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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56화 (456/489)
  • ◈ 456화. 어둠이 깔리다 (5)

    상태이상, [타락].

    AAU와 마탑.

    외부 활동을 극도로 자제하는 여신교단마저도.

    타락을 억제할 방법을 찾기 위해 붕괴 균열로 나선 상황.

    타락의 영향과는 거리가 먼 바다 한가운데.

    유스라 왕국이라고 한들.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백여 명 남짓한 탐험가 무리.

    플레이어와 아르카나인이 뒤섞인 연맹을 이끄는 건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였다. 탐험가이자 넷튜버, 박휘강이 동동 발을 굴렀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세상에 유령선을 타게 될 줄이야.”

    두둥실.

    말 그대로 유령선이 연맹 탐험가들을 태운 채 하늘을 날았다.

    로렌츠크가 껄껄 웃었다.

    “드워프 왕국, 아이언 캐슬 호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뭐, 들어간 수고에 차이가 있으니까. 이 정도로 만족하게들.”

    어찌 만족하지 않을까?

    “당연히 그래야죠.”

    탐험가 연맹장, 파비앙 들롱.

    그는 살아있는 전설이자 동경의 대상.

    로렌츠크 앞에서 식은땀을 훔쳤다.

    정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세이버즈 호의 전설이 사실이었을 줄이야.”

    전설 속 세이버즈 호를 현실로 불러내시다니.

    이래선 일개 탐험가의 영향력을 넘어서지 않았는가?

    감탄도 잠깐, 파비앙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로렌츠크 님이 도움을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쿠나 국왕님의 명령이 있었지만, 그것을 실현할 능력이 저희에게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는 탐험가 연맹에 명했다.

    타락의 실마리를 붙잡기 위해선 탐험가 연맹, 그대들의 힘이 절실하다고. 거절할 순 없었다. 유스라 왕국이 탐험가 연맹의 편의를 봐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물론, 그런 관계가 아니어도 움직일 생각이었다.

    로렌츠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인사는 접어두지. 나는 연맹 소속도 연맹을 돕기 위해서 움직인 것도 아니라니까? 굳이 따지자면, 나는 성전 연합군 소속 아니겠는가. 타락을 탐구하고, 연구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란 게야.”

    “어찌 됐든, 감사합니다. 로렌츠크 님.”

    “그런가? 정작 나는 마음이 편치 않은데.”

    “염려되는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그야 흉흉하니까.”

    문득, 하늘을 향하는 로렌츠크의 시선.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말일세.”

    그곳엔 십좌의 동공이 박힌 마안이 있었다.

    낭만을 잃지 않았기에 늙지 않는 소년.

    로렌츠크는 대륙을 탐험하며 숱한 마법과 주술을 목격해 왔다.

    “그런 나조차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이네. 지옥에도 들어갔다가 빠져나온 내가. 마계에 관해서는 조금도 아는 게 없단 말이지.”

    순수한 탐험 욕구가 어떤 탐험가보다 강한 로렌츠크.

    탐험가로서 정복하지 못한 마계를 떠올리니 의욕이 솟구쳤거늘.

    로렌츠크는 곧장 이성을 되찾았다.

    “그러니 그대들은 내게 큰 도움을 바라진 말게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대들을 적당한 붕괴 균열 근처에 내려주는 것밖에 없으니까.”

    “그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말끝마다 감사는. 이래서 혼자 다닌 건데, 부담스럽군.”

    “고쳐보겠습니다.”

    “쯧. 그 대답도 부담스러워.”

    유령선이 도심을 가로지른다.

    붕괴 균열에 하나둘 모험가들을 퍼트리던 순간이었다.

    박휘강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이 멈칫했다.

    [혼혈의 악마, ‘감금의 악마’가 출현합니다.]

    “인근에 악마 출현입니다!”

    “……감금의 악마는 또 뭐죠?”

    “잘은 몰라도 이름만 들어도 끔찍한데요?”

    박휘강은 다급하게 외치고 카메라를 치켜들었다.

    아무리 넷튜버라고 해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안다.

    방송 송출을 위한 게 아닌 열 감지 카메라.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을 융합하는 기이.

    “이것도 기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스스로 내뱉으면서도 양심에 찔렸다. 그러나 인터넷 검색 또한 기이로 여기는 ‘누구’의 기준으로 박휘강의 행동은 기이가 맞았다. 그리고 기이는 어떻게든 활약하는 법.

    “거, 건물 내부에 열반응이 있어요!”

    그때였다.

    악마가 모습을 드러낸 건.

