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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51화 (451/489)

◈ 451화. 나의 취향은 아니거늘 (4)

지켜봐 왔다면 알겠지만, 그랑펠의 성질머리는 어쨌거나 고고한 긍지에서 비롯된다. 강자의 앞에선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지만, 약자의 앞에선 마냥 뻣뻣하게 고개를 세우지 않다는 것.

“나의 취향은 아니거늘.”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결투?

“때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겠지.”

나, 이호열이 자신만만해할 정도로 결투라 부르기엔 격의 차이가 극심했다. 왜, 사교장 층계에 관해 알지 못하는 초월자가 대다수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하층에서 상층.

상층에서 최상층.

사교장 층계를 오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견습에서 숙련.

숙련에서 선임 마법사로 승격하기보다 어렵다고 한다면.

조금은 그 난이도가 와닿으려나.

‘……물론, 나는 양쪽에서 낙하산이긴 한데.’

어쨌거나, 지금에 와서는 적합한 자격을 갖췄으니 된 거 아니겠냐?

그러니 나는 다섯의 초월자를 상대하면서 입방정을 떨지 않았다.

그때, 앳된 목소리가 울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절호의 기회 아냐? 우리에게 탈출할 기회를 주다니. 그게 아니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

우르르.

순식간에 하늘을 가득 채우는 먹구름.

콰콰쾅.

광속으로 쏟아지는 벼락.

분명, 번개의 아이라고 했었나.

이름값 제대로 하네.

나는 뇌우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자연 상태의 뇌우를 자유자재로 다룬다라. 쉽게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능력이지만, 그렇기에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군.”

정확하게 말하자면 평가했다.

“뭐? 과신? 어이가 없네?”

헛웃음을 뱉는 번개 꼬맹이를 뒤로한 채.

고오오.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탑에 속성 마법 관련 선임 마법사가 넷이나 되는 걸 보면 알 수 있듯. 한 명의 마법사가 여러 속성 마법을 완벽하게 다루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속성 마법은 서로가 상극이니까.’

그러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그랑펠은 다르다.

게다가 과거엔 단순하게 따라 발현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지금은 밑 빠진 독을 완벽하게 수리. 논리와 구조에도 허점이 없는 마법을 발현하고 있다는 뜻.

‘피뢰침의 구조를 모방.’

거기에 나, 이호열의 비루한 과학 지식을 더해 [『기이』]로 재탄생시킨다면……. 속성 마법이 됐든, 마법과는 또 다른 자연 능력이 됐든.

쿠드드득.

내 머리카락 한 올도 바짝 서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나저나 우리 그랑펠 님께선 나보다 한술 더 뜨셔서 심미적 요소까지 빼먹지 않으셨군.

경악하는 소년.

“뭐, 뭐야 저게……?”

땅에서 솟구쳐오른 건 커다란 방패를 쥔 조각상.

모든 광물에 관한 지식.

덕분에 탐색과 간섭을 극도로 생략할 수 있는 나였다.

‘피뢰침을 모방한 복잡한 조각상이라고 해도.’

한 호흡에 발현해 낼 수 있다는 것.

콰쾅.

내리치던 벼락이 일제히 방패로 흡수된다.

번개 꼬맹이가 경악하던 찰나.

내게 쾌속으로 쇄도해 오는 이가 있었다.

스릉.

일출의 무사.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아르카나에서 흔치 않은 동양적인 외모를 지닌 사내였다. 무기를 사용하는 초월자라면 이미 겨루어 본 적이 있다.

검성, 셰그윈.

‘검성과 무사라.’

누가 더 강한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때 귀철에게 모든 걸 떠맡기고 휘둘려가며 셰그윈에게 구차한 승리를 쟁취한 이호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지이잉.

신검합일의 경지.

허리춤의 귀철이 내게 자신의 고동을 전해온다.

간만에 검사를 만나 가슴이 뛰는 거겠지.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귀철.

“이것은 결투가 아니라 훈육이니.”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자비로우신 우리 그랑펠 님의 긍지. 그렇다. 나는 다섯의 초월자를 상대로 진심으로 결투에 임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것이 그대의 검로(劍路)인가.”

“?”

“나쁘지 않구나.”

애초의 이 결투의 목적이 뭔데?

[세뇌]가 풀릴 정도로 적당히 초월자들을 두들겨 패주는 것이다.

물론, 제대로 기를 죽여놓는다는 목표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훈육이라 표현한 거지.’

물론, 정기 학회를 앞둔 사전 검증. 토파즈 홀에서 빠져나간 마법사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생각하면, 나의 가르침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테지만.

