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8화. 나의 취향은 아니거늘 (1)
그림자의 회랑.
대륙에 출력된 출현 메시지.
존재감은 강렬했다.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
제국 남부령, 헤시야시.
제국 동부령 폴스타.
더 나아가서는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장소.
상공에 정체불명의 건물이 떠올랐다.
“하, 하늘에 저거 설마 성인가?”
“저게 메시지가 말한 그림자의 회랑……?”
“그림자의 회랑이라니,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고작 단 한 줄의 메시지.
“그게 출현 메시지. 아니, 설명하려면 긴데요!”
그럼에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인들보다 형편이 나았다. 플레이어들이 아르카나인들에게 그림자의 회랑에 관해 설명하던 순간.
같은 시각.
성전 연합군 휘하, 거대 연합은 자리에 멈춰 섰다.
“저게 뭐라고 생각하냐, 뱀눈?”
“글쎄요. 드릴 말이 없군요.”
“저건 또 뭐냐.”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거대 연합의 세 길드 마스터.
거기에 스칼과 세컨드 썬의 슈레이그까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지금껏 랭커 자리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는 이들조차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슈레이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진입이 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데……?”
“누가 봐도 그래 보여.”
“아니, 애초에 저거 진짜가 맞긴 한 거야? 환각 아냐?!”
당연한 반응이었다.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그림자의 회랑은 아르카나 대륙 전역에서 한결같은 모습으로 비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는 그 형태도 거꾸로 하늘에 매달린 듯하다.
다그닥.
심각한 표정으로 회랑을 바라보던 이들.
이내, 정찰대가 복귀했다.
그러나 수확은 없었다.
말에서 내린 길드원들의 표정은 어리둥절하다.
“아무리 나아가도 가까워지지 않아요!”
“텔레포트 좌표 설정도 불가합니다.”
“젠장, 무슨 수를 써도 가까워질 수 없다는 건가.”
의문이 가득한 와중.
본능적으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슈레이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그래도 저런 게 현실에 떠오르지 않은 게 어디야?”
런던 던전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았으니까.
그러나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동경의 현사, 히사기가 현실을 지적했다.
“언제까지 안심할 순 없습니다. 균열이 존재하는 이상.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이 연결된 이상. 저 그림자의 회랑 또한 현실에 업데이트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으니까요.”
“역시, 그렇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좋은 해결책은 클리어였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불안정한 균열을 클리어한다면.
현실의 균열 생성 또한 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던바.
레오니가 스칼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야. 그 빙룡한테 우리 좀 태워달라고 부탁하면 안 되냐? 그래도 드래곤이면 저게 진짜인지, 환상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까지는 비행할 수 있을 거 아냐?”
일리가 있었다.
히든피스, 그림자의 회랑이 단순한 신기루인지.
아니면 새로운 필드일지.
그게 아니라면 반드시 공략해야만 하는 던전일지.
한 줄의 메시지로 파악하기는 역부족이었으니까.
하지만 스칼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내 영역이 아니다.”
사실 누구보다 답답한 건 스칼이었다.
위엄이 넘쳐야 할 빙룡이.
그 누구보다 드높은 프라이드를 떨쳐야 할 빙룡이…….
-“나는 병아리다. 그것도 햇병아리.”
어째서 병아리를 자처한단 말인가!
거기엔 흑암룡의 말씀이 얽혀있었거늘.
스칼이 그 진실까지는 알 수 없었으니.
레오니가 안쓰러운 눈으로 스칼을 바라봤다.
“너 용기사 맞냐?”
결국,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또 한 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의 회랑을 올려다보던 남태민이 읊조렸다.
“호열 씨. 아니, 총대장님은 뭔가 알고 계시려나?”
*
아주 그냥 난리도 아니다, 아르카나 대륙.
클라우디령.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나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녹차에 환장하면서도.
또 몸 건강은 끔찍하게 챙기시는 그랑펠 님 아니시겠냐?
“늦은 시간이거늘.”
떠올리는 현실의 건강 상식.
밤에 섭취하는 녹차 카페인은 숙면에 방해가 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찻잔을 집어 든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은 합당한 이유가 있으니.”
그렇다.
그림자 용병단에게 악크샨형을 내렸……. 아니, 악크샨으로 이직하기 위해 잔뜩 무게를 잡았던 내가 아니던가? 달랑거리는 녹차 티백이 분위기를 깰라, 필사적으로 자제했었단 뜻이다.
녹차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야밤의 티타임.
“그럼에도 흡족하지 않군.”
달칵.
