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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49화 (449/489)

◈ 449화. 나의 취향은 아니거늘 (2)

어째 이 대사를 안 뱉나 싶었다.

가다듬는 옷매무새.

여명의 재킷을 걸치며 지껄여본다.

“나의 취향은 아니거늘.”

어련하시겠습니까.

사교계의 오아시스.

사교계의 아이돌, 그랑펠 님.

‘내키지 않아도 상황이 상황이니 참자.’

[어둠의 이해]에 진입하기 직전.

나는 시공간의 결투 시작 메시지를 목격했다.

그러나 시공간과 관련된 메시지는 전부 차단했던 나였다.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빠져나온 뒤에는, 그와 관련된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 바람에 뒤늦게 접했다.

‘제시 하인네스.’

그녀가 우르스와 결투를 벌였다는 소식을.

초월자로서 시공간의 사교장에 입성한 걸 보면.

제시는 대마법사의 힘을 온전히 각성한 거겠지.

‘슬슬 차단을 풀어야겠는데.’

초월자는 같은 초월자들의 자격 심사를 거친다.

만약,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어쩌면 이번 사태를 예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내가 아는 그랑펠의 엄격함이라면 분명.’

아직 준비가 덜 됐다며 제시에게 반대표를 던졌을 테니.

그러나 사건이 터진 이상.

이번만큼은 고집을 꺾을 차례다, 그랑펠.

역시나 도도하게도 내뱉는 말.

“전례가 없는 일이니, 영광으로 여겨라.”

반짝이는 눈앞.

[이제부터 ‘시공간의 사교장’ 소식이 갱신됩니다.]

……고작 차단을 해제하면서도 있는 생색, 없는 생색은 다 내시는구만. 하지만 말을 바꾸는 바람에 달아오르는 낯을 감수하더라도.

이제부터는 시공간의 소식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그 속내를 확실히 알겠어.’

군주, 류오쥔춘의 왕관을 탈취하고.

대륙의 왕으로 거듭나기 위해 뜻을 모은 일곱의 초월자들.

그들이 본격적인 야심을 드러냈다.

‘내부 기강부터 잡겠다는 건가.’

굳이 표현하자면 제시는 햇병아리 초월자였다.

당사자에게 묻지는 못했지만.

제시와 일곱의 초월자들 사이엔 모종의 대화가 오갔을 터.

‘거기서 의견이 맞지 않은 거고.’

초월자들은 제시가 쓸모없으리라 판단.

시공간의 결투를 통해 처치하려고 한 거겠지.

어쩌면 제시가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동시에 제시가 시작일 수도 있다.

‘다들 성장하고 있으니까.’

기이의 영역.

문을 두드리고 있는 이들만 하더라도 남태민과 히사기가 있다. 제시와 함께 인류의 최종병기 히든 클래스라 불렸던 용기사, 스칼도 빼놓을 수 없다.

‘결국, 드래곤을 만났으니까.’

물론, 콧대 높은 빙룡.

프로즈낙스가 스칼을 고분고분 등에 오르게 할지는 다른 문제였지만, 어쨌든. 미래의 초월자들을 위해서라도 텃세를 부리는 초월자 동맹?

‘기를 제대로 죽여놓을 필요가 있어.’

다름 아닌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말이야.

그러기 위해선.

그저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디 보자, 일곱이라면.’

이쪽도 어느 정도까진 머릿수를 맞춰야 하지 않겠어?

쥐뿔도 없던 이호열이 아니다.

성전 연합군에도 나를 제외한 초월자들이 있거든.

너희들과 사는 ‘층’이 다른 초월자들이.

*

시공간의 사교장.

오직 초월자에게만 허락된 공간.

사교장을 장식한 장식품도, 통용되는 금화도, 그런 금화로 구매할 수 있는 마도구도 아르카나 대륙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시공간의 사교장에 익숙해지면 바라보는 관점부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순간, 사교장에 모인 여섯의 초월자가 그러했다.