슥.

“일출처럼 밝은 검강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나는 무사가 발산한 검강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회피.

이번에도 역시나 심미적 감각을 발휘해 검을 뽑아 들었다.

쿠드득.

땅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조각상.

무릎을 꿇은 자세.

나는 조각상이 떠받든 검을 치켜들었다.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척 봐도 어마 무시한 성검 같은뎁쇼?!”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걸로 봐선……. 저쪽이 만물상, 포콤인가? 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왜, 현실에서도 이걸 보고 엑스칼리버라고 오해하더라고.

‘그냥 마법부여학으로 대충 뽑아낸 검인데.’

검의 성능은 나의 마법부여학 지식에 비례한다. 웬만한 유니크 아이템과 비슷한 공격력을 지녔다고 해도 전설급 아이템인 귀철에는 미칠 수 없다.

그렇기에 선택한 것이다.

“회초리로 족하다.”

챙.

이윽고, 맞부딪히는 나와 무사의 검강.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를 악물고 고집 피울 때가 아니다, 무사여.

“그대의 검로는 선명하나 유연하지 못하군.”

“……!”

“버티면 부러질 것이다.”

……팟!

검기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짙어지는 법. 나보다 오랫동안 검을 붙잡았다고 한들, 나보다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기진 않았을 거 아냐?

‘심지어 나는 몇 번이나 죽어봤다고.’

내 말이 허세가 아니란 걸 알아차린 듯했다.

일출의 무사가 나와 멀찌감치 떨어져 나갔다. 그러고는 번개의 아이와 눈빛을 교환하더니 그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불가능하다. 검과 마법, 두 분야로 초월의 경지에 오르다니.”

그런 이야기라면 아직 놀라기 이른데?

내 발버둥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나는 수많은 보험 중에서 그저 마법과 검기.

고작 두 개를 보여줬을 뿐이었으니까.

보자.

‘전의는 이미 꺾였나.’

두 초월자가 처참하게 꺾여서 그런가.

그게 아니라면 내게 틈조차 보이지 않아서인가.

나머지 셋은 그 자리에 멈춰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방을 뒤적거리던 만물상.

“저는 항복입니다, 나리.”

포콤은 아예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면.’

분수 넘치는 자신감을 꺾어준다는 목표는 달성한 건가?

남은 건 충격 요법으로 [세뇌]가 풀리게 하는 거겠구만.

그 또한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나는 적합한 마력을 발산.

흑마법을 발현했다.

초월자들의 육체에 직접적인 피해를 줄 필요는 없다.

[세뇌]는 정신에 작용하는 상태이상.

정신에 짧고 굵은 충격을 주면 될 터.

‘마법 서적을 들춰본 보람이 있구만.’

사람이 이래서 배워야 한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물론, 고생하는 게 내 몸이 아니라 초월자들의 몸이기는 한데.

‘어쨌든, 잠깐이면 충분해.’

발현하는 건 상위 흑마법, [끝나지 않는 악몽].

고통스러워도 조금만 참아라.

단번에 [세뇌]가 풀리게 해줄 테니까.

[번개의 아이 입장에게 상태이상, ‘끝나지 않는 악몽’이 발생합니다.]

[일출의 무사에게 상태이상, ‘끝나지 않는 악몽’이 발생합니다.]

[썩은 주술사, 유라이아에게 상태이상, ‘끝나지 않는 악몽’이 발생합니다.]…….

*

……갑자기 뭐지?

다섯의 초월자는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상위 흑마법, 끝나지 않는 악몽.

대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느끼게 하는 환각 효과.

모든 인간은 각자가 살아온 삶과 세월이 다르다.

두려워하는 것 또한 다를 수밖에 없을 터.

그러나 이 순간.

모두는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건 한없이 깊은 어둠이었다.

눈을 떴다가 감았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손과 발을 움직여도 본다.

육체의 감각은 온전히 느껴졌다. 그러나 자신의 육체는 물론이요, 단 한 점의 빛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직.

‘……몸이 가라앉는 듯하다!’

거스를 수 없는 압박감.

몸이 자꾸만 무너지려고 하고 있었다.

거스를 수 없는 힘이 다리를 풀리게 하고.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었다.

빠득, 힘을 주고 결투장에서의 마지막 광경을 떠올려봤다.

‘어둠이 우릴 휘감았어.’

……철컥.

일출의 무사는 일출도를 뽑아 어둠을 쫓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몸이 버티지 못했다.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털썩.