평소 같았으면 감탄사가 터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나도 네 심정에 백분 공감할 수 있다, 그랑펠.
심미안이 없는 나조차도 저건 좀 아니다 싶었거든.
아르카나 대륙의 밤하늘.
곳곳에 떠오른 마안만으로도 꼴 보기 싫은데.
그것도 모자라 그림자의 회랑까지 떠올라 있다.
‘이름값 제대로 하네.’
대충 꽈리를 튼 뱀을 닮은 건물이라고 해야 할까?
성이라고 하기에는, 생김새가 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건 지나치게 검다는 거겠지.
지붕도, 외벽도, 창문도, 내걸린 깃발도.
심지어 그 검고 음산한 게 하늘에 거꾸로 매달려서는.
신기루처럼 아르카나 대륙 전역에서 목격되고 있다고 했겠다…….
당연하게도 고운 말이 나올 수가 없다.
“밑바닥을 성지로 택한 이유가 있었군.”
여기서 밑바닥은 『잊혀진 자들의 협곡』을 말하는 것. 처음 협곡에 발을 들일 때부터 탐탁지 않아 하더니만, 이번에도 꼬박꼬박 들먹여주시는 그랑펠 님이시다.
“한결같이 형편없는 심미적 감각이다.”
누군가는 묻겠지.
청산할 빚도 있으면서 너무 한가한 거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평상시 그랑펠의 성질머리 같았으면 당장에라도.
저 그림자의 회랑인가, 뭔가 하는 히든피스에 진입하고도 남았겠지.
그러나.
슥.
밤하늘에서 탁상 위 검은 양피지로 향하는 시선.
적합한 절차가 존재한다면.
또 따라줘야 하는 게 우리 그랑펠 님의 고집 아니시겠냐?
[그림자 회랑의 초대장]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히든피스, 그림자 회랑에 진입 가능]
[설명 : 그림자 신의 초대장이다. 소지한 자는 그림자 회랑에 도달할 수 있다. 빛이 있는 곳에도, 어둠만이 가득한 곳에도 그림자는 존재하니. 그림자의 초대를 외면할 순 없으리라.
회랑이 열리기까지 앞으로 : 2일 12시간 32분]
내가 장담하는데…….
‘초대장이 조금만 심미적으로 누추했어도.’
그랑펠은 가뿐하게 무시했겠지.
그러나 초대장은 척 봐도 범상치 않았다.
왜, [흑막을 들추다] 퀘스트에 쓰여 있던 것처럼.
‘격을 갖추지 못했어도 반쪽은 신이라는 건가.’
스멀스멀.
그림자로 일렁거리는 장식들.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심미적인 요소로 치장된 초대장이었다. 심지어는 그 내용도 상당히 예상 밖이었지.
특히 그 마지막 문장이 말이야.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길.』
나는 너그럽게 내뱉었다.
“내키지 않지만, 응해 주마.”
그림자 신, 굉장히 예의 바른 척을 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일단, 격식을 갖추면 그게 악마라도 일단 말 정도는 섞어주는 그랑펠과 달리.
나, 이호열은 이런 면에서 엄격하다.
‘내 눈에는 훤히 보이거든.’
어떤 감언이설에도 변하지 않는 한 줄.
[그림자 신과의 우호도가 최저치에 도달했습니다.]
최대치가 의미하는 바가 크듯.
최저치가 의미하는 바도 크지 않겠냐?
막말로 저 그림자 회랑이라는 곳에 진입하자마자.
그림자 신의 사도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올지도 모른다는 거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회랑이 열리기까지 2일 정도인가.’
남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선 안 된다.
현재로서는 그림자의 회랑에 접근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회랑이 열리기 전,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일단, 현실로 돌아가 보자.’
아르카나 대륙 시간으로 2일인지, 현실의 시간으로 2일인지,
그게 아니라면 시차에 따라 초대장의 남은 시간도 바뀌는 건지.
확실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마탑에도 들려야겠지.’
에메랄드 홀에서 신과 관련된 서적이 있는지 뒤져봐야겠군.
AAU 지부장들을 소집하는 것도 예정된 순서다.
아르카나의 신들이라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설정이라고 한들.
그 영향이 어느 정도 유효하다는 건 수많은 전례를 통해서 확인했었으니, 써먹을 구석이 있다면 써먹어야 한다.
“소란은 자제하는 게 좋겠군.”
불필요한 시선을 끌 필요는 없었다.
차원을 넘나드는 포탈은 상당히 요란하니까.
