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50화 (450/489)

◈ 450화. 나의 취향은 아니거늘 (3)

『그랑펠이 사교계와 거리를 두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가는 이야기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 오직 유희를 위한 낭설만이 오가는 것이 사교계에서 그랑펠은 자신의 눈과 귀가 오염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대체 어디에서 저런 설정이 튀어나왔을까?

‘입 꾹 닫고 있던 시절의 합리화다.’

나, 이호열.

간만에 떠오르는 설정에 뺨이 달아오르는 듯하다.

낯 뜨거운 설정의 추가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나도 소문에 적잖이 시달렸었지.’

바로 위 3학년에 소문난 선배가 하나 있는데, 이호열이 그 선배랑 같이 등하교하는 걸 옆 반 애가 봤다더라. 그러면 우리 이제부터라도 이호열이랑 친하게 지내야 하는 거 아니냐…….

‘……하여튼, 이예림.’

이 애증의 웬수야.

설정 자체를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없다. 근거 없는 낭설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것을 넘어서 애초에 관심을 두지도 않는 건 좋은 일이니까.

‘나만 그 출처를 모른 척하면 된다, 호열아.’

나는 속으로 되뇌면서도 초월자들의 낯짝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뱉은 말을 떠올려본다. 우물 안 개구리도 아니고, 사교장 안의 개구리에 불과하다라.

‘하여튼, 독설 하나는 기가 막히네.’

마탑 토파즈 홀에서 숙련 마법사 여럿 울렸던 솜씨가 어디 가지 않는구나, 그랑펠? 초월자들은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무엇보다.

영생의 생물.

파스스.

집결한 초월자 중에서도 가장 강하며 그렇기에 『시공간의 결투』를 비롯. 가장 궂은 일을 도맡아서 처리하던 우르스가 진딧물에 녹아내려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앳된 초월자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장난이지? 진짜 졌다고? 그 애송이 마법사한테?!”

믿지 못한다면 내가 검수한 『비약초의 육성법』.

1,324페이지.

다섯째 단락을 친히 읊어줄 의향이 있었거늘.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원하는 게 뭐지?”

힘겹지만, 어떻게든 납득을 한 모양이군.

‘납득을 안 하면 너희가 뭘 할 수 있는데.’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든든하구나. 메어리와 4가문의 가주들이 어느 정도 머릿수를 맞춰준 덕분. 나는 더욱 꼿꼿하게 목을 세울 수 있었다.

“이미 전하지 않았나.”

“뭘 말하는 거지?”

나를 대신해 메어리가 내뱉는다.

“이제부터 누구도 나의 허락 없이 사교장에 입장할 수 없다. 빠져나갈 수도 없다. 추악한 쓰레기를 반입할 수도 없다.”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완벽한 불공정 규율이군.’

그러니까 흘려들을 만도 하다.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인가, 싶었겠지.

물론, 규율에 관해서는 공명정대하신 우리 그랑펠 님이시다.

‘저런 악질 규율을 진심으로 제시한 건 아냐.’

뭣보다 내가 미쳤다고 마탑도 모자라서 시공간의 사교장 출입 심사까지 떠맡겠냐? 무엇보다 최상층이라고 해서 저 정도의 규율을 강행할 권리는 없었다.

관계도와 우호도가 최대치에 이르러서 [권한] 기능을 활성화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뭐, 당장은 머나먼 이야기였으니까.

[시공간의 사교장과의 관계도 : 40%]

[시공간의 사교장과의 우호도 : 40%]

그러니 나는 숨겨진 뜻을 풀어 말해줬다.

“불필요한 텃세를 부리지 마라, 개구리여.”

여기서부터는 서늘한 진심이었다.

“제자들의 앞길을 막지 말란 뜻이다.”

“……!”

말했다시피 제시 하인네스로 시작이었다.

정확한 순서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녀를 필두로 남태민과 히사기. 스칼과 레오니까지. 플레이어는 속속들이 기이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초월자의 자격을 증명해 낼 테니까.

‘누가 가르치고 있는데.’

[기이의 대종사].

칭호를 거머쥔 이상, 기이의 영역에 진입하는 모든 이들의 스승이 된 내가 아니겠냐? 그러니까 뻔뻔하게 제자라는 호칭을 내뱉을 수 있었던 것.