    스멀스멀…….

    아니.

    꿈틀꿈틀.

    “……!”

    빌딩이 살아있는 것처럼 몸서리치고 있었다.

    두 눈을 씻고 자세히 바라본다.

    그 외벽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무언가로 잔뜩 뒤덮여 있었다.

    로렌츠크와 파비앙이 입을 열었다.

    “붉은 핏줄……?”

    “짐작이 가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있겠나? 나라고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야.”

    “그……. 모양이 비슷합니다!”

    박휘강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모세혈관! 그러니까 현실에서 통용되는 과학에서 저 핏줄 같은 걸 모세혈관이라고 불러요. 그 말은……. 저 건물이 살아있는 생명체……. 아니, 그러면 저게 악마라는 소리?!”

    박휘강의 추측은 날카로웠다.

    쿠쿠궁.

    이 또한 타락의 효과.

    악마가 건물을 통째로 집어삼킨 것이었다.

    혈관을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이 혀를 내둘렀다.

    “건물 안에 사람이 있어서 감금의 악마인가?”

    “쓰러트리기 전까지 못한다는 소리잖아, 퇴근?”

    “미친! 뭐, 저딴 끔찍한 몹이 다 있냐?”

    “내가 말했지. 다 저기, 하늘에 뜬 마안 때문이라니까?”

    한 플레이어가 신경질적으로 눈을 치켜뜬 순간이었다.

    “……응?”

    두 눈을 의심케 하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불길하게 동공을 굴리던 마안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뭐, 뭐야? 어디 갔지?”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럴 시간에 눈앞에 집중해!”

    하지만 헛것을 봤나, 여기고 넘어갈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그야 박휘강이 다급하게 외치고 있었으니까.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

    “저게 악마면 저 건물 내부에 시민들은 악마 뱃속에 잡아먹힌 거잖아요? 저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뭐야, 뭘 어떻게 해야……!”

    화륵.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로렌츠크와 파비앙.

    두 사람이 횃불을 치켜들었다.

    녹빛으로 타오르는 지옥의 불꽃.

    “악마의 뱃속이라. 흉조의 뱃속에는 들어가 봤어도 악마 뱃속엔 들어가 본 적이 없었는데 잘됐군. 뱃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면 악마를 사냥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딱딱하구만, 자네는.”

    소년이 흰머리가 지긋한 중년을 다그치는 모양새.

    허나, 핀잔에도 파비앙은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그야 로렌츠크에게 지옥의 불꽃을 나눠 받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연맹의 지옥 불은 호열 경께 선사했으니까.’

    이유야 간단했다. 호열이 지옥의 불을 보다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로렌츠크를 통해 다시 이 불꽃을 접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니 망설임은 없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플레이어의 상식.

    전투과 비전투직.

    클래스의 한계는 극복할 수 없다.

    탐험가는 날고 기어도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할 수 없다는 뜻.

    박휘강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둘은 유령선에서 하차했다.

    그러고는 우려하는 탐험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생존자나 잘 수습해 주게. 부탁하지.”

    “네, 넵. 당연히 그래야죠!”

    “그럼 가볼까?”

    화르륵.

    두 탐험가가 지옥의 횃불로 악마의 핏줄을 태워냈다.

    닫힌 문을 열고 건물이자 악마 내부로 진입한 찰나였다.

    문득, 주변 공기가 서늘하게 식었다.

    “……?”

    서늘해진 등골.

    박휘강,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다.

    수군거리는 탐험가들.

    “갑자기 기분이 이상한데…….”

    “그 뭐냐, 눈앞에 뭐 안 보여요?”

    “시스템 메시지요? 글쎄요, 잠잠한데.”

    잠잠한 시스템.

    그것만으로 박휘강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출현 메시지가 아닌 것만으로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

    그러나 모두가 경악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들려오는 소리.

    또각.

    뇌리를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 곳엔 사내가 있었다.

    어째서인가.

    짧았던 은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리고 있었지만.

    그건 틀림없이 호열이었다.

    “초, 총대장님!”

    그 등장에 구원자라도 마주한 것처럼 감격하던 순간이었다.

    콰직.

    무자비한 소리와 동시에.

    뜨뜻하면서도 미지근한 무언가가.

    얼굴에, 팔뚝에, 옷가지에 튀었다.

    “으, 으으으으악!!”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피와 살점.

    건물과 하나가 된 악마가 그대로 터져 나간 것이었다.

    그건 마법도, 스킬도, 기이도 아니었다.

    그저 응시하는 것만으로 악마를 터트린 것.

