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6화. 때가 되면 돌아올 것이다 (3)
클라우디령을 바라본다.
마르셀로가 이르되 마법의 역사를 부정하는 마법.
마탑과 마법의 상식을 뒤바꾸리라 평가받았던 나의 『반전 마법』으로도 반전시키지 못한 건 있었다. 영지와 저택에 아로새겨졌던 클라우디의 흔적들이 그러했다.
반전 마법이 만능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가며 새겨진 손때, 온기, 감정까지는 반전할 수 없다. 흉내를 내보려고 해도, 나는 클라우디가 온전하던 시절의 풍경 또한 알지 못한다.
클라우디 가문.
대륙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그들이.
이곳에 어떤 사명을 가지고 머물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까.
당연하잖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클라우디 가문의 역사를.
그랑펠을.
단순한 나의 흑역사라고만 치부했으니까.
그러나 그랑펠을 인정한 순간부터 생각은 바뀌었다.
그렇기에 이 순간.
나는 더없이 엄숙한 태도로 풍경을 바라봤다.
내가 아닌 그랑펠이 말했다.
“어떤 풍경을 좋아하실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클라우디령은 비현실적이게 광활했다.
아르카나인들의 표현으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전설적인 장소라고 하는데……. 플레이어들의 말로는 쉽게 표현할 방법이 있어 다행이다.
‘히든피스.’
나는 광활한 히든피스, 클라우디령에서도 더더욱 세상과 단절된 듯한 장소를 찾았다. 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비루한 표현력으로 비유하자면…….
세계수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신비스러운 장소.
시선을 옮겨 은빛 머리칼이 담긴 보석함을 바라본다.
얽힌 사연은 짐작했던 대로였다.
과거, 그림자 용병단은 클라우디 영애 암살 의뢰를 수행.
증거로 그랑펠 누이 되는 자의 머리칼을 잘라내었다고 한다.
키치는 말했다.
-“머리칼은 오크 옥션이 주관하는 경매에 넘겨졌었습니다. 다만, 경매 단계까지 넘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오크 옥션의 주인, 울리취가 머리칼을 매입…….”
오크 옥션의 울리취라.
익숙한 이름이다.
나름 인연이 있었거든.
최상위 시공간 퀘스트.
그 의뢰를 받아들여 신화 퀘스트를 수행했던 나였다. 그 과정에서 과거의 진입, 칠죄종 오만에게 시달려 공포에 질린 울리취와의 오해까지 풀었지.
‘이것도 나비효과인가.’
울리취는 클라우디를 향한 충심으로 클라우디의 머리칼을 사들였고, 보관했다고 했다. 고맙다, 울리취. 나름 반가운 마음에 당장에라도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건만.
현실보다 네 배 빠른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
‘어쩔 수 없나.’
이전 세대의 그림자 용병단이 벌인 일이었던 만큼. 울리취도 내가 알고 있던 울리취가 아니었다. 그저 울리취라는 이름이 계승되었을 뿐. 내가 아는 울리취는 일찍이 사망한 듯싶었으니까.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어쨌든, 진짜 고맙다. 울리취.’
항상의 자세.
인간미라고는 엿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결같은 표정.
나는 그런 그랑펠을 대신해서 감사를 표했다.
어쩌면.
모든 사태의 원흉일지도 모르는 내가.
이런 말을 하기는 뭣하지만…….
비로소 한 걸음인가.
“그럼에도 당신께서 평온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랑펠이 겪었던 잔혹사를 처음으로 조금이나마 수습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이윽고, 나는 보석함을 내려놓았다.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
그런 나의 곁에는 키치를 포함한 그림자 용병단원들이 있었다. 자신들이 수행한 의뢰는 아니지만, 그림자 용병단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오죽했으면.
“젠장…….”
껄렁했던 말석, 락키드조차도 고개를 숙인 채 감정을 삭이고 있을까?
물론, 지난번에도 말했다시피 이들에게 그 책임을 따져 물을 생각 따윈 없었다.
원래도 없었는데 말이야.
그랑펠 누이의 머리카락과 악크샨의 유물까지 넘겨받은 시점에서 작은 미련까지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
뒤늦은 애도.
‘흔들릴 법도 한데.’
그랑펠은 내가 아는 그랑펠다웠다.
