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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53화 (453/489)

◈ 453화. 어둠이 깔리다 (2)

플레이어가 빙의를 두려워하는 이유?

간단하다.

당사자가 됐든, 마주하는 이가 됐든.

마주하는 순간, 무너지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균열에서 생사를 함께하던 동료에게 칼을 겨눠야 한단다. 방금까지 웃고, 울던 동료가 그저 악마에 빙의되었단 것만으로.

악마가 스스로 빙의자의 몸에서 떠나지 않는 이상.

빙의를 해제할 방법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드미트리는 잊을 수 없었다.

‘또냐?’

자신의 손으로 먼저 떠나보낸 길드원들을.

명실상부, 최강의 길드 중 하나였던 샤이닝.

대격변 이후에도 최전선에 나서며 악마와 조우해왔다.

‘한 손가락을 넘어선 숫자를 세지 않았는데.’

자신은 물론, 누가 빙의당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악마에 빙의당한 플레이어를 처치하고 양심에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균열에 진입하는 이들은 각오를 끝마쳤을 터. 그건 플레이어 사이 모종의 합의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상황은 [빙의]와 달랐다.

스왁.

이 드미트리 님께서 압도당하고 있으니까.

‘불가능해.’

기껏해야 300레벨 대의 길드원이다.

550레벨을 돌파한 나를 압도한다고?

드미트리는 막말로 300레벨 대 플레이어 서너 명이 달려들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건 플레이어가 악마에 [빙의]를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빙의한 악마가 마왕급이 아니고서야…….’

250레벨의 간극은 넘어설 수 없다는 의미.

그러나 이건 빙의가 아닌 [타락]이었다.

그 외형부터가 완전한 악마로 변했기에.

녀석의 강함을 쉽게 추측할 수 없었다.

쾅.

드미트리는 거대 둔기로 공격을 막아냈다.

300레벨치고 스킬 숙련도가 뛰어났던 길드원이었다.

나름 손재주가 좋았지.

그러나 타락한 현재.

그 특징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답을 갈구한다고 했나?’

그저 스쳐 지나갔던 메시지에 걸맞게.

“말해라. 이호열에 관해서!”

닥치는 대로 팔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강했다.

제대로 숨을 고를 틈조차 없을 만큼.

드미트리는 주변을 바라봤다.

‘다른 녀석들은 무사한가?’

악마를 제외하고, 동행하던 길드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최악을 상상하며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했다.

‘전부 당할 때까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거라면.’

나와 놈 사이엔 엄청난 격차가 있다는 것.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드미트리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단 건가?’

이래서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건데.

이거 괜히 카밀라에게 기회를 양보했다가.

개죽음을 당하게 생겼군.

‘그것도 젠장 할.’

내가 이호열, 그 재수 없는 성전 연합군 총대장님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바람에 말이지. 악마는 반응이 만족스럽지 못한 건지 더욱 길길이 날뛰었다.

쿠궁.

드미트리는 필사적으로 틈을 노렸다.

숙련도 마스터에 이른 전사의 기본 스킬.

[카운터 스매쉬]를 발동했다.

“새끼야. 좀 닥쳐봐. 나도 생각해 보고 있으니까!!”

퍽.

완벽한 적중이었다.

악마의 목이 360도로 돌아갈 정도로.

그러나 완벽한 카운터라고 해도 의미가 없었다.

끅.

잠깐 멈칫하더니.

드드득.

기괴하게 뼈가 맞춰지는 소리와 함께 회복한다.

악마는 드미트리를 보고 웃었다.

목소리엔 기대감이 가득했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그럼 기다릴게. 생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하지만 나를, 그분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줘. 알겠지? 실망시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하.”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괴한 반응이다.

하지만 드미트리 역시, 샤이닝을 이끌어온 간부였다.

막다른 길목에 처한 상황, 두뇌가 평소보다 빠르게 회전했다.

‘타락, 빙의의 상위호환이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간단했다. 상태이상, 타락을 퍼뜨린 건 녀석이 ‘그분들’이라 칭하는 ‘상위 마왕’의 마안이었으니까. 그래, 밤하늘에 떠올라 있는 ‘저거’다.

드미트리가 마안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어쩌면, 이건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타탁!

드미트리의 발이 매섭게 움직였다. 붕괴 균열, 무너진 잔해 사이를 육중한 몸이 가로질렀다. 악마가 그 뒤를 쫓으며 말을 걸어왔다.

“기억의 단서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 거야? 좋아!”

