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4화. 때가 되면 돌아갈 것이다 (1)
모든 건 상대적이다.
하지만 절대적인 총량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부정적인 감정도 마찬가지다.
대격변 이전.
아르카나 대륙에 악마는 드물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향하는 곳 또한 한정적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의 순혈 악마.
대죄이자 거악.
칠죄종.
칠죄종이 마계의 악마들을 잡종 취급하며 노골적으로 꺼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힘의 근원이 되는 아르카나 대륙의 부정적인 감정을 그들과 양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대격변 이전, 칠죄종의 힘은 대격변 이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더 나아가 칠죄종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태초의 악도 마찬가지였다.
“덱시오 님……!”
악의에 잠식되어가던 유클라.
그에게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
간단하다.
“마지막까지 억누르고 있었군, 유클라.”
유클라가 끝까지 악의에 저항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악의에 흔들리는 바람에.
부정적인 감정을 흡수한 녀석이 유클라를 집어삼킨 것.
덱시오가 읊조렸다.
“악크샨에 우리의 과오를 전해야 하는데 말이야.”
태초의 악을 경계하라.
녀석의 악의는 우리의 천적관계로도 구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낙담하지 마라.
뎅.
덱시오가 발버둥치는 촉수를 바라봤다.
“무엇이냐, 그 빌어먹을 종소리는……!!”
악크샨의 유물, ‘절제의 종’.
칠죄종과 대적하기 위해 제작한 악크샨의 유물이었다.
칠죄종과 조우할 기회가 없기에.
그 성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거늘.
“크아아아악! 귀, 귀가 썩을 것 같다!!”
태초 악의 부산물이 고통에 몸부림을 치는 걸 보면.
분명, 칠죄종에게도 크나큰 효력이 있을 듯싶었다. 덱시오가 탈주자가 되면서까지. 악크샨의 유물을 악크샨에서 빼돌린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겠지.’
유클라는 결코 나약하지 않았다.
용맹했던 악마 사냥꾼조차 타락하게 한 태초의 악이 악크샨을 노리고 있었다. 더 나아가 마계의 마왕들이 아르카나 대륙을 향해 마수를 뻗쳐올 준비를 하는 지금.
‘악크샨은 고독한 늑대다.’
악크샨에게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이는 대륙에 존재하지 않았다. 드워프들이 있기는 했다만, 그들이 머무는 곳은 아르카나 대륙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
제국도.
여신교단도.
누구도 악크샨을 믿지 않았다.
“이래서 생색을 내야 했던 건데.”
덱시오는 자신이 거쳐왔던 임무를 떠올렸다.
악마를 사냥하고, 저주를 파기하는 임무를.
보잘것없이 포장한 이유는 간단하다.
부정적인 감정은 악마를 살 찌우기에.
공포를 억제하기 위해서 악크샨은 더욱더 작아져야만 했다.
더욱더 보잘것없어져야만 했다.
더욱더 우스워져야만 했다.
덱시오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것이 그 결과인가.”
고생은 고생대로 한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렸군.
그리고.
그것이 그 사내를 신뢰하고자 한 이유다.
그랑펠.
그는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그래, 겸손의 잔을 검은 물로 가득 채우고서도 그는 한 치의 두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뻔뻔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신에게 엄포를 놓았지.
-“원한다면 보아라.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다면.”
덱시오가 또 한 번 웃었다.
“자네는 그 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지 않나.”
겸손의 눈물.
잔을 거머쥔 자가 겸손하다면 잔은 눈물로 가득 차오른다.
단지 그뿐이다.
그것이 덱시오가 그랑펠에게 질문을 던진 이유였다.
-“……그대는 누구지.”
자신이 봐온 그랑펠이라면.
분명, 잔은 메말라 있어야만 했으니까.
그러나 잔은 검은 물로 차올라 있었다.
검은 물이라니, 당황스럽게도 전례가 없던 현상이었다.
그러니 덱시오는 융통성을 발휘한 것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랑펠, 고고한 그대를 동경했을지도…….”
그랑펠에게 악크샨을 맡긴 것이었다.
그대라면 바닥으로 추락한 악크샨의 권위를 바로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대라면 악크샨의 붕괴를 막아낼지도 모른다.
그대의 꼿꼿한 긍지야말로 어떤 악마 앞에서도, 시련 앞에서도 꺾이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이건 내 작은 욕심이지만…….”
어쩌면 훗날.
나의 업적은 물론이요.
악크샨이 행한 모든 업적들의 진정한 가치를.
그랑펠이라면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러니까.
“다들 안심하고 눈을 감아도 좋다.”
스윽.
덱시오는 쓰러진 악마 사냥꾼들을 바라봤다.
