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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52화 (452/489)
  • ◈ 452화. 어둠이 깔리다 (1)

    비공식 시공간 결투 종료.

    “옥시딘이라. 명심하겠습니다.”

    “곧바로 행적을 추적하겠습니다. 클라우디시여.”

    “부디 평안하시기를.”

    초월자들이 털어놓은 계략, 초월자 동맹.

    모든 판을 계획했다는 옥시딘을 추적하기 위해 4가문 가주들이 움직였다. 그럭저럭 순순히 협조했으니, 사교장에 내려진 축객령도 해제하는 게 인지상정.

    “으으으, 도망쳐.”

    그 나이대 어린아이답게.

    요란하게 허우적거리는 번개의 아이를 시작으로.

    모든 초월자가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도망치듯 퇴장했다.

    ‘그래도 당분간은 잠잠하지 않을까.’

    뭐, 그럴 수밖에 없겠지.

    다들 목격했잖아?

    썩은 주술사, 유라이아.

    그녀가 적합한 마력에 잡아먹히는 광경을.

    『상위 흑마법, 끝나지 않는 악몽』.

    정신을 무너트릴지언정 대상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가할 순 없었다.

    하지만 유라이아는 주술사였다.

    덕분에 악몽이 흑마법이라는 걸 간파하고 빠져나오려고 시도.

    그 과정에서.

    ‘재수가 없어도.’

    그랑펠의 한없이 깊은 어둠과 마주한 것이었다.

    나는 적합한 마력에 휩싸여 사라지는 유라이아를 목격했다.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그랑펠은 자비로우면서도 자비롭지 않다.

    그랑펠이 설정한 기준을 넘는 이에게는 가차 없는 처분이 내려진다.

    이번 경우엔 그 기준이라는 게 더없이 민감했던 거겠지.

    ‘적합한 마력은 과거와 배경에서 비롯되니까.’

    유라이아.

    그녀가 엿보려고 했던 건 그랑펠의 잔혹한 과거와 배경이었을 터.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유라이아를 집어삼킨 건 그랑펠의 적합한 마력이었을까.

    아니면, 그랑펠이었을까.

    ‘이쯤 되니까 확신할 수 없어.’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역시, 나밖에 없나?’

    그랑펠의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건 나.

    이호열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랑펠의 잔혹사가 동시에 내게는 끔찍한 흑역사였으니까.

    ‘그러니까 책임져야지.’

    그게 질풍노도의 시기를 극복한 어른의 긍지 아니겠냐?

    시공간의 사교장.

    남은 건 나와 남쪽 바다의 마녀, 메어리뿐이었다.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메어리는 내심 걱정하고 있을 거다. 적합한 마력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마탑에 머물며 흑마도학에 관한 지식을 습득했을 메어리였으니까.

    그러나 우려할 것 없다.

    나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다음 일정으로 복귀하지.”

    어떤 풍파가 불어와도 나는 충실하게 일정을 따라 움직일 수 있거든. 그러니까 메어리, 당신도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길 바란다.

    “저는…….”

    물론, 메어리의 행선지는 끝까지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아차.’

    그러면 들르는 김에 ‘이것’도 좀 부탁해야겠군.

    *

    “……!”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었다.

    -고양이도 너보다는 덜 잔단다, 제자여.

    익숙한 잔소리였다.

    “으으.”

    제시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누워있던 걸까.

    팔과 다리, 전신에 근육이 빠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엄살은, 근육은 원래도 없지 않았느냐.

    “꼭 말을 하셔도.”

    제시는 샐쭉 입술을 삐쭉이고는 주위를 살폈다. 틀림없다. 여긴 마탑 치유학파의 별실이다. 애써 마지막 기억을 되살려 보자 시공간의 결투에 생각이 닿았다.

    “……맞다. 결투는요?”

    고깔모자가 들썩거렸다.

    -그런 꼴로 쓰러졌으면서 용케도 기억하는구나.