아닌데? 튀는 거다, 등신아.

말대꾸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았다.

전속력으로 내달렸는데, 거리가 조금도 벌어지지 않았다.

미묘한 간격이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봐주고 있군.’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는 등신은 아니거든.

그러니 손바닥 안 추격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문득, 들려오는 외침.

“드, 드미트리다!!”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현실.

균열 속이 아닌 균열 밖.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들이 존재하기에.

“반대편은 악마인가?”

“우욱. 뭐가 저렇게 징그럽게 생겼지?”

“어쨌든 힘내요, 드미트리!!”

터지는 플래시.

어째 다들 상황파악이 덜 된 것 같은데.

다들 내 진지한 표정을 봐라.

지금이 팔자 좋게 동영상을 찍을 때처럼 보이나.

‘뭐, 됐어.’

그러면서도 드미트리는 목적을 잊지 않았다.

어느새 등 뒤엔 균열이 있었다. 드미트리는 위치 정보를 잊지 않았다. 붕괴 진행도 37퍼센트, 붕괴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는 신규 균열이었다.

‘위치를 기억해 두길 잘했어.’

정작 내 무덤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 드미트리는 악마를 균열에 봉인할 생각이었다.

[타락]과 [빙의]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녀석은 균열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거다.’

균열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오직 플레이어, 그리고 아르카나인뿐. 악마는 어디까지나 악마족 몬스터 취급을 받았으니까. 생긴 걸 봐라, 저게 어디 플레이어겠는가?

‘균열이 붕괴하기 전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드미트리가 말했다.

“따라와라.”

[균열, ‘무너진 빌딩 초소’에 진입합니다.]

저벅.

‘다행이다.’

내부에 플레이어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절반은 성공이었다. 녀석이 뒤따라 균열에 입장하고, 시민들이 그 모습을 전부 촬영했다.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겠지.’

더도 말고, 내 실연 사진이 퍼지던 속도만 돼도 충분하다. 그러면 이호열이 됐든, 성전 연합군이 됐든, 마탑의 선임 마법사가 됐든. 눈치 빠른 녀석들이 여기로 집결할 테니까.

인정하기는 싫다만…….

‘이호열이라면.’

마왕을 사냥하고, 악크샨 늑대도 부리는 이호열이라면.

나와는 다르게.

눈앞의 악마에게서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이제부터는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쳐야 했다.

침묵이 이어지자 녀석도 알아차린 모양.

섬뜩한 목소리가 울린다.

“너, 나를 속였구나?”

“새끼, 이제 알았냐? 뭣보다 아까부터 모른다고 했잖아?”

“감히 나를.”

“감히가 아니라 믿은 새끼가 잘못이지.”

“감히 그분들을.”

잔뜩 화가 난 저 악마 새끼를 상대로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솔직하게 견적을 낼 수 없었다. 그야 악마와 마주한 순간부터.

[상태이상, ‘공포’가 발생합니다.]

‘……젠장.’

몸도 정신도 말을 듣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드미트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를 지탱하고 있는 건 체면이었다.

‘사실 나한테 체면이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만.’

기자 새끼들한테 워낙 시달렸어야지.

그러나 체면치레를 위해서라도.

마지막만큼은 뭐라도 한 건 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어?

기자 새끼들은 물론.

파파라치 놈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하나는 답해주지. 이호열을 찾을 필요는 없다.”

“……뭐?”

“여기, 이 드미트리 님이 있으니까!!”

위험천만한 악마를 균열에 봉인한 위대한 플레이어로 기억될 나, 드미트리 말콤이 여기 있으니까. 지금만큼은 이호열에게 관심을 끄란 말이다.

콰쾅!

.

.

.

“……!!!”

그러나 드미트리는 간과하고 있었다.

메시지에 떠오른 건 그냥 악마가 아닌.

‘혼혈의 악마’였다는 사실을.

질질질.

악마가 한 손으로 차갑게 식은 드미트리의 발목을 붙잡고는 균열 밖으로 빠져나왔다. 경악한 시민들을 바라봤다. 그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우둔한 자들아. 그분들께서 물으시는구나.”

“……?”

“너희는 이호열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

AAU는 혼란에 빠졌다.

“혼혈의 악마. 붕괴하지 않은 균열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악마족 몬스터. 출현 조건은 플레이어가 상태이상, ‘타락’에 지배되었을 경우입니다…….”

“빙의와 다른 게 뭐죠?”