살아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질기구나, 악크샨 새끼들.”
촉수가 경박한 말을 내뱉으며 다가온다.
죽음 따윈 두렵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한 지옥을 헤쳐온 자신이었다.
악크샨의 유물?
그것도 괜찮다. 누구도 찾지 않기에 [잊혀진 자들의 협곡]. 협곡의 밑바닥이라면……. 품속의 악크샨의 유물이 다른 이에 손에 들어가는 일은 없으리라.
그러니 괜찮다.
“악마여, 기뻐할 것 없다.”
툭.
덱시오가 악마 사냥꾼들의 시체를 절벽 아래로 떨어트린다. 촉수조차 의문스러워하던 순간, 덱시오의 몸이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펄럭.
“나는 악마 앞에서 물러선 게 아닌, 그저 발을 헛디딘 것뿐.”
허공에서 흩날리는 악크샨의 망토.
덱시오가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읊조렸다.
“때가 되면 모든 건 제자리를 찾아가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겠나.
그랑펠 클라우디…….
뭐더라?
……하여튼 로미오여.
*
눈을 뜨자 시공간의 사교장 최상층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
확실한 소득보다는 의문점이 더욱 샘솟았던 이번 진입. 따라서 어둠의 이해도는 물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숙련도도 심히 우려되었거늘.
[어둠의 이해 (저주) : 적합한 마력 친화력을 대폭 상승시켜 준다. 단, 적합한 마력의 원천이 되는 과거와 직면해야만 한다. - 현재 적합한 마력 친화력 : 40%]
[천상천하 유아독존 (40%) : 불세출, 여신조차 모독하는 희대의 천재.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재능을 발휘한다.]
10퍼센트 상승이면 감지덕지다, 진짜.
내면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면서 [어둠의 이해]에서 목격했던 풍경을 되돌아본다. 어쨌거나, 악크샨 내전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알게 됐다.
‘혹시나가 역시나.’
내가, 그랑펠이 원인이었다.
달칵.
물론, 사건의 주인공께선 여전히 뻔뻔하셨다.
“과연, 그대로군.”
찻잔을 입에 가져다댄다.
애초에 미지근한 물이었으니까.
그대로인 게 당연하지.
“안정적인 맛과 향. 과연, 별 다섯 개가 아깝지 않구나.”
……아주 어련하십니다.
그랑펠의 쇼핑 만족도는 뒤로한 채.
생각을 이어나간다.
유물을 탈취한 악크샨의 탈주자는 덱시오. 그리고 유클라를 포함한 일곱의 악마 사냥꾼이었다. 악마가 아닌 내게 섣부르게 검을 휘둘렀으니까.
‘규율에 따라서.’
악크샨에 머무를 수 없어 악크샨을 떠난다는 것까지는 납득을 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덱시오와 나눴던 대화는 아리송하기 짝이 없었다.
덱시오는 내게서 무엇을 보고.
나에 관한 의심을 지운 걸까.
그리고.
-“때가 되면 모든 건 제자리를 찾아가지 않겠는가.”
그럴싸한 말을 내뱉은 이유는 뭐지.
그저 그랑펠식 화법과 맞먹을 만한.
악크샨식 화법에 불과한 걸까.
궁금증이 앞섰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현실이 바뀌었나 살펴야 한다.’
과거에 개입하면 현실도 바뀐다.
둘 중 무엇이 먼저인지는 기이에 관한 이해도가 부족해 알 수 없다만. 과거와 현재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건 [어둠의 이해]. 그리고 [최상위 시공간 퀘스트]를 수행하며 알게 된바.
‘그렇다면…….’
혹시, 덱시오를 포함한 악크샨 탈주자들이 협곡에서 사망하는 결말이 뒤바뀌지는 않았을까? 물론, 그렇게 된다면 악크샨 유물의 행방은 오리무중이 될 수도 있겠지만.
“둘도 없는 유물이라고 한들, 물질에 불과하다.”
사람 목숨보다 귀한 건 없잖아?
“덧없다는 것이다.”
망설일 필요는 없겠지.
[잊혀진 자들의 협곡] 좌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퇴장.
고오오.
곧장 포탈을 발현했다.
뒤바뀌는 풍경.
재방문의 소감을 뱉었다.
“확실히 떠났나.”
그림자 신이 떠난 [잊혀진 자들의 협곡]은 음산한 기운이 사라져 있었다. 풀 한 포기 없던 땅에 잡초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아찔한 절벽엔 둥지를 튼 새가 보였다.
“그 판단을 칭찬하마.”
그림자 신이 듣는다면 서운해할 말을 내뱉으며 걸음을 옮기기도 잠깐. 나는 악크샨 탈주자들의 유골이 놓여있던 장소에 도달했다. 그러고는 읊조렸다.