    계승되는 클래스, 대마법사.

    대마법사의 그릇에는 영겁의 세월 동안 진리를 탐구해 온 선대 대마법사들의 지식이 담기게 된다. 방대한 지식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그릇의 크기가, 정신력이 극도로 성장한 제시였다.

    덕분에 기억은 선명했다.

    “성공했을까요? 저희가 떠올린 약점이요!”

    제시의 말에 고깔모자가 씰룩거렸다.

    -저희라고 하면 고깔모자 속 노친네들의 버릇이 나빠진다, 제자야. 그 괴상한 생물체를 쓰러트린 건 우리의 지식이 아니라 순전히 네가 습득한 지식이지 않았느냐?

    괴상한 생물체, 우르스.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녀석이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맞고도 멀쩡하지를 않나. 헬파이어 속에서도 그을리는 기색조차 없지를 않나.

    그 어떤 마법을 발현해도 무한히 재생하던 목인(木人)을 쓰러트릴 약점. 그건 과거의 지식이 아니요, 이 시대에 집필된 마탑의 논문에 적혀있던 지식이었다.

    비약초의 육성법.

    제시는 연구 서적에 명시되었던 영약.

    마슬로바의 특징을 잊지 않았다.

    단순히 잊지 않는 걸 넘어서 응용했다.

    “그래서, 결과는요!”

    고깔모자가 고개를 젓듯 흔들린다.

    -유감스럽게도 나도 그 결말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너는 패하지 않았다, 제자야. 본래 예정됐던 재결투가 취소되었다고 하는 모양이니.

    “재결투가 취소요?”

    -그래, 분명 괴생물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거겠지.

    “……흐음.”

    그럴까, 싶으면서도.

    결과를 알지 못하니 어딘가 개운하지 않았다.

    그래, 확인해 보자.

    제시가 아공간 속 스마트폰에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별실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레, 잠깐 환자 좀 돌봐줄 수 있을까?”

    ……클레?

    잠깐, 클레라면?

    설마, 비약초의 육성법 저자 클레 오디아?

    “그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클레. 예상치 못한 만남에 놀란 건 제시가 아닌 클레였다. 클레가 상체를 일으켜 세운 제시를 보고 방방 뛰었다.

    “어, 언제 일어나셨어요? 그보다 아직은 안정을……!”

    진리는 물론, 기이를 향한 탐구를 또한 소홀히 하지 않는다.

    새 시대의 흐름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마탑이었으니.

    시공간의 결투 소식은 마탑에도 전해졌다.

    클레가 제시를 눕히며 말을 이었다.

    “제시 하인네스 님이시죠? 결투에 임하시는 모습 지켜봤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견습 마법사셨던 게 얼마 전인 거 같은데, 어느새 선임 마법사들님도 감탄할 경지에 오르시다니.”

    클레가 황급히 답했다.

    “아뇨! 아직 저는 멀었는걸요!”

    “겸손하셔라.”

    “정말요! 그보다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네? 제가요?”

    설마, 내가 부상을 돌봐줬다고 착각한 모양인가? 그런 오해라면 방금까지 제시를 돌보던 동료 치유학파 마법사가 안쓰러워지는 상황이다.

    그러나 오해가 아니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클레 오디아 숙련 마법사님이 집필하신 서적, 비약초의 육성법이 결투에서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정말로요!”

    “네, 네, 네?!”

    클레는 진심으로 놀랐다.

    비약초의 육성법.

    누가 펼쳐나 볼까, 싶을 정도로.

    제목부터가 지루한 서적.

    오죽했으면 지브릴 양도 그런 말을 했을까?

    -“이 수석님 이름이 힘을 못 쓸 때도 있군요, 클레 양. 보세요, 완전 새 책이잖아요? 물론, 최근에 출간된 마법 서적이 전부 이 수석님의 검수를 거치긴 했지만 이건 너무 심한데. 어디, 더 잘 보이는 장소에다가…….”

