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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43화 (443/489)

◈ 443화. 위선자 (5)

쓸데없이 오해를 사는 입방정.

사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행동.

언젠가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했거늘.

‘근데, 악크샨에서 역풍이 불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대들이 보는 그대로라니……!

진실을 상세하게 말해도 믿어줄까 말까 한 상황이잖아.

그야 내가 악마를 사냥한 건 이 시간대가 아닌 대격변 이후.

아득한 미래의 일.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

대충 나가서 몰래 악마를 사냥했다고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말했잖아?

악마는 찾아보기 힘든 환경이라고.

퀘스트라고 해서 나갔다가 왔더니 고작 외벽 낙서…….

아니, 저주를 파기하는 선에서 끝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덱시오!”

어느새 벌떡 일어난 유클라가 내게 손가락질했다.

주위 분위기도 살벌하군.

특히 상황을 중재하던 덱시오도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랑펠, 내게 겸손의 눈물을 보여라.”

[악크샨 유물 : 겸손의 눈물].

유물에 관한 지식은 많지 않다만, 척 봐도 뭔가 이상이 생겼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흉흉한 검은 물이 가득 차오른 게 좋은 현상은 아닌 것 같았거든.

‘변명을 떠올려라, 호열아.’

……어째 색깔이 딱 콜라 같은데. 현실이면 몰라도 아르카나 대륙에서 콜라라니 말도 안 되는 변명이겠지. 물론, 다행히도 복잡하게 머리를 굴릴 필요는 없었다.

덱시오에게 내뱉는 음절.

“원한다면 보아라.”

척.

절도 넘치게 뻗는 손.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다면.”

아주 그냥 내 무덤을 내가 파는구나……!

다른 이들이 뻔뻔함에 머뭇거릴 때.

덱시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잔을 받아서 들어 그 안을 들여다봤다.

뭐, 유심히 들여다볼 것도 없겠지.

검은 물은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 차 있었거든.

“……!”

덱시오의 동공이 움찔거렸다.

내비치는 감정은 동요.

덱시오가 흔히 보이는 반응은 아닐 터.

화룡점정으로 유클라가 소리쳤다.

“보아라. 클라우디야말로 악마의 핏줄이다!!”

그와 동시에.

스릉─

덱시오를 제외한 모든 악마 사냥꾼이 나를 향해 무기를 치켜들었다.

엄연히 포위된 상황.

하지만 긴장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 다들 악마 사냥꾼이시잖아?

나사가 빠져도 몇 개씩 빠진 우리 선배님들을 상대하는 거?

지금의 나로서는 조금도 부담되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내 걱정은 따로 있었다.

‘클래스 퀘스트, 깨야 하는데.’

머릿속에선 슬슬 퍼즐이 맞춰져 간다.

아마도 퀘스트의 악크샨 탈주자들은 여기.

지하에 있는 악마 사냥꾼들을 말하는 거겠지.

악마가 아닌 인간에게는.

더없이 너그러운 자비를 베푸시는 우리 그랑펠 님이시다.

‘이들을 용서했거나, 도망치게 내버려 뒀거나.’

아마 그랑펠은 두 선택지 중 하나를 택했을 거다.

그렇다면 잘 보관되던 유물이 한꺼번에 유실된 이유도 납득이 간다. 누구도 아닌 그랑펠 앞에서. 그것도 클라우디 가문 언급에 예민해진 그랑펠 앞에서 꽁무니를 내빼야 하는데, 유물을 반납할 정신이 있었으랴.

‘그대로 손에 들고 튄 거지.’

마지막으로 탈주자들의 흔적이 그림자 용병단의 성지, [잊혀진 자들의 협곡] 밑바닥에서 발견된 것도 납득이 된다. 클라우디를 악마로 오해하고 탈주한 이들이다.

‘어쨌거나, 경험자니까.’

그림자 용병단에게 묻기 위해서였겠지.

악마가 분명한 클라우디의 핏줄.

그랑펠을 사냥할 방법을 말이야.

‘이거, 그럼 나 때문에 일이 꼬였을 가능성도 있나?’

사건의 발단은 내가 악크샨 유물.

[겸손의 눈물]을 쥔 탓이었다.

숱한 악마 사냥 후.

손에 묻은 악마의 땟국물을 구마의식으로 씻어내지 않았기에.

그 잔이 검은 물로 차오른 게 아니겠냐.

‘내 팔자야.’

저질렀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사회인의 긍지란 말이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을까.

내가 머리를 굴리던 순간이었다.

스스.

상황이 이래도.

과묵 콘셉트는 한결같으시군, 우리 선배님들.

말도 없이 포위하고 있던 악마 사냥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닥.