“유감이군.”
탈주자들의 유골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처음과 다르게 그 복장이 눈에 익숙해졌다.
유달리 낡은 악크샨의 복장.
그건 틀림없이 [어둠의 이해]에서 목격한 덱시오의 것이었다.
‘진짜 유감인데.’
그런데, 유물이 없었다.
백골은 그대로였지만 유물만 감쪽같이 사라진 것. 그러나 당황은 없었다. 마력이 있었으니까. 나는 곧장 마법을 발현, 이곳에서 있던 일을 마력 입자로 재연했다.
그리고 목격했다.
더없이 익숙한 실루엣을. 한번 보면 잊을 수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사내의 실루엣, 분명 락키드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곁에 있는 여자의 실루엣도 짐작할 수 있었다.
“키치.”
그림자 용병단의 키치와 락키드.
두 사람이 유물의 행방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
역시나 머뭇거릴 이유는 없겠지.
특히나 키치.
“약속보다 중요한 건 없는 법이거늘.”
복귀 약속을 어긴 것부터 시작해서 한두 번이 아니지?
지금부터라도 그럴싸한 이유를 생각해 두길 바란다.
시간 약속에 한정해서 그랑펠의 뒤끝은 장난이 아니거든.
“부디 합당한 사유이길 바란다.”
*
락키드는 사내의 품속을 뒤졌다.
“하아……?”
평상시였다면 다짜고짜 의심했을 거다. 광폭회 새끼들이 벌써 물건을 빼돌렸구나, 이 쥐새끼 같은 새끼들이라며 욕을 한 바가지 내뱉었을 거다.
그러나.
“……뭐, 그럴 수도 있나.”
락키드는 피식 웃음을 뱉었다.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클라우디였다.
티타임에 환장하는 그 양반과 관련된 물건이라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락키드의 손에 들린 건 은으로 제작한 ‘잔’이었다.
보자, 겉면에 늑대가 그려져 있는 잔이다.
“……한잔하고 싶어지는군.”
락키드는 유스라 왕국의 풍경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황금 송아지 주점의 풍경을.
주점의 광경이 유달리 선명했다.
눈앞에 잔뜩 움츠린 모험가들이 앉아있는 듯했고, 귓가에는 주인장의 잔소리가 선했다. 음, 그래. 움직이는 그림이 떠오르는 텔레비전이라는 모험가들의 마도구도 빼놓아선 안 되겠지.
“아.”
락키드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키치, 듣고 있냐……?”
대답이 들려왔다.
“듣고 있어.”
“미안한데. 이제야 생각이 났다.”
“뭐가?”
락키드가 클클 웃었다.
“나 거기 아직 외상값 안 갚았거든.”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었다.
확실히 달랐다.
엘시도어, 그 귀쟁이 새끼한테 얻어터질 때도 악마에게 난도질당해서 사경을 헤맬 때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주마등이었다.
울컥.
락키드의 전신이 상처로 가득했다. 모든 상처에서 피가 솟구쳤다. 지혈은 물론, 알카리가 제작한 포션도 듣지 않을 정도의 부상이었다.
그러니까 락키드는 마지막 유언을 내뱉었다.
“……거, 돌아가면 내 빚부터 좀 갚아줘.”
키치가 고요해진 주위를 바라봤다.
“…….”
이로써 전부 죽었다.
광폭회도, 그림자 용병단도.
락키드를 끝으로 모두가 죽었다.
공멸이었다.
그림자 신과의 계약은 아직 유효했고, 가혹했다.
오직 키치만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다.
“…….”
홀로 살아남아 그림자 용병단의 전멸을 지켜봤다.
키치에게 남은 건 이제 광폭회가 탈취했던.
은으로 만든 일곱 개의 잡동사니들뿐이었다.
“이딴 걸로 클라우디를 죽이겠다고……?”
그림자 신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
처음으로 사기를 당한 것 같았다.
키치가 차갑게 식어가는 락키드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내가 이딴 거랑 너희를 맞바꿨다고……?”
……이게 나의 긍지였다고?
정말로……?
키치의 동공이 공허하게 가라앉은 순간이었다.
고오오─
일곱 개의 은제 잡동사니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건.
비틀어진 과거가.
나비효과가 되어 현실을 뒤바꾸기 시작한 건.
“뭘 그렇게 놀라, 단장……. 아니지, 탈영병?”
시곗바늘이 역행하듯.
차갑게 식었던 락키드.
아니, 그림자 용병단 전원이 되살아난 건.
죽었지만.
죽지 않았기에.
모든 진실을 목격한 키치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번에도 당신이신가요?”
대답하듯 소리가 울렸다.
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