『번개의 아이』

뇌전처럼 강렬한 금발의 소년은 사교장을 둘러봤다.

어째 전보다 깔끔해지지 않았나.

모험가의 머리에서 왕관을 벗길 때보다 훨씬.

순진무구한 목소리가 사교장에 울렸다.

“혹시 누가 여기 청소했어?”

“청소는 개뿔이. 그럴 리가.”

“앗! 촌스러운 형이다.”

“……촌스러?”

『일출의 무사』.

그의 짙고 검은 눈썹이 움찔거렸다.

철없는 꼬맹이의 헛소리라고 넘길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진심으로 내뱉는 말.

“나는 네 순진무구한 악의가 두렵다.”

“서운하게 악의라니요, 형.”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소름이 돋는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악의에 대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사는 꼬맹이의 시선을 피하며 눈알을 굴렸다.

‘사실 나도 다를 바 없지.’

의기를 투합한 일곱의 초월자.

그러나 일곱의 초월자가 품고 있는 뜻은 각자가 달랐다.

무사는 그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같은 배를 탔지만, 중간 지점에 도착.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같은 배에서 내리는 순간.’

일곱의 초월자들은 그 방향에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미련 없이 칼을 겨누게 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가장 경계가 되는 건 단연코.

‘아무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군.’

왜소한 체구.

자신의 몸집보다 커다란 가방을 들쳐멘 여인.

『만물상, 포콤』.

그녀가 금화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째 왕님이 보이질 않으시네요?”

포콤이 말하는 왕은 『옥시딘』이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작자니까.”

일출의 무사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창한 제국 황제의 왕관 같은 게 아니다.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한 모험가의 왕관이었다.

‘그런 걸 나서서 얹을 생각을 하다니.’

멍청한 것인가, 탐욕스러운 것인가?

하지만 초월자 동맹이라는 판을 계획한 자가 바로 옥시딘이었다.

일출의 무사는 다시금 생각을 가다듬었다.

번개의 아이.

만물상, 포콤.

영생의 생물, 우르스.

썩은 주술사, 유라이아.

달인, 킬러밴드.

‘확실하다.’

이곳에 모인 다섯의 초월자보다 위험한 건 옥시딘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모든 이들이 약속대로 사교장에 집결한 지금.

“헤에, 아직도야?”

옥시딘만 코빼기를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

그러나 저 찌릿한 꼬맹이처럼 조급해할 이유는 없다.

사교장에서 시간의 흐름은 극도로 느려지는바.

스릉.

일출의 무사는 도(刀)를 꺼내서 날을 바라봤다.

교감.

일광도(日光刀)의 날을 살피고, 손잡이를 살폈다, 검성, 셰그윈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가 일광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던 순간이었다.

지이잉─

“!”

순간, 일광도가 진동했다.

이것이 셰그윈이 말했던 검과의 교감.

신검합일의 경지인가?

그러나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동이 아니라…….

두려움에 떨고 있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까.

인기척이 느껴졌다.

“……!”

모두가 그 인기척을 느꼈다.

인기척은 하나가 아니었다.

더욱이 그중에는 아는 얼굴도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얼굴을 마주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그저 아는 복장의 여인이 있었다.

빗자루.

“……남쪽 바다의 마녀.”

언제나 지독한 궐련에 취해 테이블에 엎어져 있던 그녀.

마녀가 그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표정으로 사교장에 들어섰다.

입을 열었다.

“이것은 최상층이 제시하는 새로운 사교장의 규율이다.”

최상층이라니.

사교장에 ‘층계’가 있었다고?

일출의 무사는 혼란한 와중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무인의 시선으로 메어리를 포함한 4인의 전력을 파악했다.

그리고 느꼈다.

‘……어디서 저런 녀석들이?’

그들의 심상치 않은 기세를.

일출의 무사뿐만 아니다.

자리에 없는 옥시딘을 제외.

초월자들 모두가 메어리.

