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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55화 (455/489)
  • ◈ 455화. 어둠이 깔리다 (4)

    늪지대 비룡과 폭풍룡.

    악의로 날뛰는 악룡의 기세는 파괴적이었다.

    아이언 캐슬 호, 드워프들이 동요할 정도로.

    “상성이 좋지 않습니다, 체인워커 님!”

    “하필이면 폭풍을 일으키는 드래곤이라니. 이런 바람 속에선 조종대를 붙잡기조차 벅차네. 전투기를 출격시킬 수도 없어. 마력포는 준비되었나?”

    “아무래도 기계장치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제기랄.”

    우당탕.

    망치를 챙겨 든 월스와일이 분통을 터트렸다.

    “이래서 내가 아이언 캐슬 호도 개조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의 기술력만으로 저들에 대응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모험가들의 기술이든, 마탑의 마법이든 뭐라도 받아들여서…….”

    “알겠네. 잔소리는 그쯤 하지, 월스와일.”

    제련의 과정은 계획적이어야만 한다.

    광물마다 감내할 수 있는 담금질의 정도가 다르기에.

    아이언 캐슬 호는 드워프 기술력의 집합체였다. 고도의 제련 과정이 얽혀있는 아이언 캐슬 호를 단기간에 개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거늘.

    이런 무의미한 소릴 내뱉은 이유?

    깡.

    월스와일이 망치를 내리쳤다.

    “답답해서 그러네, 답답해서!”

    상황이 막막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었다.

    닥친 위협이 악룡뿐이었다면 아이언 캐슬 호가 반파되는 한이 있더라도 녀석들을 막아섰을 터. 부끄럽게도 의존하는 것 같아 이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반전 마법이라면.’

    총대장의 신묘한 마법이라면.

    틀림없이 부서진 아이언 캐슬 호를 원상 복구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위협은 악룡만이 아니었다.

    베히모스의 아가리가 악마를 쏟아낼 낌새를 보이고 있었고, 총대장의 자취 또한 묘연했다.

    구우우웅.

    땅에서부터 들려오는 굉음.

    쾅.

    튀어오른 파편이 아이언 캐슬 호에 적중. 아이언 캐슬 호가 크게 흔들렸다. 지상의 악룡과 맨몸으로 맞서야 할 모험가, 거대 연합의 안위가 심히 우려됐다.

    “칫.”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지원할 여력은 없었다.

    콰직.

    굉음과 동시에 아이언 캐슬 호의 유리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체, 체인워커 님!”

    유리창처럼 보이지만, 단순한 유리가 아니다. 방어력을 위해 보석, 크리스탈을 극도의 손재주로 깎아서 만든 한 폭의 거대한 방어막과도 같았거늘.

    “단순한 바람에 금이 갔다는 건가?”

    “이런 폭풍에 밖으로 나갔다가는……!”

    “살갗이 갈가리 찢겨도 이상하지 않겠어!”

    “고작 바람이 이런 위력을……?”

    허망한 물음에 답한 건 정령, 하이엘이었다.

    “고작 바람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이엘 님?”

    “이 폭풍엔 악의를 넘어선 살의가 담겨 있습니다.”

    세계수의 축복 효과.

    숲을 넘어서 {자연}, 그 자체를 이해하게 된 하이엘이었다. 덕분에 하이엘의 눈에는 보였다. 말 그대로 만물의 왕이 만물에게 휘두르는 무차별적인 폭력이.

    하이엘은 말을 아꼈다.

    ‘혈향이 짙다.’

    폭풍룡이 이곳까지 비행하며 얼마나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는지 느껴졌다. 지상에서 날뛰고 있는 늪지대 비룡의 행적도 크게 다를 바가 없을 터.

    체인워커가 결단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겠군요. 수리는 끝났나, 월스와일? 당장 마력포를 준비하게. 총대장님이 부재중이신 지금 우리에게 악룡을 정화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네!”

    철커덕.

    기계장치가 맞물려 가며 웅장한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아이언 캐슬 호에서 돋아나는 포신들.

    그 출력은 최대 출력.

    체인워커가 각오를 끝마쳤다.

    “우리는 오늘, 만물의 왕을 죽인다!”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총대장, 호열이 있었다면 극악무도하게 날뛰는 악룡조차도 구원할 수 있었을 테니까. 설령 저들이 이미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한들, 용서하고 갱생시켰을 테니까.

    체인워커가 이를 악물었다.

    ‘미천한 드워프인 나는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당신께서는 보란 듯이 해내셨을 테니까.