    연구의 가치는 주목도로 평가되지 않는단다.

    벨리에 선임께서 말씀하셨기에.

    클레는 상처를 받지 않았지만.

    오히려 지브릴이 자신의 연구가 묻힌 것처럼 분통을 터트려 줬었지.

    그런데, 그런 비약초의 육성법을 읽어봤다니.

    “정말, 정말 제 서적을 읽어보신 건가요?”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묻는 클레.

    “네! 정확하게는 1,324페이지…….”

    “거기라면 분명 마슬로바에 관한 이야기죠?”

    “맞아요! 마슬로바의 진딧물에 관한 정보요!”

    고깔모자는 요란을 떠는 두 마법사를 냉소적으로 바라봤다.

    마법사.

    타고나는 성정부터가 서로 가까이 지낼 수 없는 족속.

    -그래. 지금이라도 친하게 지내보도록 해라.

    필시 머지않아 그 사이가 틀어질 테니.

    -내가 친구가 없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부러워서도 아니다.

    고깔모자가 오해를 살라, 제자에게 덧붙인 순간이었다.

    클레가 다급하게 어딘가로 달려가더니 봉인된 편지를 가져왔다.

    “아차, 제시 양이 깨어나면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제게요? 어떤 분이요?”

    혹시 황혼의 마도 일족이자 남쪽 바다의 마녀.

    메어리 님이실까?

    제시가 생각하며 편지를 받아 든 순간이었다.

    “메어리 님이 전해주셨는데…….”

    역시, 메어리 님이시구나.

    “분명, 이 수석님의 전언이라고 하셨어요.”

    ……지익.

    제시가 클레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편지의 밀랍 봉인을 뜯어냈다.

    그리고 편지에 적힌 호열의 필적을 읽어 나갔다.

    서서히, 제시의 동공에 느낌표가 떠올랐다.

    ──────

    시공간의 사교장에 입성한 것을 축하한다.

    ──────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축하로 시작한 글줄.

    ──────

    그러나 제시 하인네스, 그대가 정말로 온전한 초월자의 격을 갖추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답하겠다. 할 수 있었다면 나는 그대의 시공간의 사교장 입성에 반대표를 던졌을 테니.

    ──────

    제시가 위 문단을 읽을 때에는 고깔모자가 대신 화를 냈다.

    아무리 이 수석이라고 해도.

    남 애제자의 기를 심하게 죽여놓는다고.

    “…….”

    그러나 서적을 한 페이지도 대충 넘기지 않았던 것처럼.

    제시는 호열의 서신도 대충 읽지 않았다.

    ──────

    허나, 그대와 우르스의 시공간 결투 양상을 지켜본바. 그대의 발현력은 이미 초월자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보아도 무방하기에. 나 역시, 그대의 시공간의 사교장 입장에 찬성표를 던지는 바다.

    ──────

    물론, 그 기준이 까다로우신 만큼.

    ──────

    추신, 그럼에도 사교계는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다.

    ──────

    덧붙이신 말씀도 범상치 않으신 이 수석님이셨지만.

    “사교계를 멀리하라, 조언 명심하겠습니다!”

    제시는 편지를 접어서 아공간에 고이 보관해 뒀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호열의 편지에서 우르스와의 결투 행방을 대충이나마 짐작하게 됐다.

    ‘그치만,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그러나 제시는 자신의 전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첫 화면부터 믿지 못할 기사가 떠올라 있었으니까.

    [샤이닝 길드 간부, ‘드미트리 말콤’ 사망]

    제시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드미트리?”

    *

    긴급 업데이트 이후.

    붕괴 균열에서 하늘로 솟구쳐오른 마안들. 가장 큰 변화는 마안이 불러일으키는 상태이상, [타락]이었다. 두꺼운 중지가 밤하늘의 마안을 향한다.

    “이거나 처먹어.”

    아주 그냥 좆 같다.

    “개 같은 새끼들아.”

    타락.

