (1)
자정을 넘긴 시각.
균열이 전국, 세계 곳곳에서 붕괴한 지금. 평범한 일상은 무너졌다.
불행 중 다행스러운 건 월요일 출근이 없다는 것. 덕분에 이예림은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스마트폰 액정 속 하나뿐인 동생을 살펴본다.
“자식이 비싸게 굴기는.”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는 건지, 얼굴이 포착된 사진은 기껏해야 서너 장에 불과했다. 그러니 아까부터 같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뭔가 묘하게 다른데?”
머리카락 기장이 어색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그건 확실하게 아니다.
길게 늘어진 장발이 생각보다 엄청 잘 어울려서 솔직히 놀려먹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으니까. 오죽했으면 작은 언니가 그런 소리를 했겠어?
-“호열이 머리카락에 신경 쓸 시간에 네 머리나 좀 어떻게 해. 항상 부스스해서는. 그보다 너 오늘 머리는 감았냐?”
하나뿐인 조카.
아랑이의 열정적인 반응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모에게는 더없이 엄격한 요 녀석이.
TV에 떠오른 호열이를 보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아나운서 목소리만 잔뜩 들었는데.
다행히도 들려오는 소식은 어색하지 않았다.
평상시와 같았거든.
-이호열 플레이어가 마포구 일대에 출현한 혼혈의 악마를 처치. 악마에게 인질로 잡혔던 시민 수십 명을 무사히 구출했다는 소식입니다!
-AAU측은 지구를 둘러싼 마안이 사라진 이유를 이호열 플레이어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등장과 동시에 600여 개 달하는 마안을 파괴했다는 겁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현장에 나가 있는…….
언제나처럼 호열이가 등장했고, 절망적인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슥.
이예림의 시선이 댓글창을 향했다.
-말했지? 어차피 이호열이 정리한다고
-근데 장발은 뭐냐? 상상도 못 했네 ㄹㅇ
-지난번에도 살짝 보이지 않았나?
-아니, 저 정도로 길진 않았을걸???
“……욱.”
언니들은 호열이가 마냥 자랑스럽다고 하던데, 이예림은 아직도 자신이 철이 덜 들었다는 걸 자각했다.
동생에 관한 반응에 내 뺨이 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보면…….
“호멘은 무슨 호멘이야. 천마라니까.”
괜히 퉁명스럽게 중얼거리기도 잠깐.
“!”
댓글 하나가 이예림의 시선을 끌었다.
-내 지인이 기사에 나온 악마 뱃속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임. 이번에 이호열 완전 장난 아니라고 하더라? 확실히 평상시랑 달랐대 ㅇㅇ
다르다……?
이예림, 자신과 똑같은 반응이었다.
다행히도 댓글은 계속 이어졌다.
-말 한마디도 안 하고 악마만 사냥하고 사라지는 게……. 상황이 엄청나게 심각해 보였다고 하던데? 뭐냐, 같이 있었던 아르카나인들 반응도 그렇고.
특히 아르카나인 직장 동료가 많은 호열이었다.
그 동료들도 뭔가 다른 낌새를 알아차렸다면.
확실히 평소와는 뭔가 다른 게 아닐까.
“에이씨. 몰라.”
내가 플레이어도 아니고.
이예림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머리를 긁었다.
절대 가려워서는 아니다.
잠은 오지 않고, 목은 타고, 물이라도 마실까 해서.
거실로 나갔더니…….
이게 뭐야.
“……뭐냐, 너도?”
“언니도?”
“둘 다 안 자고 뭐 해?”
세 자매가 동시에 거실에서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내색하지 않아도 통했다. 눈빛만으로 언니들이 어떤 이유로 잠이 들지 못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달칵.
동시에 물컵을 내려놓는 세 사람.
2호, 이지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 본 적 있지?”
“뭘?”
“호열이, 저런 얼굴.”
“뭐? 본 적이 있어? 어디서?!”
이예림 끼어들자 이은혜가 대답했다.
“저런 얼굴이라면……. 세상 근심 다 혼자 떠맡은 표정을 말하는 거야? 그런 거라면 본 적 있지. 잠깐만, 벌써 그게 몇 년 전이었지……? 기억이 가물가물해.”
역시, 큰 언니는 달라도 뭔가 달랐다.
그 사진 몇 장에서 세상 근심 걱정 다 떠맡았다는 걸.