추모에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이의 머리칼이 클라우디령에 돌아온 건.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처럼.
또각.
몸을 돌리고 예정된 일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까부터 신경이 쓰이는 게 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다들?’
졸졸졸.
나의 뒤를 그림자 용병단이 쫓고 있다.
처음에는 그냥 눈치가 빠르구나 싶었다.
내가 누이를 추모하는 걸.
용케도 알아차리고 말없이 따라나서는 줄만 알았다.
‘그랑펠이 군소리를 할 성격은 못되니까.’
굳이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그런 침묵의 동행이 저택을 나설 때부터.
다시 저택으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단 뜻이었다.
이거, 쏟아지는 시선이 따갑다.
“그림자 용병단이다!”
“이호열 총대장님도 계시는데?”
“……혹시 여기서도 뭔가 사건이 벌어지는 건가?”
클라우디령에도 플레이어가 있었다.
마탑 포탈 좌표에 제국 수도, 안토니움이 추가되기는 했다만 클라우디령 좌표가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까. 뭣보다 내 영지라는 사실 하나로 관광 목적으로 들른 플레이어들이 있었거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걸로 누나들한테 시달렸었지.
-야, 호열아 우리는 그 별장 언제 보여줌??
-출세했다 우리 호열이? 벌써 내 집 마련을 다 하고
-대격변이 끝나면 갈 수 있으려나 기대되네ㅎㅎㅎ
플레이어들이 현실로 퍼 나른 클라우디령의 풍경.
‘이럴 줄 알았으면 규율에 촬영금지도 넣었을 텐데.’
넷튜브.
그리고 TV로 본 클라우디령은 그 영주인 내가 봐도 혹할 정도였다.
특히나 대저택이 아주 으리으리하게 찍혔지.
수억의 조회수가 찍혔으니.
안토니움을 두고 클라우디령을 찾는 플레이어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플레이어들에게.
나는 또 진귀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중이었고.
……이거, 착각에 박차를 가하겠군.
최대치에 도달했던 그림자 용병단과의 우호도.
기쁘다면 기뻤다.
어쨌거나, 내가 그림자 용병단에게 나름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소리잖아? 하지만 정작 그 영향력과 우호도를 써먹을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유스라 왕국, 마탑, 프로스트, 안토니움……. 수많은 경험 덕분. 영지에서 영향력과 우호도가 최대치에 도달하면 [권한] 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단 사실을 알게 된 나였다.
‘영지라면 또 몰라도.’
하지만 집단과 쌓은 관계도와 우호도에는 [권한] 시스템 같은 요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눈에 보이는 충성심 같은 게 있긴 했다만…….
‘크게 의미가 있진 않았어.’
그야 내가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명령했을 때.
거부했던 이들이 있었나 떠올려보면…….
정말로 단 한 명도 떠올릴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워낙 자유로운 영혼들이어야 말이지.’
믿음이 크면 충격도 큰 법.
그러니 나는 그림자 용병단에게 무언가를 크게 바라지 않았다.
뒷세계의 지배자, 아르카나 대륙의 대역죄인들 아니시겠냐?
그냥 사고만 치지 않아도 만족이었단 뜻이다.
그런데…….
“총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쏟아지는 시선 속.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독대 요청.
맞은 편에 앉은 울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듣겠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걸까.
설마, 제국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수배령을 풀어달라는 건 아니겠지?
사실 그럴 만한 능력은 충분하다. 말했다시피 제국에서도 [권한] 기능을 활성화한 나잖냐? 좀도둑이든, 대역죄인이든 그 죗값을 삭제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융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원칙주의자.
그랑펠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그런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
하지만 또 받은 게 있어서.
마냥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좀 난처하구만.
속으로 침음을 삼키는데.
“단원 전원의 의견을 모은 결과.”
다행히도 그런 부탁은 아니었다.
“그림자 용병단의 해산이 결정되었습니다.”
진짜 상상도 못 한 이야기라서 문제였지만……!
*
투데이 아르카나.
스튜디오는 전쟁터였다.
그럴 수밖에.
“현 피디님. 방송시간 72시간 돌파했습니다……!”
끝나지 않는 릴레이 편성.
그랬다.
현실에 십좌의 마안이 떠오른 이후.