    공포와 달리 타락에 관해서는 밝혀진 정보가 전무했다. AAU조차도 알지 못하는 신규 상태이상이라니. 플레이어들은 현실에 풀려난 몬스터를 사냥하면서도 찝찝함을 떨칠 수 없었다.

    “드미트리 선배,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샤이닝.

    간부, 드미트리는 아르카나 대륙에서 현실로 복귀했다. 쑥대밭이 된 조국을 외면할 수 없어서였다. 그런데 길드원들부터가 성질을 벅벅 긁어댄다.

    뻥.

    드미트리가 잔해를 걷어차며 대꾸했다.

    “모른다니까? 애초에 이호열이랑 친한 플레이어가 어디에 있다고?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막말로 성전 연합군도 나랑 크게 다를 거 없을걸?”

    도도하신 이호열 님이다.

    거대 연합은 물론.

    잘나신 아르카나인 중에서도 이호열과 과시할 만한 친분을 지닌 이는 없을 거다. 막말로 지금도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잖아?

    “정말로요?”

    끈질긴 반응에 화가 끓는다.

    ‘이러다간 카밀라한테도 뒤처지겠는데.’

    록스는 제외하더라도.

    자신과 카밀라 중 자신이 현실에 복귀한 이유?

    간단했다.

    카밀라가 좀처럼 보이지 않던 의욕을 불사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쫓아가겠어. 제시의 뒤를.”

    시공간의 결투 끝에 기절한 제시를 부축하며 심적으로 변화가 있던 거겠지. 드미트리는 카밀라에게 흔쾌히 기회를 양보하면서도 속내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Shit.”

    간신히 티를 내지 않고 있었는데.

    “너희까지 나한테 왜 그러냐?”

    이젠 까마득한 후배들이 성질을 긁고 있었다.

    이호열에 관해서는 왜 묻는 건데?

    애초에 사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이젠 꽤 머나먼 과거의 일이었거늘.

    ‘그 기사를 생각하면 아직도……!’

    신화 길드 마스터 백이설의 구애를 문전박대하던 이호열의 기사. 그 바로 옆에 프러포즈에 실패한 자신의 기사를 실었던 방송국 놈들의 만행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진짜로 쪽팔려 뒈지는 줄 알았지.’

    드미트리는 애써 진정했다.

    “후, 됐다. 너희가 뭘 알겠냐?”

    그냥 빨리 정리하고 복귀하자.

    드미트리는 길드원들의 투정을 대충 넘기고.

    붕괴 균열에서 풀려난 몬스터를 사냥했다.

    그때였다.

    눈앞이 점멸한 건.

    [악마가 출현합니다.]

    “!”

    ……악마?

    그것보다 중요한 건 출현 메시지였다.

    출현 메시지를 출력했다는 건 명백한 강자란 뜻.

    “다들 경계!”

    드미트리가 곧장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기척을 곤두세워도 악마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러면 드미트리 선배, 이상한 건 없었어요?”

    “이상한 거? 갑자기 뭔 개소리를…….”

    “아니, 이호열 말이에요.”

    ……아직도 그 소리야?

    악마가 출현했는데, 이호열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어떤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샤이닝의 간부로서 따끔하게 질책해야 한다.

    드미트리가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

    드미트리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상태이상, [타락].

    새로운 상태이상의 효과를.

    그것은 빙의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완벽한 ‘타락’이었다.

    “너, 너!!”

    말을 더듬는 드미트리.

    마주한 길드원은 이미 인간의 형태가 아니었다.

    다시는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한 외형으로 변해 있었다.

    영락없는 악마였다.

    “아까부터 이호열에 관해서 아는 게 없냐고 묻잖아요, 그분들께서.”

    스와아악.

    날아드는 공격.

    드미트리의 눈앞에 핏방울이 흩날리고.

    새로운 메시지가 점멸했다.

    [혼혈의 악마, ‘호기심의 악마’가 정답을 갈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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