간파해 낼 줄이야.
이예림이 감탄하던 순간, 이지윤이 대꾸했다.
“호열이랑 예림이 중학교 때.”
“맞다! 그때다.”
“……중학교 때? 난 왜 모르겠지?”
“왜 모르긴, 너 매일 사고나 치고…….”
“언니, 갑자기 쓸데없는 소릴 하고 그래?!”
그렇게 시작된 옛날이야기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됐다.
그리고 어느덧 새벽이었다.
동트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
창밖을 바라보던 이예림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호열이가 ‘그때’랑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라면…….”
장난기는 없었다.
겨우 한 살 차이지만.
확실한 연장자의 태도였다.
“……지금 호열이가 그때만큼 힘들다는 거잖아?”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왜 그걸 몰랐을까.
이예림은 어둠에 잠긴 도심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넌, 어떻게 달라진 게 없냐? 힘들면서 한 번도 티를 안 내는 게.”
*
마탑의 크리스탈 홀.
정기 학회까지는 멀었거늘.
청중의 머릿수는 어느 정도 채워진 상태였다.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탑주, 마르셀로는 가볍게 인사하며 면면을 살폈다.
출탑 중인 선임 마법사를 제외.
마탑의 모든 선임 마법사들과 AAU의 지부장들.
유스라 왕국의 고위 관료와 여신교단의 성녀까지.
상태이상, 타락.
오직 미지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쉽게 모일 수 없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양한 세력들이 모여서인가.
의견이 활발하게 오갔다.
그러나 마르셀로를 포함한 모두는 기다리고 있었다.
마탑의 수석 마법사.
유스라와 뮤온의 구원자.
유스라 지부의 총책임자.
호열을.
그건 일종의 믿음이었다.
그동안 자신들이 봐왔던 호열이라면, 틀림없이 마탑으로 복귀. 타락에 관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시리라는 걸 믿어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
그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나 자정이 넘어가고 새벽이 되었어도.
호열은 마탑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문득, 들려오는 질문.
“소식 들으셨습니까?”
“……어떤 소식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나더 스페이스 호에서 지구에 떠올랐던 마안이 완전히 소멸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현재 생성된 균열의 붕괴도를 생각하면 당분간 마안과 타락의 위협으로부터는 안전…….”
일본 도쿄 지부장.
오카자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지만.
뒷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박민재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으니.
‘위협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총책임자님께서는 다시 행적이 묘연해지신 거지?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나 박민재는 이 순간, 바라고 있었다.
‘부디…….’
천하의 총책임자님조차도 시간적 여유를 내실 수 없을 정도로 큰 사건이 예견된 것이기를 바랐다. 물론, 그 생각을 밖으로 낼 수는 없겠지.
‘어쩌면 나는 자격이 없을지도.’
인류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AAU의 지부장이 오히려 위협을 바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박민재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위협보다 두렵다.’
다른 누구도 아닌 총대장님의 변화가.
고작 머리카락의 길이를 말하는 게 아니다.
박민재는 인류가 지금껏 존속할 수 있던 이유를 간과하지 않았다.
모든 건 호열이 호열이었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백마를 탄 초인.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신 덕분이었다.
박민재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만약, 그 격이 다른 힘이 이전까지와 다르게 쓰인다면.’
조금이라도 그 방향이 어긋나게 된다면……. 인류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일까? 총대장님과 상위 마왕들의 성전(聖戰)에 등이 터져나가는 새우 꼴이 되지는 않을까?
“괜찮은가요, 미스터 박?”
“네, 괜찮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요.”
그런 우려가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박민재의 얼굴에 드러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호열에 관한 소식이 들어온 것은.
스스슥.
필적이 새겨지는 양피지.
성전 연합군 소속.
거대 연합이 전해온 소식.
가장 먼저 확인한 마르셀로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이호열 총대장님께서 두 마리의 악룡을 사냥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사냥입니다. 정화가 아닌 압도적인 학살이었다고 하는군요.”
악룡.
무려 두 마리의 드래곤을.
압도적으로 학살.
“……불길한 예상은 어긋나는 법이 없군.”
박민재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오늘 하루가 참 빌어먹게도 길군요.”
*
드워프 전투기.
거너는 조종대를 장식한 마력석을 살폈다.
마력석의 빛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었다.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이런 빌어먹을.”