막시마를 제외한 4가문 가주들의 기세에 압도되었다.

아르카나 대륙이었다면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압박감.

하지만 규율을 떠올렸다.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무력행위는 금지된바.

번개의 아이가 해맑게 물었다.

“와, 대단하다! 당신들 같은 초월자가 있는 줄 몰랐어.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 있던 거야? 당신들 존재를 알았다면 조금 더 계획적으로 움직였을 텐데.”

대꾸한 건 전율의 아카몬드 가문의 가주, 레텔 아카몬드였다.

“흐음.”

아카몬드 가문의 장녀.

금슬이 심하게 좋으신 아버지와 어머니들 덕분.

그녀는 열 하고도 다섯에 이르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자랐다.

“질문에 대답해 주기 전에 한 가지.”

그럼에도 레텔이 가주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자신의 야심대로 아카몬드 가문을 넘겨받을 수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말버릇이 그게 뭐지?”

“……말버릇?”

“자, 공손하게 다시.”

레텔의 눈이 권위적으로 번뜩거렸다.

“아니면, 사랑의 매가 필요한 건가?”

일출의 무사는 번개의 아이를 바라봤다.

“……윽.”

저 순수하게 건방진 꼬마가 기세에서 밀렸다. 사교장의 규율에 따라 위해를 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거스를 수 없는 압박감이라는 거겠지.

꿀꺽.

나도 해야 하는 건가, 존댓말?

진지하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레텔 아카몬드를 만류하는 이들이 있었다.

“놀리는 건 그쯤 하지, 레텔.”

“놀리다뇨. 엄연한 교육인데요.”

“약자를 괴롭히는 건 달가워하지 않으실 거야.”

한마디에 불과했거늘.

‘……약자?’

그 한마디에 담긴 의미가 함축적이었다.

자신들을 약자라고 내리깔아보는 태도.

하지만 그것보다 놀라운 건.

‘저들 위에 누군가 있다.’

어느 누가 저 괴물들 위에 군림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가장 믿을 수 없는 건 남쪽 바다의 마녀가 움직였다는 것이었다. 그녀에 관해서는 초월자 동맹도 대화를 나눴던바.

수준을 가늠할 수 없다.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마녀와의 불필요한 충돌은 피하자고.

다행히도 마녀와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바로 직전까지는.

남쪽 바다의 마녀, 메어리가 입을 열었다.

“우리의 할 일은 그저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뿐. 불필요한 충돌은 자제할 필요가 있겠죠. 그대들도 차분히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

처음 듣는 마녀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늘 궐련에 취해 늘어져 있던 모습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태도의 차이가 초월자들을 얼어붙게 했다.

‘……대체 누가 오길래?’

그리고 머지않아 사교장에 주인공이 등장했다.

어째서인가.

익숙한 소리와 함께.

또각.

.

.

.

뭐든 하려고 하면 제대로 해내는 우리의 그랑펠 님이시다. 일명 고인물 커뮤니티, 시공간의 사교장이 진짜 사교계에서 뜻하는 사교장이 아니었거늘.

‘아주 그냥 휘황찬란하십니다.’

[심미] 스탯을 옷매무새에 더할지는 내가 상상도 못 했다……!

[上]에 다다른 심미의 효과는 대단했다.

또각 소리를 내면서.

위풍당당한 보폭으로 걸어도 흐트러지지 않는 옷매무새.

‘……얼굴이 터질 것 같다, 정말.’

나는 설정처럼 사교장의 아이돌이라도 된 것처럼.

시공간의 사교장에 진입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안면이 있는 이들과 마주했다.

“그대들이었나.”

왜,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한두 번 마주쳤었지?

특히나 검성, 셰그윈과 신경전을 벌일 때는.

다들 내게 주목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중 몇몇이 나를 알아보고 흠칫했다

“너는 검성이랑 결투를 벌였던…….”

나는 급히 입을 열었다.

“듣고 싶지 않다.”