최대한 날렵하게 움직여 보려고 하는 것 같으신데, 솔직히 나의 시야에는 굼벵이들이 따로 없다. 결국, 내 얼굴에 침 뱉기라서 심한 말은 하고 싶지 않은데…….

‘자체 페널티가 어마어마하구나.’

치렁치렁.

과도하게 늘어진 악크샨 복장이 가뜩이나 느릿한 동작을 더욱 눈에 띄게 한다.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는 건 나도 선배님들도 피차일반이지만.

‘그래도 내 쪽이 유리하지.’

체력 단련을 통한 [근력], [민첩], [집념]의 수치야 선배님들이 우위에 계실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격이 다른 [마력]의 운용이 있거든.

‘거기에 그랑펠의 재능까지.’

스르르.

나는 마력을 더한 엘프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유려하게 회피했다.

날아드는 정직한 공격.

합동 공격의 호흡이야 나쁘지 않았다만.

“심히 단조롭군.”

최근 들어 보는 눈이 과하게 높아진 나였다.

왜, 그림자 신의 사도와 티격태격하며.

수많은 기교를 익히게 된 참이었으니까.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동시 사격].

단조로운 악크샨의 스킬을 보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그림자 신 사도의 기교를 내 방식대로 고치고, 작명 센스까지 발휘해 빌어먹을 이름까지 붙였단 뜻.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

“나의 ‘인비저블 소드’였다면.”

……하, 제발!

어쨌든, 선배님들에게 훈수를 두는.

나의 움직임과 행동.

그리고 입방정까지.

“보아라. 저 극악무도한 언행을!!”

유클라에게 건수를 잡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나저나, 변명의 여지가 없군. 그랑펠의 독설이 얼마나 독한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현실에도, 아르카나 대륙에도 불가능이란 없다.”

-“그대는 전력으로 도전해보았는가.”

-“시간이 부족하다면 수면 시간을 줄이도록.”

-“단, 티타임은 허용하겠다.”

-“그대는 쓰레기를 연구로 포장하는 능력이 있군.”

마탑의 정기 학회를 앞두고 진행되는 토파즈 홀에서의 검증. 나의 독설에 눈물을 흘리며 토파즈 홀을 빠져나간 숙련 마법사들이 하나둘이 아니었으니.

‘말로 천 냥 빚을 지는구나, 그랑펠.’

한탄하던 도중 메시지가 떠올랐다.

[악크샨 내전이 시작됩니다.]

나는 악마 사냥꾼들의 협공에 단 한 번도 몸을 내어주지도, 반격하지도 않았건만. 적대적인 행위가 발생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 거겠지.

이대로 끝을 보겠구만.

악마 사냥꾼들의 성격이야 내가 잘 안다.

저 고집은 누구도 쉽게 꺾을 수 없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악크샨 내전이 악크샨을 무너트릴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

그렇지 않아도 인적이 드문 본성.

그런 본성의 지하였다.

‘악크샨 내전에 관해 알고 있는 건.’

나를 제외한 여기의 일곱이 전부라는 거겠지.

그렇다면 본성 지하에서 벌어지는 일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일 터. 그렇게 생각하니, 어째서 악크샨 탈주자들이 [잊혀진 자들의 협곡]까지 찾아간 건지 이해가 됐다.

떨어지는 나의 입술.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차디찬 선언.

“각오는 되었나, 덱시오.”

덱시오는 애꿎은 불똥이 튄 기분이리라. 다른 악마 사냥꾼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 때, 덱시오는 정작 잔은 집어 든 채 우두커니 멈춰서 있었으니까.

‘어쩌겠어. 연대책임이라고 생각해라.’

말은 이렇게 했어도 그랑펠이 어떻게 악크샨 선배님들을 심하게 처분할 수 있을까.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마력으로 모두를 짓눌러 버리고도 남았다.

그런데.

“아니, 여기까지다.”

덱시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랑펠, 우리는 지금부터 악크샨을 영영 떠날 것이다. 그렇다. 그대에게 검을 겨눈 순간부터 우리는 악크샨의 배반자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어라.

어째 과정이 건너뛰어진 것 같은데.

하지만 덱시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그 고집 센 양반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살기를 거둔다. 덱시오가 얼마나 많은 악마 사냥꾼의 존경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만, 유클라는 예외였다.

“덱시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유클라, 유감이지만 그대도 포함이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빠득, 유클라가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봤다.

“절대 허튼 소문이 아니었습니다. 클라우디 가문이 멸문한 건 클라우디 가문의 대죄(大罪) 때문입니다. 저는 마주했습니다. 클라우디의 악마를……!!”

하여튼 도움이 안 된다, 악마 녀석들.

‘내 그럴 줄 알았지.’

클라우디의 배신자.

칠죄종 오만과 접점이 있었던 거였어.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그랑펠과 같은 오만의 찬란한 은발.