내 말에 초월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제, 제자라고? 그 마법사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분명……!”

“맞아요. 제자‘들’이라고 했습죠.”

한낱 개구리의 식견.

시공간의 사교장에 입장할 수 있는 자신들이 남들과는 다른 선택받은 존재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그러나 겪어봤던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가감 없이 내뱉을 수 있었다.

“비뚤어진 관점은 하루라도 빠르게 버리는 게 좋다. 그대들이 달성한 업적은 거창하지 않다. 풀뿌리를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는가.”

“……!”

듣는 사람은 영락없이 우르스를 말하는 줄 알겠지.

그러나 풀뿌리, 영약을 섭취.

강제로 서클을 형성한 과거가 있는 나였으니.

‘이럴 땐 철면피라 다행이다.’

내 낯짝이었으면 부끄러워 뺨이 터질듯이 달아올랐을 거다, 진심.

그러나 뻔뻔하신 입방정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고작 쓰레기만도 못한 악마를 사냥한 것만으로도. 만장일치로 입성할 수 있는 곳이.”

한술 더 떠 사교계를 향한 혐오까지 표출.

“바로 그대들이 고귀하며 거창하게 여기는 이, 시공간의 사교장이란 장소다.”

여기서 쓰레기만도 못한 악마는 상위 마왕, 가미긴을. 그런 가미긴을 사냥하고 만장일치로 사교장에 입성한 건 당연히 나를 뜻하는 것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혀를 내둘렀다.

‘재수 없다고 해도 할 말이 없구만.’

누가 봐도 엄청난 업적을 세워놓고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는 게 내가 들어도 얄밉구나. 내가 초월자들이었어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을 거다.

하지만 그만큼 독설의 효과는 대단했다.

“……칫.”

기가 완전히 죽어서는 반박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군. 이곳이 시공간의 사교장, 모든 무력 행위가 일절 금지된 장소란 걸 알면서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모양새.

‘그렇다면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

완벽하게 기세를 휘어잡았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추궁할 시간이다. 하지만 그 전에 정당한 방법으로 이 상황을 모면할 방법을 알려줘야겠지.

“참고로.”

물론.

“그대들에게 결투장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적당히 봐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

엄두가 나질 않는다.

‘빠져나가고 싶다면 쓰러트리고 나가라는 건가?’

메어리를 비롯한 3인을 보고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거늘.

마지막으로 등장한 사내는 차원이 달랐다.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셰그윈과의 결투가 엊그제 같은데…….’

그때와는 ‘격’ 자체가 달라진 듯한 언행이었다. 일출의 무사는 머리를 굴렸다. 등의 상처를 수치로 여겨야 하는 것이 무인이라고 하거늘.

‘불가능하다.’

일광도와 신검합일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은발의 사내는 물론이요. 남쪽 바다의 마녀를 능가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배를 버린다.’

일출의 무사는 자신의 꿈을 떠올렸다. 초월자 동맹이 깨어진다고 한들. 그저 꿈에 도달하는 시기가 조금 늦춰질 뿐이었다.

무엇보다.

‘비열하군, 옥시딘.’

이 사태를 초래한 옥시딘.

그가 지금까지 사교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일출의 무사는 결단을 내렸다.

‘모든 걸 사실대로 털어놓는다.’

그리고 자비를 구하겠다.

이젠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동대륙이지만, 예를 알기에 사내의 예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쪽이 진심을 보인다면 사내 또한 진심으로 자비를 베풀 터.

일출의 무사가 결심한 순간이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입이 유달리 가벼운 번개의 아이를 포함.

다른 초월자들이 입을 닫고 있었다.

가루로 변한 우르스를 포함, 누구도 옥시딘을 왕으로서 지킬 이유 따윈 없었다. 그가 왕을 자처한다고 한들, 누구도 옥시딘을 왕으로 섬기지 않았으니까.

일출의 무사는 생각을 정리했다.

‘어쨌든, 나의 알 바는 아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

아니, 입을 열려고 했다.

“!”

그런데, 입술이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목구멍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의 뜻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향하는 시선.

‘이 사내의 압력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이런 식으로 위해를 가할 수 있었다면, 진작 자신들을 짓밟고도 남을 힘을 지닌 사내였다. 심지어 시공간의 사교장 규율도 분명 유지되고 있을 텐데…….