“제주도 남해상에 떠올랐던 마안이 격추되었다는 소식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붕괴가 예고되었던 균열이 붕괴하며 또 다른 마안이…….”
현실엔 급박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으니까.
현용석은 데자뷔를 보는 듯했다.
피디 직급을 달고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기억하지? 그때 분위기가 딱 이랬는데 말이지.”
“죄송합니다만, 제가 입사하기 전이라…….”
“아, 그래?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됐나.”
대격변 초창기.
붕괴하던 균열.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인류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와 현재 상황은 명백하게 달랐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우리는 변한 게 없군.”
현용석이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막지 못하고 있으니까.”
초창기 당시.
혼란한 인류를 구한 건 각성한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플레이어들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위협에는 그런 플레이어들조차 고전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영웅은 있었다.
이호열.
그는 등장만으로 절망에 빠졌던 세상을 몇 번이나 구원해 냈으니까. 하지만 오직 ‘그’뿐이었다. 이호열의 존재감이 큰 만큼 그 공백도 상당한 게 당연했다.
입술이 저절로 깨물어진다.
‘당신들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다른 플레이어들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감히 할 수 있으랴?
투데이 아르카나의 총괄 책임자였다.
‘나는 플레이어가 아니지만.’
플레이어들이 어떤 부와 명예를 누리는지.
월급쟁이인 자신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화려한 삶을 사는지.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현용석.
허나 현용석은 단 한 번도 그들을 진심으로 부러워하지 않았다.
플레이어의 화려한 삶에 쉽게 현혹됐을지라도.
떠오르는 프롬프트.
-붕괴 균열 공략 도중, 신화 길드 간부 사망.
지금처럼 사건이 터지고 나서는 깨닫게 되니까.
그들이 쟁취한 모든 보상은 목숨을 걸고 얻어낸 것이라는 걸.
현용석이 명복을 빌며 생각했다.
‘우리의 평화엔 저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걸.’
그랬다.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현용석은 쉴 수 없었다.
하지만 아르카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새롭게 갱신되는 프롬프트.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 확인 요망.
“……?”
긴급 업데이트라도 떠오른 건가?
그렇다면 신속하게 그 내용을 보도해야 한다.
현용석은 다급하게 아르카나 홈페이지에 접속했다가 흠칫했다.
“하필이면 이럴 때?”
시공간의 결투!
이호열과 검성이 보여줬던 그 콘텐츠였다. 평상시였다면 당장 긴급 방송을 편성했겠지. 박진감 넘치는 결투만큼 시청률을 보장해주는 게 또 없으니까.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고.
“제시 하인네스라고……?”
대상이 대상이었다.
제시, 그녀는 절대 나서는 성격이 아니다.
그녀가 나섰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뉴욕에 떠오른 마안을 추락시켰던 것처럼.
그러니까 결투의 행방에 더더욱 귀추가 주목될 수밖에 없었다.
제시가 마주한 건 인간도, 식물도 아닌 기괴한 생명체.
우르스.
“무슨 꿍꿍이냐, 대체?”
잘은 모르지만.
만약, 녀석이 승리하게 된다면…….
현실은 더욱더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더불어 이호열에 관한 의존도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이호열, 당신이 짊어진 짐도.’
더더욱 막중해질 테니까.
현용석은 가끔씩 생각해 봤다.
이호열이 처음으로 패배 혹은 실패를 겪는 세계선을.
그 상상의 결말을 말하자면…….
언제나 진심으로 끔찍했다.
“이미 멸망하고도 남았을 거야.”
그러니 그가 짊어지고 있는 짐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니 바랄 뿐이었다.
인류도, 아르카나 대륙도.
더 이상 그에게 많은 의존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때였다.
“……?”
프롬프트가 또 한 번 갱신된 건.
그러나 현용석은 쉽게 반응하지 못했다.
그래, 그건 조금도 생각지 못한.
“!!!”
악의에 잠식된.
빌어먹을 현실을.
반전시킬 또 다른 영웅들의 등장이었으니까.
-아르카나 대륙 플레이어들이 전해온 소식.
-새로운 월드 메시지 갱신.
-악의 천적이 아르카나 대륙에 돌아왔다.
현용석이 소리쳤다.
“악의 천적이라면……? 서, 설마 악크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