클라우디의 핏줄임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일 터.

그러나 덱시오는 답했다.

“모두 직감했으리라 믿겠네.”

“무엇을…….”

“그랑펠 앞에서 천적관계는 응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

시스템 메시지를 볼 수 없는 아르카나인이라고 하더라도.

[천적관계]의 발동 유무 정도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거다.

‘전투력 대폭 상승 버프를 모를 수가 없거든.’

덱시오는 혼란한 와중에도 착각하지 않은 것이다.

“섣불리 검을 치켜든 자는 악크샨에 머물 수 없다.”

더없이 엄격한 규율 준수.

“악의에 휘둘린 건 그랑펠이 아닌 우리였다.”

덱시오는 그야말로 악마 사냥꾼의 표본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문답무용, 악마 사냥꾼들이 지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유클라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지하에 남은 건 나와 덱시오 뿐이었다.

덱시오가 그제야 검은 물이 담긴 잔을 비워냈다.

“유물에 관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아니, 자세히는 모른다.

그러나 순순히 인정하지 않는 그랑펠 님이시다.

이번에도 발휘된 침묵의 미덕.

덱시오가 지레짐작하여 말한다.

“그렇다네, 그랑펠. 일곱 개의 유물은 칠죄종을 구속하기 위한 악크샨의 마도구. 그중에서도 그대가 쥐고 있던 겸손의 눈물은……. ‘오만’과 대적하는 유물이지.”

덱시오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잔을 내밀었다.

찰랑.

그 잔에는 눈물처럼 맑은 물이 담겨 있었다.

‘역시, 검은 물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었어.’

사연이 있다고 한들.

억울하다고 한들.

덱시오에게 어둠의 이해요, 과거와 미래요, 플레이어요, 모험가요, 하는 개념들을 이해시킬 자신은 내게 없었다. [스킬]과 『마법』, 그걸 가르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걸 생각해봐라.

‘부디 절반만 가자, 이번에도.’

결국, 나는 이번에도 침묵의 미덕을 발휘했다.

그런 나의 간절한 바람이 닿은 걸까?

덱시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군, 그랑펠.”

솔직히 추궁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유클라도 똑똑히 말하지 않았던가.

클라우디 가문에 대죄를 목격했다고.

덱시오는 내가 악마를 사냥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검은 물이 차오른 이유를, 내가 칠죄종 오만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저벅저벅.

하지만 덱시오는 망설임 없이 나를 등진 채.

발을 옮기고 있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쌍방과묵이면 뭘 어떻게 알 수가 없잖아?’

그때였다.

나의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왔구나, [어둠의 이해]에서 튕겨져 나갈 시간이.

‘안 된다. 이대로는 소득이 없어.’

나는 필사적으로 튕겨져 나가려는 의식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굳게 닫힌 그랑펠의 입술을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내뱉었다.

“어째서 유물을 들고 떠나는 거지.”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유물.

그거는 현실에서 회수해야만 한다.

‘거부당한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덱시오가 처음으로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때가 되면 모든 건 제자리를 찾아가지 않겠는가.”

*

덱시오는 황야에 섰다.

규율이라.

웃기는 소리다.

“덱시오 님, 유클라의 구마의식은…….”

덱시오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무의미하다.”

구마의식은 오직 악마를 사냥하기 위한 의식이다.

악의를 품은 인간을 구분할 의식 같은 게 아니란 뜻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세계수에 선악과가 열리던 태초부터 선과 악은 공존해왔으니.

덱시오는 유물, 겸손의 눈물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그랑펠이 잔을 쥐자 검은 물이 솟구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덱시오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고개를 들게, 유클라.”

그 자리에 악마는 없어도.

악의를 내비친 자는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들이 그 교묘한 악의에 휘둘리고 말았다는 것도.

덱시오가 말을 이었다.

“악마 사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그때였다.

스멀스멀.

유클라의 눈두덩이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린 건.

덱시오.

그리고 악마 사냥꾼들이 일제히 검을 뽑는다.

유클라가 음산하게 웃음을 뱉는다.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눈두덩이뿐만 아니다.

덱시오의 모든 구멍에서 촉수.

정확한 명칭으로는, 태초 악의 부산물이 꿈틀거렸다.

“과연, 악크샨이다.”

유클라의 긍지에 억눌려 있던 악의를 폭발시켰다.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수는 게 옳다.”

그러나 폭발시킨 건 악마 사냥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천적관계 발동.

그랑펠을 포위했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기세.

덱시오가 선언했다.

“과연, 악마는 비열한 족속이다.”

한 손에는 검.

한 손에는 석궁을.

품 속에는 악크샨의 유물을 품고는 장렬하게 응수했다.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냥하는 것이 옳다.”

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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