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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45화 (445/489)

◈ 445화. 때가 되면 돌아갈 것이다 (2)

……뭔데.

하품이라도 한 거야?

어쨌거나 눈물로 무마할 생각은 하지 마라, 키치.

‘백 번 양보해서 나라면 몰라도.’

피도 눈물도 없으신 우리 그랑펠 님께선 말이야.

남녀노소, 어느 누구의 눈물에도 흔들리지 않으시니까.

나는 키치와 락키드의 마력흔을 추적했다.

‘프로스트 탈환 때부터였나.’

그래도 그림자 용병단과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같은 배를 타왔잖아? 두 사람의 마력흔을 쫓는 거야, 격이 다른 마력 응용력을 지닌 내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늦으랴.

포탈도 아니고.

단숨에 천마군림보로 차원을 뛰어넘었다.

그런데…….

이건 예상 밖인걸.

그림자 용병단 전원이 모여있을 줄은 몰랐거든.

“총대장님을 뵙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해오는 사내.

현 단장인 울프였다.

탈주했던 키치가 다시 그림자 용병단에 합류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 울프는 다시 부단장이 되는 건가?

뭐, 자세한 내부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다만.

나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할 이야기가 많은 표정들이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랑펠식 화법.

‘누가 할 소리냐, 그거?’

나는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바라봤다.

아르카나인과 뒤섞인 플레이어들.

이 공간에 살아있는 건 오직 그림자 용병단 뿐이었다.

‘뭔가 얽힌 사연이 있는 거겠지.’

현 시점에서 플레이어와 아르카나인이 엮일만한 사건?

하나밖에 없었다.

흉조에서 역류한 세력들로부터 발발된 [반란] 월드 퀘스트.

바쁜 와중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기이의 탐구.

덕분이었다.

머릿속에 몇몇 커뮤니티 게시글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이제 우리 뭐함???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뒤처지는 거 아님 ㅅㅂ

-아니 미친 버프를 썩히고 있어야 한다고?!

-평~~~생~~~ 성전 연합군에서 뺑뺑이만 치세요~~~~

-ㄹㅇ 안토니움 주변에 뭐가 없음;;; 태평성대임 그냥

먹고살 길을 찾기 위해서 월드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

마냥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은 아니었다.

나도 플레이어라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내가 제국을 지지하는 것도 결국엔 내가 살기 위함이었으니까.

물론, 제국에게 잘 보이겠단 뜻이 아니라…….

‘제국이 정상화돼야 내가 짊어진 짐이 가벼워지니까.’

단순히 과로사를 피하기 위함.

하지만 이런 풍경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울프가 비장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전투 도중 악마와 마주했습니다.”

그렇다.

플레이어에게 빙의한 건지, 아르카나인에게 빙의한 건지 알 수 없었다만. 이 장소에선 선명한 악마의 악기(惡氣)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울프가 무겁게 말을 잇는다.

“처음부터 악마 사냥을 위하여 행동에 돌입한 건 아니었습니다. 저희 그림자 용병단이 움직인 건 단순히 그림자 용병단의 숙적인 광폭회를 척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그림자 용병단은 광폭회를 쳤고, 그런 광폭회에는 합류한 플레이어들이 있었고, 그 사이에 예상하지 못한 악마가 개입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줄 말은 간단하다.

“그대의 말을 믿겠다.”

월드 퀘스트를 위해 광폭회에 합류한 것도.

합류해서 그들과 공멸한 것도 플레이어 개인의 선택.

그랑펠의 생각도 내 감상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

악마가 관련된 시점에서 그랑펠은 더는 너그러울 수 없으니까.

그런데 의문은 여전했다.

‘천하의 그림자 용병단이 숙적이라 부를 정도면.’

광폭회는 보통 수준이 아닐 거다.

거기에 플레이어들까지 합세.

그것도 모자라 악마족 몬스터가 개입했단다.

아무리 그림자 용병단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악마족 몬스터가 섞여 있었다면 특히 혼란스러웠을 거다.

왜, 악마의 비열함을 생각해 봐라.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서 온갖 개소리를 늘어놨겠지.

특히 같은 플레이어인 나를 들먹이면서.

‘너그러운 건 그랑펠이지, 내가 아닌데 말이야.’

한데, 모든 변수를 고려하더라도.