    그러나 자신들에겐 그런 긍지도.

    능력도 총대장도 없었다.

    그러니 이것이 지금의 최선이다.

    “발사 대기!”

    결단한 체인워커가 눈을 부릅뜬 순간이었다.

    흔들리는 포신의 조준을 필사적으로 맞추기 위하여.

    찰나를 노리던 순간이었다.

    “……?”

    깨진 크리스탈 창 너머.

    흩날리는 은발의 머리칼이 보였다. 폭풍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그토록 기다리던, 아니,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존재, 성전 연합군 총대장.

    호열이었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찬란한 은빛 머리칼이 길게 늘어져 허리를 넘어서 있었다.

    단지 그뿐이라면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자리를 비운 수일.

    호열에겐 어떤 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테니.

    호열의 등장과 동시에 평온을 되찾은 아이언 캐슬 호.

    단순히 마법으로 기류를 안정시킨 건가, 여겼거늘.

    아니었다.

    “……체인워커.”

    월스와일이 나지막이 체인워커를 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언제, 어느 틈이었단 말인가?

    폭풍룡이 피투성이가 된 것도 모자라.

    두 날개가 완전히 꺾여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으니까.

    이건 예상했던 풍경이 아니었다.

    “보고 있네.”

    그럼에도 체인워커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저 악룡은 되돌아올 수 없는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하이엘 님이라면 분명, 총대장의 뜻을 알고 계실 터.

    체인워커가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하이엘 님……?”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하이엘이 보였다.

    호열의 복귀에 누구보다 기뻐해야 할.

    하이엘이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한데 모았다.

    “주군.”

    그 한 단어를 나지막이 읊조리며.

    *

    거대 연합.

    플레이어들에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덕분에 믿기지 않아도 실감하게 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악룡이 죽었다.

    ……꿀꺽.

    저절로 마른침이 삼켜진다.

    박력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구르기만으로 일대를 완파시킨 늪지대 비룡이다. 육중한 덩치에 맞게 절단된 머리와 몸통의 존재감이 어마무시했다.

    울컥.

    목에서 솟구치는 피 분수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예상치 못한 상황 속.

    히사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방법이 없던 것 같습니다.”

    히사기에겐 믿음이 있었다.

    평상시의 총대장님이셨다면 분명히 악룡을 정화해 내셨을 터. 안토니움 인근 세계수를 지키고 있는 프로즈낙스가 살아 있는 증거였으니까.

    “악룡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 말입니다.”

    그러니 의문이었다.

    어째서 이번에는 정화를, 악룡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 걸까?

    늪지대 비룡이 이미 마을 하나를 짓밟아 놓았기 때문일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히사기가 고개를 저었다.

    진정으로 뉘우쳤다면 이보다 더한 악행조차 용서했던 총대장님이셨다.

    더군다나 드래곤은 그저 악과(惡果)에 휘둘려 폭주했을 뿐이라는 건 자신들도 알고 있는 바.

    다른 이유가 있다고 확신하던 찰나였다.

    쿠쿠쿠쿵.

    먼곳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추락하던 폭풍룡이 산맥 어딘가로 처박힌 것이었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였다.

    슈레이그가 헛웃음을 뱉었다.

    “이걸 역시 총대장님이라고 해야 하나……?”

    도대체 어떤 스킬, 마법이 땅과 하늘을 나는 드래곤을 동시에 처치할 수 있을까? 그것도 찰나의 순간,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에. 호열의 경지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오리무중인 건.

    “아니, 그게 아닌가……?”

    호열에게서 풍기는 낯선 기척이었다.

    외관 상으로 달라진 건 긴 은발의 머리칼밖에 없었다.

    허리를 가볍게 넘을 정도의 기장.

    덕분에 분위기가 달라져 낯설다고 느끼고 있는 걸까.

    고민하던 슈레이그가 중얼거렸다.

    “그런 것치고는 잘 어울리시는데.”

    마치 애초부터 장발을 고수하시던 분처럼.

    물론,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궁금하면 물어보면 될 일이야.”

    첫 만남 때부터 그랬다.

    호열은 쏟아지는 질문에 무엇 하나 숨기지 않았었다. 물론, 격식이 없다고. 예의를 갖추지 못한 자들의 질문 따윈 받지 않겠다고 차갑게 말씀하신 적이 있기는 했다만…….

    [광폭화] 해제.

    야성 대신 격식을 되찾은 남태민이 정정했다.

    “아니지, 여쭤보면 될 일이야.”

    확신한다.

    내가 알고 있는 호열 씨라면.

