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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54화 (454/489)

◈ 454화. 어둠이 깔리다 (3)

나는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오가며 기이를 향한 탐구.

그러니까, 들려오는 소식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리고 복귀했다.

[시공간의 사교장 최상층에 진입합니다.]

시간이 필요했거든.

복잡한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시간이. 제시에게는 사교계를 멀리하라는 신신당부를 해놓고는, 나는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한숨이나 돌리고 있다니.

‘주둥이께서도 할 말이 없으신 모양이군.’

달칵.

변명하는 대신 찻잔을 꺼냈다.

어느때처럼 잔을 채우고 녹차 티백을 우려냈다.

기다리면서도 머리는 멈추지 않았다.

‘상황 참 지랄 맞다.’

초월자, 옥시딘.

류오쥔춘의 [폭군] 왕관을 거머쥔 그는 화려하게 날뛰고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고작 플레이어 수준이었어도, 영향력만큼은 플레이어의 한계를 가뿐히 능가했던 류오쥔춘.

‘자기 능력이든, 클래스 능력이든.’

어쨌거나 중국이라는 강대국을, 십수억의 인구를 멋대로 쥐고 흔들었던 건 사실이니까. 그런 [폭군]의 능력이 초월자에게 쥐어진 상황이었다.

4가문, 가주들이 보고해 왔다.

-“옥시딘이 대괴수를 길들였습니다.”

대괴수.

쑥대밭이 된 아르카나 대륙에서 살아남은 몬스터를 뜻했다. 악마는 물론, 마왕조차 쉽게 건드리지 못한 녀석들이다.

그 레벨이 최소 1,000부터 시작하는 초고레벨 몬스터인 게 당연하다.

-“그중에는 저희조차 알지 못하는 대괴수도 존재했습니다. 아득한 과거,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던 놈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타이탄처럼 말입니다.”

거기엔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흉조에 삼켜져 삭제된 몬스터도 포함되어 있었다.

과연,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었다.

‘류오쥔춘도 골치를 썩혔는데.’

옥시딘은 한 술 더 떴다. 사실, 옥시딘의 전력을 목격했어도 4가문 가주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내가 명령만 내린다면 옥시딘, 그와 전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할 정도였거든.

다만.

“불필요한 소란은 피하는 것이 좋겠지.”

전쟁에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른다.

4가문조차 전쟁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이미 큰 세력을 확보한 옥시딘이었다.

현재 알려진 건 대괴수 군단에 불과하다고 한들.

‘초월자들을 포섭한 것처럼.’

물 밑에서 다른 세력과 연합을 구축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일방적으로 짓밟기엔 너무 큰 세력이 됐다는 뜻.

누군가는 그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옥시딘은 어디까지나 굴러들어 온 돌에 불과했으니까.

“전쟁에서 비롯되는 감정은 악마의 힘이 되는 법이니.”

나의 주적은 어디까지나 악마거든.

베히모스의 아가리가 다시금 활동을 시작했다. 베히모스의 아가리를 감시하는 드워프 조종사, 거너에 말에 따르면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했다.

목구멍이 쉴 새 없이 꿀렁거리는 게 마치.

‘구역질을 참는 듯한 모양새라.’

어쩌면 마계는 이미 악마족 몬스터로 만원일지도 모른다.

허나,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아이언 캐슬 호에서도 비보가 전해져 왔거든.

-“총대장님, 악룡을 포착했습니다.’

악룡이 동시에 두 마리씩이나.

악룡을 정화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최상위 치유마법, 『등가교환의 증명』.

목숨을 바쳐서 드래곤들이 삼킨 악과를 정화하면 된다.

‘뭐, 목숨은 바치는 거야 내겐 어렵지 않지.’

칭호, [최후의 모험가]가 있으니까.

다만, 재사용 대기시간이 문제였다. 현실의 시간으로 무려 24시간. 악룡 한 마리를 정화하면 아르카나 대륙 시간으로 나흘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발을 붙일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주제를 잘 안다.

주제를 알고 있기에.

나의 공백에서 비롯될 후폭풍도 짐작할 수 있다.

나흘이라.

당장 베히모스의 아가리에서.

악마가 쏟아져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나흘이라…….

아르카나 대륙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실에서도 실시간으로 속보가 쏟아진다.

현실에 떠오른 십좌의 마안.

녀석들이 유발한 상태이상 [타락] 때문이리라.

샤이닝 길드의 드미트리가 전사했다.

최상위 랭커가 균열 내부에서도 아니고, 도심에서 사망한 건 대격변 이후로 처음이었다. 드미트리는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악마의 발목을 붙잡았다고 했다.

-“……덕분에 저흰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드미트리가 시간을 번 덕분.

더 큰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출탑 중이던 선임 마법사들이 혼혈의 악마를 처치했으니.

나는 읊조렸다.

“드미트리 말콤, 그대의 긍지를 잊지 않겠다.”