“빙의보다 압도적으로 후폭풍이 강할 겁니다.”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가 말을 이었다.

“빙의의 주체는 하급 악마, 임프를 비롯한 크고 작은 악마들이었죠. 그러나 타락의 주체는 마안입니다. 마계의 진정한 지배자들이라 불리는 십좌, 상위 마왕이란 말입니다.”

미합중국 지부장, 조슈아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더없이 소중한 전우인 드미트리를 녀석의 손에 잃었으니.

샤이닝의 드미트리 사망.

그 충격은 며칠이 지났음에도 쉽게 가시지 않았다.

사태를 초래한 원흉이 완벽히 사라졌다면 모를까. 플레이어의 숭고한 희생이 무색하게도 마안은 세계 각국, 상공으로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동시에 타락에 관한 정보도 속속들이 보고됐다.

“마탑과 여신교단 측에서도 긴밀한 협력을 요청해 왔습니다. 아르카나 측이 먼저 요청을 해온 건 성전 연합군 출범 이후에도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영국 런던 지부장.

베이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았다.

“그들의 상황도 우리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테니.”

.

.

.

마탑.

크리스탈 홀.

원탁회의.

“견습 마법사의 출탑을 허가하겠습니다.”

탑주, 마르셀로가 결단을 내렸다.

타락, 마탑의 지혜로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위협과 마주한 지금.

마탑 역시 모든 걸 걸고 위협과 맞서야만 했다.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가 중얼거렸다.

“……이거 마음이 편하지 않군요, 뱅그릿 선임.”

견습 마법사의 출탑마저 허가된 상황.

아무리 벤쉬가 요주의 인물이라고 한들.

선임 마법사인 벤쉬의 출탑 신청서에 불합격이 떨어질 일은 없었다.

아니, 단순한 출탑을 떠나서 이제는 처지가 바뀌었다. 숙련 마법사와 견습 마법사들을 지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선임 마법사들이었다.

뱅그릿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느껴지는 책임감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험가들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인원을 이끌 수 있는 걸까요?”

강함과 지도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정말로 막중합니다. 제가 짊어진 무게가.”

지도라면 몰라도, 지휘라니.

마탑의 마법사는 단체, 집단행동에는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뱅그릿이 크리스탈 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숙련 마법사들이야, 저희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능력이 충분하지만……. 견습 마법사들은 정말로 햇병아리잖아요? 같은 견습 등급이라고 해도 그 격차가 크고…….”

그러니 지금의 위협이 더더욱 와 닿았다.

“타락, 대체 얼마나 위험한 상태이상이기에…….”

뱅그릿이 어째 조용한 벤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가 흠칫했다. 아무래도 벤쉬는 전혀 다른 이유로 마음을 졸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덜덜덜.

그 손가락이 떨리고 있지만, 공포로 떨리는 게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금단 현상…….

깊은 상실감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뿐이었으니까.

“무지막지한 실전 기회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아니, 이 수석님께서는 대체 어디에 계신 걸까요? 뱅그릿 선임, 혹시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습니까? 물론, 이 수석께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는 제가 알 이유도 없고, 걱정하지도 않습니다만……!”

벤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째서 하필이면 결전용 마도구, ‘소형 마력 태양’을 가넷 홀에서 반출하신 거랍니까? 그깟 마도구, 이 수석님에겐 쓰나 마나 큰 차이가 없으시면서……!”

그렇다.

현실에서도,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호열이 자취를 감춘 지 수일이 지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탈 홀의 청중석.

직위로는 아직 숙련 마법사인 제시 하인네스가 아공간을 뒤졌다. 호열이 남긴 서신이 손에 잡혀 왔다. 제시는 마지막 추신을 몇백 번째 곱씹어 읽는 중이었다.

──────

추신, 그럼에도 사교계는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다.

──────

어째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신 걸까?

혹시, 이 수석님께서는 지금 시공간의 사교장에 계신 게 아니실까? 그렇다면 내가 만약, 조언을 무시하고 시공간의 사교장에 입장한다면…….

이 수석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고깔모자가 읊조렸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아라, 제시.

“……네.”

제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그런 대마법사의 직감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이 순간, 호열은 시공간의 사교장에 있었으니까.

.

.

.

시공간의 사교장.

최상층.

누군가 접근할 수도, 방해할 수도 없는 공간.

사내가 눈을 떴다.

[저주, ‘어둠의 이해’ 이해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스킬,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동시에 은빛 장발의 머리칼이 깔리듯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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