그래, 나한테는 그놈의 ‘천마군림보’가 있잖냐.
그저 한 걸음을 내디딘 것만으로.
또각.
나는 어느새 마탑에 도착했다.
그 덕분에 심상치 않은 마탑의 공기를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수석의 집무실.
나는 양피지에 남겨진 글줄을 확인했다.
익숙히 봐왔던 치유마법학, 벨리에의 필적이었다.
──────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의 긴급 치유 허가 요청.
──────
*
제시와 우르스.
시공간의 결투.
그 시작과 끝을 전 세계가 지켜봤다.
감상평?
누군가는 환호했다.
-저게 내가 아는 그 쭈구리 같던 제시 하인네스 맞냐??? 말투 뭐냐 이호열한테 배운 거냐??? 쏟아내는 마법은 또 뭐냐? 진짜 가슴이 웅장해진다
-저 정도면 플레이어 중에서 최초 아님??
-뭐래 이호열이 있는데
영겁에 시간 동안 진리를 탐구해 온 대마법사들. 그들의 지식과 비전을 오롯이 활용하게 된 제시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강함을 보여줬으니까.
-아니 이호열은 규격 외니까 당연히 제외고ㅋㅋ
호열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초월자’의 위용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건 누군가의 주먹을 불끈 쥐게 하기 충분했다.
“종진아, 제대로 보고 있냐? 어쩌면 제시 하인네스가 첫 번째 주자가 될지도 몰라. 이호열의 짐을 제대로 나눠 들 수 있는 첫 번째 주자가 말이야!”
그와 동시에 또 누군가는 절망했다.
-제시가 대단한 거는 알겠는데……. 저건 뭐임?
-보면 몰라? 영생의 생물, 우르스라잖아
-그니까 영생의 생물은 또 어디서 나온 듣보잡인데 이호열 다음가는 인류의 비밀병기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랑 맞먹고 있는 거냐고!
-ㅁㅊ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소름 돋네?
영생의 생물, 우르스.
마탑이나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림자 용병단처럼 아르카나 대륙에 널리 알려진 이름도 아니었다.
그런 듣도 보도 못한 존재가 플레이어 중 이호열 다음가는 전력을 보여주고 있는 제시와 대등하게 맞섰다.
아니, 보다 냉정하게 결과를 분석하자면.
“만약, 결투가 계속됐다면 제시 양은 분명 패배했을 겁니다.”
시간 초과로 인한 무승부.
결과에 인류는 더없이 감사해야만 했다.
그러나 시공간의 결투는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건 시공간의 결투장, 객석을 채웠던 플레이어들이 전해온 소식입니다. 정확하게 하루, 24시간 뒤 시공간의 결투가 재개된다고……!”
현재 마탑에서 치유 중인 제시.
정확한 상태는 파악되지 않았으나……. 마지막으로 포착된 모습은 안토니움에서 쓰러진 제시를. 그녀와 친분이 있는 샤이닝의 간부, 카밀라가 부축해 마탑으로 이송하는 장면이었다.
덕분에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하루 뒤 재결투라고? 뭐가 이렇게 빨라?”
“그런 심각한 상태면 제시가 깨어나는 것도…….”
“아니, 내가 봤을 때 우르스는 멀쩡하던데…….”
만약 제시가 시공간의 재결투에 임할 수 없다면.
승부의 행방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더 나아가 제시가 패배하게 된다면.
“혹시, 검성처럼 끝을 봐야만 끝나는 전투인가?”
모두가 상황을 지켜봤기에.
모두가 깊은 수심에 빠지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우려의 결과부터 말하자면.
“……근데 벌써 하루 지나지 않았어요?”
시공간의 재결투는 진행되지 않았다.
“어라? 취, 취소라는데요?!”
.
.
.
세상은 아직 알지 못했다.
모든 건 시공간의 사교장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걸.
정확하게는 사교장 하층을 찾은 높으신 분들.
사교장 상층 분들에 의해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황금의 이그나이트 막시마를 제외한 4가문의 세 가주.
그리고 일찍이 상층에 출입할 자격을 거머쥐었던.
남쪽 바다의 마녀, 메어리.
그들이 시공간의 사교장에 출입.
일곱의 사교장의 하층민들을 향해 선언했다.
정확하게는 전달했다.
“이제부터 누구도 나의 허락 없이 사교장에 입장할 수 없다.”
“빠져나갈 수도 없다.”
“추악한 쓰레기를 반입할 수도 없다.”
호열이 보내온 메시지를.
“이것은 최상층이 제시하는 새로운 사교장의 규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