그리고 시민들의 인터뷰도 잊지 말아야겠지.

-“악마는 분명, 이호열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놀랍지 않았다.

내가 마계에 의문을 품듯.

상위 마왕도 현실에 궁금한 게 얼마나 많겠냐?

내가 너희를 경계하듯.

너희도 나를 경계하고 질문을 던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방법이 틀렸을 뿐이지.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친히 말을 섞어줄 의향이 있었거늘.”

달칵.

나는 그쯤에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정말, 인정하기 싫은데 말이야.

솔직히 이 순간,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젠장.’

앞서 언급한 문제로 끝이 아니다.

태초의 악, 칠죄종 오만, 마지막으로 레이먼 션까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세력들이 하나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동안 나는 정말 최선의 판단을 내린 걸까?’

만약, 내가 조금 더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면.

세니오스 원로 마법사가 영면에 드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르콘이 두 다리를 잃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제국의 황제도 무사하지 않았을까.

드미트리를 비롯한 플레이어들도 목숨을 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역시, ‘나’로서는 부족한 게 아닐까?

말했다시피 주제 파악은 내 특기다.

그렇기에 나, 이호열은 간과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껏 생존하고 발버둥 쳐올 수 있었던 건.

전부 그랑펠 덕분이라는 걸.

그러니까.

이제는 결단을 내릴 때였다.

나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어둠의 이해 (저주) : 적합한 마력 친화력을 대폭 상승시켜 준다. 단, 적합한 마력의 원천이 되는 과거와 직면해야만 한다. - 현재 적합한 마력 친화력 : 40%]

[천상천하 유아독존 (40%) : 불세출, 여신조차 모독하는 희대의 천재.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재능을 발휘한다.]

4할의 이해도를 쌓는 동안.

그랑펠에게 관해서는 쥐뿔도 알지 못했다고 한들.

체감할 수 있었다.

이해도와 숙련도가 상승할수록.

그랑펠의 존재감이 더더욱 커지고 있다는 걸.

‘비유하자면 [흑화]에 가까워지는 거겠지.’

어쩌면, 나는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말이야.

흑화보다 두려운 게 생겼거든.

그래. 나, 이호열의 오판이 불러올 대가였다.

‘몇 번이고 말했잖아?’

어쩌다 보니 짊어진 짐이 많아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짐을 짊어질 수 있는 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을 것 같거든.

그러니까 나는 [어둠의 이해]를 발동했다.

스스스.

적합한 마력이 솟아오른다.

그런 적합한 마력에 휩싸이고 있자니 문득, 잔상이 스쳐 간다.

적합한 마력에 집어삼켜 진 썩은 주술사, 유라이아.

그랑펠은 나의 생각보다 자비롭지 않다는 진실이.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나만큼은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겠어?

나는 믿는다.

설령 자비롭지 않다고 하더라도.

고고한 긍지는 절대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아니, 설령 꺾인다고 하더라도.

‘내가 바꿀 수 있으니까.’

어둠의 이해의 효과는 그저 그랑펠의 과거를 목격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랑펠의 잔혹한 과거에 개입, 나비효과로 현실마저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네가 어떤 과거를 숨겼다고 한들.

어떤 끔찍한 과거라고 한들.

괜찮다, 그랑펠.

결국에는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한다는 걸.

흑역사를 겪어본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윽고 메시지가 점멸했다.

[저주, ‘어둠의 이해’로 진입합니다.]

*

지상에는 성전 연합군.

상공에는 아이언 캐슬 호.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전력은 상당했다.

“상황 참 좆 같네.”

“상황은 이래도, 말투라도 좀 순화하는 게 어때?”

“……?”

“맞아, 언니! 언니도 이제 좀 위엄을 가져야지!”

“거, 상황 참 뒈지게 아름답네.”

“……그거 맞아?”

레오니는 아까부터 점멸하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악룡, ‘늪지대 비룡, 이그자일스’이 출현합니다.]

제대로 된 날개도 없을뿐더러 악의 또한 극도로 자제하고 있던 악룡, 유낙서스에게 달려들었다가 한동안 마탑에 신세를 졌던 레오니, 히사기, 남태민이었다.

그런데.

그 차원이 다른 악룡이 하나가 아니었다.

고개를 들자 아이언 캐슬 호를 향해 접근하는 형체.

[악룡, ‘폭풍룡, 카산드워스’이 출현합니다.]

레오니가 결국 언어 순화에 실패했다.

“이런 씹, 한 마리로도 뒈지게 생겼는데? 두 마리라고? 진짜 정도껏 해라, 미친 새끼들아. 아르카나 대륙이 됐든, 현실이 됐든. 제발 한 쪽에서만 지랄하란 말이야!!”

드미트리의 사망 소식을 비롯한 현실 소식을 접했다.

남 이야기 같지 않아서 목구멍이 먹먹해지던 상황이었거늘.