마법부여학 선임 마법사, 키코 아르민.
그녀의 도움으로 출력을 극도로 향상시킨 마력석이었거늘. 그럼에도 수십 일간 계속된 비행을 버틸 순 없는 모양이었다.
거너가 마력석의 빛으로 남은 비행시간을 계산했다.
“대충 한두 시간인가.”
아이언 캐슬 호와는 조금 전 연락이 닿았다.
악룡이 출현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으나, 일단락되었고 아이언 캐슬 호의 수리를 마친 다음 이곳으로 향하겠다는 전언이었다.
자세한 경과는 알 수 없으나, 아이언 캐슬 호를 수리해야 한다는 말만 들어도 상황의 심각성이 와닿았다.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 심각할 순 없겠지만.
……꿀꺽.
거너는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로 임박한 듯싶었다.
베히모스의 아가리의 역류가.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두 손.
거너는 조종대를 붙잡고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그러고는 아이언 캐슬 호에 연락을 보냈다.
“……나는 마지막까지 그대들에게 소식을 전하겠네.”
이제부터 자신이 목격할 정보가 동족들에게.
더 나아가.
성전 연합군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거너가 비장하게 말을 끝마친 순간이었다.
쩌저저적.
힘겹게 닫혀 있던 베히모스의 아가리가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벌어지는 아가리, 그 흉악한 이빨 사이로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아르카나 대륙 곳곳을 비행하며 갖가지 악마를 봐온 거너였거늘. 저 녀석들은 무언가 달랐다.
드워프치고 손재주가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피에 새겨진 본능은 어디 가지 않는다.
거너의 시선이 악마들의 장비를 향했다.
“뭐냐, 저 수준 높은 장비들은?”
제련을 넘어서 공예와 세공의 영역이라고 봐야 할 정도로.
고도의 수준을 자랑하는 장비들. 얼핏 보았을 땐 드워프 장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보일 정도의 장비를 전군, 모든 악마가 착용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좋은 무기는 평범한 이도 고도로 훈련된 기사와 맞설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악마가 저런 무기를 쥐고 있다면……?
그것도 수천, 수만.
아니, 한눈에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병력.
전원이 저런 장비로 무장했다면……?
“이건 말도 안 되는……!!”
거너가 경악을 금치 못하던 순간이었다.
아이언 캐슬 호.
모험가의 시야를 가진 플레이어들.
그들이 거너를 향해 오히려 소식을 전해왔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거너 님, 그 녀석의 이름은 파이몬입니다.”
마계 서열 9위, 파이몬.
파이몬의 출현 메시지가 아르카나 대륙 전역에 성대하게 출력되었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파이몬에 관한 정보가 거너의 고막으로 전해진다.
-“저희 세계의 지식에 따르면 파이몬은 수많은 대군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만한 대군을 이끌기 위해서는 필시 파이몬이 대동해야 한다고 하며…….”
“바, 방금 뭐라고 했나?”
-“……네?”
“필시 대동해야만 한다고?”
-“네, 그렇습니다. 알려진 정보에 따르면요!”
“그럴 수가.”
거너가 허망하게 내뱉은 이유는 간단했다.
수만을 넘어서서 십수만.
베히모스의 아가리에서 정예 악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거늘.
아직 그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이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저 악마 군단의 행렬은 대체 어디까지 이어진단 말인가?
거너의 동공에 공포가 깃들었다.
“저 괴물이 고작 아홉 번째 왕좌의 왕이란 말인가?”
.
.
.
[아르카나 대륙에 아홉 번째 왕좌의 마왕, ‘존귀한 파이몬’이 출현합니다.]
*
[??? : 마왕 쟁탈전 - 십좌의 증명]
십좌의 왕인 그대여.
수많은 도전자가 그대의 자리를 갈망하고 있다. 도전자의 손에 무릎을 꿇거나,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왕을 무너트려라. 도전과 증명, 선택은 온전히 왕인 그대의 몫이다.
-열 번째 왕좌를 사수하라. (진행 중)
-아홉 번째 왕좌에 도전하라. (진행 중)
[마왕 쟁탈전, 십좌의 증명이 시작됩니다.]
[아홉 번째 왕좌의 마왕, ‘존귀한 파이몬’이 쟁탈전에 참전합니다.]
[열 번째 왕좌의 마왕,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가 참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