다섯 초월자 중 신체 능력이 가장 뛰어난 무사가 견디지 못했다. 소년의 육체를 가진 번개의 아이는 물론. 모두가 한없이 깊은 어둠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말았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나는 굴복하지 않아.’

홀로 남은 이는 썩은 주술사, 유라이아였다.

마티스가 흑마도학을 정립하기 이전.

아르카나 대륙에선 불경한 주술로도 불리던 흑마법이었다.

때문에 유라이아는 이것이 흑마법이라는 걸 간파할 수 있었다.

‘단순한 환각에 불과해.’

나의 두려움이 환각으로 떠오른 것일 뿐이다.

육체에 가해지는 압력 또한 허상에 불과하다.

유라이아가 스스로를 타이르던 순간이었다.

‘……잠깐.’

문득, 위화감을 깨달았다.

‘내가, 이 유라이아가 어둠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시피 보이는 것은 한없이 깊은 어둠뿐이었다.

그러나 유라이아는 그러한 어둠에 익숙했다.

하늘의 태양도, 밤하늘의 달과 별조차 외면한 죽음의 땅.

그곳이 그녀의 고향이었으니까.

‘이건 단순한 어둠이 아니야.’

그러니 유라이아는 눈을 부릅떴다. 이 한없이 깊은 어둠 속, 자신의 육체를 짓누르는 진정한 공포의 근원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하여.

그리고 목격했다.

“!”

흩날리는 은색의 머리카락.

더없이 찬란했기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방금 전 시공간의 결투장에서 마주했던 사내의 은발이었다.

그런데…….

그의 머리칼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길었다.

그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힘겹게 고개를 치켜들어봤지만.

유라이아의 억지는 거기까지였다.

음성이 들려왔으니까.

“□□ □□ □□□□ □□□.”

어째서지?

아르카나 대륙의 언어 같았지만,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억지를 부려 고개를 치켜든 덕분이었다. 그녀는 떨어지는 입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으로 뜻을 파악했다.

-나는 네게 허락하지 않았다.

허락하지 않았다니.

……무엇을?

유라이아가 의문에 빠진 순간이었다.

“……!”

찰나의 순간.

그녀의 동공이 한 차례 확장되고 다시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내, 모든 이들에게서 ‘악몽’의 효과가 사라졌다.

“하아.”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번개의 아이였다.

어쩌다가 이런 끔찍한 개고생을 하게 된 걸까?

그렇다, 모든 사태의 원흉은 그 자식 때문이다.

“옥시딘,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어라?”

아무리 애를 써도 내뱉어지지 않던.

옥시딘의 이름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어지잖아?!

일출의 무사도 따라서 그 이름을 내뱉었다.

“……옥시딘.”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옥시딘의 개수작.

그 여파가 자신에게서 사라진 듯했다.

만물상, 포콤이 진정제를 들이켜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분이 우리를 옥시딘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것 같은뎁쇼?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우리를 결투장으로 끌고 오신 게 아니었을까요?”

“헤에? 설마? 그런 것치고는 우릴 가지고 놀던데.”

“그가 우릴 죽이고자 했으면 우리는 끝이다.”

“그건 그렇지만…….”

포콤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내에게는 큰 빚을 진 셈.

그렇다면 갚아야겠지.

일출의 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경험은 유쾌하지 않았거늘.

‘모든 걸 털어놓아야 수지타산에 맞다.’

사교장 안 개구리에 불과했던 자신의 식견을 넓혀준 건 굴욕보다 유익한 경험이었으니까. 옥시딘과 초월자 동맹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걸음을 내디디던 순간이었다.

“……어라?”

그제야 알아차렸다.

하나, 둘, 셋, 넷으로 끝이었다.

썩은 주술사, 유라이아.

“촌스러운 형, 우리 한 명이 비는데?”

그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

.

.

이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은 초월자 다섯을 압도했다는 뿌듯함도. 그들을 통해 옥시딘이라는 사태의 원흉을 파악하게 됐다는 안도도 아니었다.

나, 이호열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둠의 이해].

그리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숙련도가 상승하며.

짙어지게 되는 그랑펠의 온전한 능력과 인격을.

나는 항상의 자세, 여전히 여느 때와 같은 그랑펠에게 물었다.

이해도는 고작 4할.

그렇다면 남은 게 6할.

아직도 뭘 그렇게 숨기고 있는 거냐, 그랑펠?

‘우리 사이에 이러기냐, 진짜?’

.

.

.

[승자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패자 : 썩은 주술사, 유라이아]

[실격 : 번개의 아이 외 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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