그림자 용병단은 멀쩡해도 너무나도 멀쩡했다.

그에 관해서 할 말이 있는 모양.

울프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손을 내밀었다.

나는 흠칫했다.

……아니, 잠깐만.

이게 왜 여기에 있냐?!

락키드가 끼어들었다.

“광폭회 쥐새끼들이 우리의 성지에서 그걸 가지고 튀었수다. 나랑 키치가 그 새끼들 뒤꽁무니를 쫓아서 여기에 도달했고, 결국 찾아냈지.”

울프를 시작으로 손을 내미는 단원들.

하나, 둘, 셋…….

전부 일곱.

악크샨의 유물이었다.

‘광폭회가 훔친 거였구나.’

마력 입자가 재연했던 키치와 락키드의 실루엣. 그게 악크샨의 유물인지는 몰랐어도, 자신들의 땅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튄 광폭회를 뒤쫓았던 거겠지.

보자.

‘크흠.’

그러면 이제 유물이 내 것.

아니, 악크샨 거라는 걸 증명해야 하는데…….

이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한다?

청렴결백을 자처하면서 유물을 회수해야 한다니.

참으로 모순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구만.

‘이래서 사람이 너무 정직하게 살면 안 되는 건데.’

봐라.

이렇게 발목을 잡잖냐, 그랑펠.

내가 한탄을 삼키던 도중이었다.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울프가 일곱 개의 악크샨 유물.

전부를 내게 건넸다.

뭐지……?

아니, 이 철면피에 감정이 드러날 일은 없는데.

어떻게 알고 유물을 나한테 건네는 거냐, 다들?

흠칫하던 찰나, 락키드가 입을 열었다.

“광폭회 새끼들은 그게 클라우디를 죽일 무기라고 했지.”

클라우디를 죽일 무기라. 이거, 그림자 용병단은 몰랐어도 광폭회는 악크샨 유물의 가치를 확실하게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심지어 얽힌 사연까지도.

‘보나 마나.’

악마족 몬스터를 통해 접하게 된 정보였겠지.

그 사연을 알고 있다는 건.

이곳에 있던 악마가 보통 녀석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나는 물었다.

“악마의 형태를 기억하는가.”

“물론, 기억합죠!”

그림자 용병단의 7석, 알카리가 답했다. 그와는 비약초와 관련하여 서로의 지식을 나눴던 인연이 있었다. 알카리가 주름진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을 잇는다.

“만드라고라 뿌리처럼 배배 꼬인 촉수였습니다!”

촉수라면……. 태초 악의 부산물이다.

‘시간대를 생각해도 오류가 없어.’

대격변 이전.

마계의 악마가 범람하기 이전의 사연을 알고 있는 건.

아르카나 대륙의 순혈 악마들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의문이 깊어진다.

‘태초 악 부산물, 그거 보통이 아닌데.’

그에 관해선 그림자 용병단도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마치 궁금증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락키드가 답답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니, 내가 궁금한 걸 도저히 못 참는 성격이라 그런데……. 하나만 물읍시다. 이호열……. 아니, 총대장. 당신은 그걸 대체 어디다 써먹는 건지, 알고 있는 거요?”

어디에 써먹기는.

악크샨의 유물이다.

덱시오의 말에 따르면.

‘각각이 칠죄종에 대적하기 위한 마도구라 했었지.’

물론, 구마의식의 제물을 대신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만. 원래 목적은 방금 말했던 대로. 역시나, 무엇 하나 숨기지 못하는 이놈의 성격.

질문에 정직하게 답변하려고 하는데…….

락키드가 두꺼운 손가락을 쭉 폈다.

그러고는 악크샨 유물을 가리켰다.

“그 보잘것없는 것들에서 엄청난 빛이 쏟아져 나왔수다. 광폭회 병신새끼들이 그걸 품에 숨기고 있다가 내던지고, 소리치고, 눈물 콧물을 질질 짜고 장난이 아니었단 말이요!”

……정말?

“아니, 진짜, 뭐가 뭔지, 나 참나!”

과하게 흥분한 락키드.

말보다 의욕이 앞서는 락키드를 대신.

울프가 말을 이었다.

“결과적으로 일곱 개의 마도구 덕분에 저희 그림자 용병단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물론, 광폭회의 아지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8석, 나디보가 목숨을 잃기는 했지만…….”