불현듯 드는 생각.

‘설마, 입을 다물고 있던 이유가?’

그 표정들을 보아하니 정말로 그랬다.

그 시작은 목소리였지만, 이제는 손과 발도 말을 듣지 않았다.

일출의 무사는 직감했다.

‘분명, 사교장에 입장하기 전이다.’

사교장에 입장하기 전.

누군가 우리에게 비겁한 술수를 부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떠오르는 인물은 하나밖에 없었다.

‘옥시딘, 그 새끼가!’

그때였다.

“유감스럽게도.”

은발 사내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건.

“어느 누구도 대답할 뜻이 없는 모양이군.”

또각.

사내가 여유롭게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선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겼다. 허공에 손을 뻗어서는 시공간의 사교장에 깃털펜을 휘적거렸다.

할 수 있는 건 마른침을 삼키는 것뿐.

머리를 굴려본다. 난데없이 주문서를 작성하는 건 아닐 터. 그렇다면 정말로 시공간의 규율을 수정하고 있는 것인가. 최상층에는 정말로 그러한 권한을 주어진단 말인가.

“…….”

강제로 입을 다문 채 지켜보던 순간이었다.

“이 시간부로.”

사내의 입이 떨어졌다.

“비공식 시공간의 결투를 시작하겠다.”

……비공식 결투라고?

그와 동시에 뒤바뀌는 풍경.

시공간의 콜로세움이 모습을 드러내고 전장이 펼쳐진다.

이내, 초월자들은 마주할 수 있었다.

콜로세움 전장의 반대편.

“!!!”

자신들 앞에 꼿꼿하게 홀로 선 사내를.

*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반짝인다.

[시공간의 사교장 최상층 특전을 습득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최상위 시공간 상점 이용이 가능합니다.]

[이제부터 시공간 상점 기준 금화 10개 이하의 상품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시공간의 사교장.

차단을 풀자 그동안 밀렸던 메시지들이 우르르 떠오른다.

아직 물욕을 해탈하지 못한 나, 이호열.

‘뭣, 공짜라고?!’

그 탓에 눈이 몇 번이나 휘둥그레졌지만.

우리 청렴결백하신 그랑펠 님 덕분.

흘려넘기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시공간의 결투장을 임의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시공간의 결투장.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말로는 ‘콜로세움’으로 PVP를 진행할 수 있는 장소였다. 지금도 그 용도는 마찬가지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부활의 권능은 없어졌으니까.’

이젠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면.

경악할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그런 시공간의 결투장에 다섯의 초월자와 마주 보고 서 있었으니까. 결투장에 입장한 덕분인가. 이제야 그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번개의 아이 입장 완료.]

[일출의 무사 입장 완료.]

[썩은 주술사, 유라이아 입장 완료.]

[만물상, 포콤 입장 완료.]

[달인, 킬러밴드 입장 완료.]

[곧, 시공간의 결투가 시작됩니다.]

일반적인 시공간 결투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 초월자랑 일 대 오로 결투라니……!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도 이런 식으로 자신의 최후를 선택하지 않을 테니까. 결투장 규율을 떠올려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시공간의 결투장을 ‘임의’로 사용할 수 있게 된 나였다. 그리고 나는 이 결투장에 임의의 규칙, 일 대 다수의 결투를 추가한 것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았다.

내가 초월자들을 결투장으로 불러들인 이유는 간단했다.

그야 내게는 훤히 보이고 있었으니까.

히든 클래스, [폭군]의 [세뇌]가.

그러니까 내게 선택지 따윈 없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악마 사냥꾼이니까.

[세뇌]를 치유하는 마법 따윈 알지 못한다는 거지.

‘애초에 존재하는지도 의문이지만.’

내가 아는 유일한 [세뇌]의 치료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뜻.

그렇다.

죽기 직전까지 패놓으면 깔끔하게 해제됐던 [세뇌]였다.

나는 태연하게도 읊조렸다.

“무뎌졌다고 한들, 시간의 소중함을 잊어선 안 되는 법.”

저들이 나를 살피듯 나도 저들을 살폈다.

덕분에 견적이 나왔다.

나는 지지 않는다.

“오너라. 한 번에 상대해 주마.”

다섯의 초월자를 상대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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