    누가 묻지 않아도 먼저 행동의 이유를 말씀하시겠지.

    악룡을 정화하는 게 아닌 사냥해야만 했던 이유를.

    두둥실.

    아이언 캐슬 호도 호열의 등장을 알아차린 모양.

    천천히 착륙하고 있었다.

    문득, 성전 연합군 소속 플레이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 살았냐? 이번에도 총대장님 덕분에?”

    “레벨 업 메시지가 뜬 걸 보면 그런 것 같네.”

    “야, 근데 저거 왜 아직도 그대로냐……?”

    “살아 있는 건 아니지?”

    “부정타는 소리 좀 하지 마라, 제발.”

    “……!!!”

    그 순간, 거대 연합의 세 길드 마스터.

    슈레이그를 비롯한 랭커들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어째서지?’

    악룡의 사체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악마를 처치할 때 피어오르는 녹색의 불꽃.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의 말에 따르면 ‘지옥의 불’이라는 것도.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시스템, 사망한 몬스터가 연기가 되어 흩어지는 현상도 포착되지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다만, 확실한 사실은…….

    “전리품, 안 챙기신 건가?”

    누구도 드래곤의 전리품을 습득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전투에서 호열은 압도적인 처치 기여도를 기록했다.

    “혼자서 쓰러트리셨잖아, 두 마리 모두?”

    왜, 자신들이 한 거라곤 악룡의 공격에 당하기밖에 없었으니. 처치 기여도 시스템에 따라 호열은 자동으로 전리품을 습득해야만 했다.

    히사기가 속으로 말을 뱉었다.

    ‘……전리품을 거절하신 건가?’

    그런 것도 가능한 건가?

    플레이어지만, 그런 시스템이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은 물론, 전리품을 마다할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의문이 더욱더 커지던 순간이었다.

    또각.

    호열의 발이 떨어졌다.

    허공을 걷는데, 귓가에 구두 소리가 울리다니.

    모두가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

    그와 동시에 호열이 사라지고 말았으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행동을 멈췄다.

    아이언 캐슬 호의 톱니바퀴마저 삐걱거리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레오니가 말을 더듬었다.

    “뭐, 뭔가 엄청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악룡을 두 마리나 처치하고, 전리품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사라질 이유는 없을 테니까. 슈레이그가 식은땀을 훔치며 거들었다.

    “맞지! 현실 쪽도 보통이 아니잖아, 지금?”

    하지만 남태민과 히사기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전리품을 습득하지 않는 행위는 이해가 됐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호열 씨니까.’

    청렴결백.

    명성에도.

    전리품에도 연연하지 않았던 호열을 봐왔기에.

    허나,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우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다.’

    등장 이후.

    단 한 번도 성전 연합군 측을 향하지 않은 호열의 시선이었다. 아니, 단순히 시선을 주지 않은 수준을 넘어 전리품과 마찬가지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표현이 옳았다.

    남태민은 평소의 호열을 떠올렸다.

    누구보다 인자하며 위기의 순간.

    몇 번이고 자신을 구원했던 ‘한 줄기 빛’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 순간, 호열에게서 자비는 느껴지지 않았다.

    의문스러우면서도 의문스럽지 않았다.

    그래, ‘한 가지’만 인정하면 모든 게 맞아떨어졌으니까.

    ‘지금의 호열 씨가 내가 아는 호열 씨가 아니라면.’

    남태민은 코끝에 남은 낯선 향을 떠올렸다.

    더없이 이질적인 향.

    그와 마찬가지로 더없이 ‘이질적인 이름’이 하나 떠올랐다.

    그래, 어느 순간부터 호열의 뒤를 따르던 ‘그 이름’.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남태민이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설마.”

    *

    어나더 스페이스 호.

    절망적인 카운트는 새롭게 갱신되고 있었다.

    “현재까지 포착된 마안의 수는 642개입니다.”

    실로 절망적인 숫자.

    그러나 매섭게 증가하던 카운트가 다시 영점.

    제로로 되돌아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콰직.

    일제히 터져나가는 지구를 둘러싼 십좌의 마안.

    “……선배, 아무래도 카메라에 이상이 생긴 것 같은데요?”

    “뭐? 방금 점검하고 왔는데? 왜?”

    “그, 그게 마안이 갑자기 화면에서 사라졌어요!”

    “뭐, 뭐라고?!”

    어나더 스페이스 호가 당황하던 순간.

    같은 시각.

    지구에는 기사가 떠올랐다.

    .

    .

    .

    [속보] 이호열 등장, 역전의 불씨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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