    상황판단이 빠른 모험가 중에서도.

    유달리 회전이 빠른 박휘강의 머리가 떠올린다.

    “?!”

    그래, 열감지 카메라로 포착했던 건물 안의 생존자들을.

    그들을 구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진입했던 두 탐험가.

    로렌츠크와 파비앙 연맹장을.

    다급하게 옮겨가는 시선.

    “꺄아아아악!!”

    박휘강은 터져 나오는 비명에 안도했다.

    다들 악마의 피와 살점을 뒤집어 썼지만…….

    모두가 무사히 살아 있었다!

    “후우, 끔찍한 경험이로군.”

    로렌츠크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산산조각이 나버린 마도구.

    『잡신과의 계약 : 서명의 만년필』을 바라봤다.

    “잡신이라도 신이라는 건가? 쨌든, 보살핌 덕분에 살았어.”

    만약, 만년필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로렌츠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는 악마를 산산조각 내버린 호열이 있었다.

    “보자, 총대장의 실력이라면…….”

    악마의 뱃속에 우리가 들어 있었다고 한들.

    정교한 발현력으로 정확하게 악마만을 사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산산조각이 나버린 만년필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파비앙이 중얼거렸다.

    “……분명, 무언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겠죠. 그게 아니라면 저희가 진입했으니, 반드시 시민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믿으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호라. 그 짧은 시간에 그런 판단을?”

    “그렇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제가 지켜봐 온 이호열 총대장님이시라면……. 충분히 내다보시고 계산하시고 행동으로 옮기신 걸 겁니다.”

    로렌츠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파비앙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해서 우러나온 행동은 아니었다.

    로렌츠크는 호열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으니까.

    ‘내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그랬다.

    호열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이쪽을 향하지 않았다.

    피와 살점에 뒤덮여 혼란스러워하는 이들도, 마도구가 아니었다면 마찬가지로 피와 살점으로 변했을 자신들에게도 특별한 취급은 없었다.

    그의 시선은 더없이 공평하게 어느 곳도 향하지 않았다.

    로렌츠크는 생각했다.

    ‘내 마도구의 존재와 효과까지 꿰뚫어본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우리가 운이 좋았던 건가.”

    로렌츠크는 확신할 수 없었다.

    흉조에서 역류한 자신은 이호열, 그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아무래도…….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 것 같았다.

    “그대가 정확히 누구인지를.”

    *

    TV 앞.

    이예림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얘는 얼굴 한 번을 안 비추네.”

    “바쁘겠지. 아까 뉴스에 나오더만? 하늘에 떠오른 마안을 한 번에 파바박! 터트린 걸로도 모자라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악마 사냥 중이라고.”

    작은 언니, 이지윤이랑 대화를 나누는데…….

    “나도, 나도 들었어!”

    조카, 아랑이가 화면을 가린다.

    이예림이 아랑이를 낚아채 껴안으면서 간지럼을 태웠다.

    요게 언제 이렇게 쑥쑥 커서는.

    “어쭈. 이젠 혀 짧은 소리 안 하네?”

    “이히히. 간지러, 이모.”

    “요거 요거 이럴 때만 삼촌 말고 이모 찾지?”

    이지윤이 코웃음 쳤다.

    “삼촌이 보여야 삼촌을 찾지.”

    웬만하면 카메라에 뉴스에 모습을 비출 법도 한데 말이야. 그야 우리 하나뿐인 남동생, 호열이가 플레이어가 된 이후에 화법이 워낙 유별나졌어야 말이지.

    1호, 이은혜의 목소리엔 걱정이 묻어 있었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걸까?”

    “그러겠지. 걔 며칠 동안 연락도 없었잖아.”

    “내가 말했잖아? 저거 사춘기라니까?”

    아니, 글쎄 쟤가 자기 입으로 천마……!

    이예림은 열심히 말을 늘어놓았지만.

    두 사람의 귀는 오직 TV 소리를 향해서만 열려 있었다.

    그런 간절한 바람이 닿은 걸까.

    -……말씀드리는 순간, 이호열 플레이어의 모습이 최초로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VBC 투데이 아르카나팀 단독 보도입니다!

    “야야! 이예림 조용히 해봐!”

    아니, 진짠데!!

    “흡.”

    혈육들의 핀잔에 이예림이 입을 꾹 닫은 순간이었다.

    TV에 정말로 호열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풀이 죽었던 이예림의 동공이 움찔거렸다.

    “?”

    길게 늘어진 은빛 머리칼이 보였으니까.

    “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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