그런 와중에 악룡이 한 마리도 아니요, 둘이나 튀어나온 것이었다.

지지직.

드워프가 나눠준 복잡한 기계 장치.

쉽게 표현하자면.

무전기에서 체인워커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이건 예상에 없던 상황이군.”

“그러게요, 체인워커 님.”

-“계획대로라면 늪지대에 뒹굴고 있는 녀석에 화력을 집중해야 했는데. 또 다른 악룡이 난입할 줄이야. 폭풍룡이라고 했나? 과연, 중심조차 잡기 힘들군.”

남태민은 대검을 치켜들며 대꾸했다.

“일단, 각자 알아서 한 마리씩 맡는 수밖에요!”

악룡 토벌.

당초의 계획은 틀어진 상태였다.

악룡 토벌에 마침표를 찍는 건.

어디까지나 악룡을 정화할 수 있는 호열이 있어야만 했으니까.

히사기가 냉정하게 계획을 수정했다.

“총대장님이 부재 중이신 지금. 저희에게 악룡을 정화할 수단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선 악룡을 사냥할 수밖에 없겠죠.”

슈레이그가 세검을 뽑아 들며 덧붙였다.

“늪지대 비룡, 이그자일스는 이미 작은 마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어. 발생한 인명피해만 하더라도……. 대충 백 명이 가뿐하게 넘을 것 같다.”

“하늘에 있는 녀석은?”

“확인은 못 했지만, 폭풍을 일으키는 게 사실이라면…….”

쿠구구궁.

스산한 공기가 슈레이그의 말에 무게를 더했다.

“그 수십 배는 죽일 수 있겠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죽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득한 과거. 드래곤의 유희에 아르카나 대륙이 들썩였다고, 용마대전의 경과를 기록한 마법 서적에 똑똑히 적혀있었거늘. 그런 드래곤이 악룡이 되어 오직 악의를 위해 날뛴다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거지?’

히사기가 입술을 깨물던 찰나였다.

“오, 옵니다!! 1차 패턴입니다!!”

콰콰쾅.

“……씹!”

“대지가 박살 났다고?”

“다들 부상자를 수습해!”

탐색전 따윈 없었다.

첫 공격부터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

다시금 깨닫게 된다.

유낙서스.

그는 더없이 인자하며 위대한 엘더 드래곤이었다는 것을.

“이래선 택도 없잖아.”

주륵.

남태민은 찢어진 뺨을 지혈하며 몸을 일으켰다. 늪지대 비룡, 이그자일스. 그저 몸을 한 바퀴 굴렀을 뿐이었거늘. 일대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박살이 났다.

“……크헉.”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성전 연합군이 보이는가 하면.

잔해에 깔려 널브러진 채.

호흡도 미동도 없는 플레이어들도 보였다.

으득!

[스킬, ‘광폭화’를 발동합니다.]

발동과 동시에 극도로 증폭되는 [야성].

광폭화를 통제할 수 있게 된 남태민이었다. 그래서일까. 전황이 더욱 냉정하게 보였다. 마치 맹수의 우두머리가 전황을 파악하듯. 그런 남태민의 야성이 경고하고 있었다.

‘설령 이긴다고 해도.’

아군은 극심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남태민은 생각했다.

총대장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셨을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가 맡는다.”

“뭐?”

분명 혼자서 모든 걸 떠맡으셨겠지.

물론, 자신에게 그럴 능력은 없었다.

남태민이 덧붙였다.

“내가 어그로를 끌겠다고.”

“너, 미쳤어?”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어그로 담당은 어디까지나 압도적인 방어력을 가진 탱커의 몫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방어력이 높은 탱커라고 한들, 저 일격을 견딜 수 있을까?

“막을 수 없다면 피하면 그만이야.”

“!!!”

회피로 탱킹을 담당하겠다. 그게 얼마나 꿈 같은 이야기인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철민이 형과 몇 번씩이나 대화를 나눠서 알고 있었다.

‘형이 들었으면 기절을 했겠지.’

그러나 해내야만 했다.

방법은 그뿐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이미 전투는 시작된 상황.

서로 엇갈리는 이견을 조율할 여유는 없었다.

쾅.

남태민이 대검으로 땅을 내려찍었다.

그 반발력으로 튀어 오르는 신체.

매서운 속도로 늪지대 속 비룡에게 쇄도하던 순간이었다.

……툭.

악룡의 거대한 머리가 절단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폭풍룡, 카산드워스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모든 게 찰나의 순간.

은빛의 섬광이 비추자 벌어진 일.

고개를 돌리자 허공에 흩날리는 형체가 있었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차림새.

길게 늘어진 은빛 머리카락.

그러나 무엇보다 익숙하지 않은 건.

남태민의 콧잔등이 움찔거렸다.

“……호열 씨?”

호열의 모습을 띤 사내에게서 풍겨오는 낯선 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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