알카리가 곁에서 거들었다.

“정말로 몰살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악크샨의 유물에서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나왔고, 그 빛에 태초 악 부산물에 빙의된 이들이 타들어갔단다. 덕분에 그림자 용병단은 상처 하나 없이 광폭회를 일망타진할 수 있었단다.

‘악크샨 유물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는 건가.’

지금보다 강성했던 칠죄종에 대적하기 위한 유물.

마찬가지로 아르카나 대륙의 순혈 악마.

태초의 악에게도 상당한 효과가 있는 모양.

슥.

고양이가 생선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나의 시선이 [겸손의 눈물]로 향하던 순간이었다.

락키드가 머리를 벅벅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근데, 저 엄청난 물건이 어째서 클라우디를 죽일 수 있는 물건이라 불렸던 거지? 아무리 이 머리를 굴려봐도 답이 안 나와. 그냥 광폭회 새끼들이 병신이었던 걸까?”

……크흠.

거기엔 입방정이라는.

피할 수 없던 사연이 있었거늘.

‘그보다 유물한테 거부당하면 난감한데, 이거.’

고민하던 순간, 눈앞에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클래스 퀘스트였다.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 내전]

악크샨 기지의 탈주자.

그들은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잊혀진 자들의 협곡으로 숨어들었다.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 진입하여 악크샨의 탈주자들이 탈취한 악크샨의 유물을 되찾아라.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 진입하라. (성공)

-악크샨의 유물을 되찾아라. (성공)

……성공이다.

거부당하지 않았다!

어둠의 이해에서 유물과 안면을 쌓은 덕분인가.

그게 아니라면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된 덕분인가.

나로서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만.

‘그게 중요하냐, 지금?!’

그림자 용병단.

온갖 의뢰를 수행하며 아르카나 대륙의 진귀한 마도구를 지켜봐 온 이들조차 경악한 악크샨 유물의 효과였다. 그 엄청난 능력을 품은 악크샨의 유물이 내 손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덱시오, 어쨌거나 당신이 한 말이 옳았다.

‘그래. 때가 되면 다 돌아오는 거였구나, 이렇게.’

유물의 효과를 확인하기에 앞서 나는 포탈을 발현.

그림자 용병단과 함께 클라우디령으로 복귀했다.

어째서 안토니움을 두고 저택으로 복귀했느냐고 묻는다면.

“규율은 중요한 법이지.”

어쨌거나 그림자 용병단은 제국의 법률을 위반하고 쫓기던 대역죄인들이잖냐? 하지만 클라우디령에서는 제국의 법보다도, 황제의 명령보다도 나의 언령이 우선.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나누도록 하지.”

나의 말에 그림자 용병단, 전원이 고개를 숙였다.

하나둘 빠져나가는 그림자 용병단.

내가 느긋하게 유물의 효과를 살펴보려던 참이었다.

“……클라우디시여.”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키치가 나를 불렀다. 악크샨 유물을 회수했겠다. 클래스 퀘스트 목표도 달성했겠다. 오늘은 기쁜 마음으로 추궁을 생략하려고 했거늘.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구나, 키치.’

그렇다면 나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일곱의 악크샨 유물.

그 효과를 확인하기 전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키치를 처분하자.

그래도 유물을 찾아줬으니까.

‘참작해서 잔소리는 조금만.’

그랑펠과 협상하던 내게 키치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송구하게도 늦고 말았습니다…….”

보석함.

뇌물 따윈 받지 않는 그랑펠 님이시다.

그러나 키치의 표정과 목소리로 보았을 때.

보통 뇌물은 아닌 것 같았다.

어디 살짝 열어라도 볼까?

진짜 뇌물이면 그때 거절해도 되는 거니까…….

달칵.

그러나 보석함을 연 나는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래, 나 ‘이호열’은.

보석함에 담긴 머리칼을 보고 내뱉을 말이 없었으니까.

나.

아니, 그랑펠의 시선이 보석함 속 머리카락을 향한다.

은빛의 머리칼을 시야에 아로새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아닌, 그랑펠의 입술이 움직였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리라.”

그래, 정말로.

덱시오.

당신의 말이 맞았구나.

“돌아오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누이시여.”

.

.

.

[그림자 용병단과의 우호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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