시공간의 사교장에서는 아르카나의 닉네임을…….

그러니까 그랑펠의 풀네임을 숨길 수 없었다.

혹시라도 풀네임을 꺼낼라.

나는 말을 끊었다.

“대답하는 것은 내가 아닌 그대들이니까.”

그래.

내가 시공간의 사교장을 찾은 이유는 명확하다.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초월자들의 기를 죽여놓기 위해서였다.

‘일단, 기선제압은 확실하게 한 모양이군.’

4가문의 가주들이야, 일찍이 시공간의 사교장 상층에 출입할 수 있던 강자들이었다. 괜히 클라우디 가문의 심복이라 불린 게 아니라는 뜻.

‘메어리한테도 적잖이 놀랐을걸?’

나만 하더라도 메어리의 변화에 흠칫하곤 했으니까.

궐련을 끊어서 그런가, 메어리는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최저 배송 금액을 맞추기 위해서 녹차랑 같이 주문했던 금연 껌을 선물한 보람이 있었단 거지.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르스.”

철완의 우르스.

영약 중독자 우르스.

이제는 뭐, 영생의 생물이라고 했나?

“심히 추하구나.”

하지만 내 눈은 못 속인다.

우르스는 영생의 생물 따위가 아니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을 통해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광물과 식물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나였다.

나는 머릿속 지식을 그대로 읊었다.

“영약의 위험성은 익히 알려진바. 그럼에도 그대는 미련한 짓을 반복했군. 무엇이 영생의 생물인가. 그저 『마슬로바의 진딧물』에 잡아먹힌 산송장에 불과하거늘.”

“?!”

당사자인 우르스보다 놀란 건 다른 초월자들이었다.

우르스를 적잖이 믿고 있었던 모양.

신뢰했던 이유야 짐작이 된다.

“초월자 사냥을 떠맡은 건 그대겠지.”

“…….”

“새로운 초월자를 상대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건 다른 초월자보다 월등한 경험을 쌓은 우르스, 그대밖에 없었을 테니. 그러나 유감이군.”

반인반목(半人半木).

우르스는 대답도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육체만이 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막시마를 제외한 4가문의 가주들, 그리고 메어리가 우르스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슥.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을 제지했다. 말했다시피 사교장에서 무력행위는 금지됐고, 우르스에게 그럴 힘 또한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냉정하게 평가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것.”

뚜득.

“그것이 그대의 패인이다.”

영약, 마슬로바.

생명력과 관련한 엄청난 효과를 주는 영약.

하지만 그 효과만큼 치명적인 진딧물을 품고 있다.

그리고 제시는 대충 책장을 넘기지 않았던 거겠지.

“제대로 읽었군, 제시 하인네스.”

저자, 클레 오디아.

검수, 이호열.

『비약초의 육성법』

1,324페이지.

다섯째 단락에 작성된 내용.

“그대의 승리다.”

그렇다.

제시는 패배하지 않았다.

마슬로바의 진딧물을 급속도로 번식시킬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속성 마법으로 구현. 우르스를 진딧물에 뒤덮이게 하여 서서히 썩게 한 것이었다.

“……뭐, 뭐야? 우르스, 당신?”

꺾이고 무너지는 우르스.

당혹감에 말을 잇지 못하는 초월자들.

그럼에도 더욱 철저하게 기를 죽여놓을 필요가 있다.

나는 간만에 친절을 베풀었다.

“그리고 그대들은 패배했다.”

순서대로 얼빠진 낯짝을 향하는 나의 시선.

“사교장 상층의 4가주들에게 패한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해설을 덧붙인다.

“겸손한 남쪽 바다의 마녀에게 패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 이제 갓 초월자의 문을 두드린 모험가에게 그대들은 처참하게 패배한 것이다.”

그런 주제에 뭐라고?

초월자가 세우는 새로운 규율?

입술 사이로 차가운 독설이 흘러나온다.

“사교장 안 개구리들답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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