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42화 (442/489)

◈ 442화. 위선자 (4)

악마의 핏줄, 클라우디.

그 말을 되새겨 본다.

사실 그렇게 불릴 건덕지가 없지는 않지.

‘왜, 그 자식 때문에라도.’

칠죄종 오만.

가주가 된 그랑펠에게 앙심을 품고 클라우디 말살을 실행한 클라우디의 배신자. 그 비극이 악크샨, 악마 사냥꾼 귀에 들려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이때만 하더라도.’

클라우디의 이름이 아르카나 대륙에서 완전히 잊히지는 않았을 테니까. 다만, 의아한 일이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연좌제잖아?

‘……생각해 보니까 억울하네, 이거?’

마냥 그랑펠의 성질머리를 탓할 게 아니었다.

다짜고짜 악마의 핏줄이라니.

나, 이호열이라도.

이씨 가문이 저런 모욕을 듣는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거든.

그 탓일까,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

나와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낸 악마 사냥꾼. 그리고 침묵을 유지한 채 우리 둘을 둘러싼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 이어지던 침묵을 깬 건 내게도 익숙한 사내였다.

“무슨 일인가.”

덱시오.

악마 사냥꾼 전직관.

그에 관해 설명하기 이전에.

첫째로 짚고 넘어갈 건 악크샨에는 공식적인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크샨의 모든 악마 사냥꾼은 수평적 관계였다. 당시에도 납득할 수 있는 설정이었지.

그 실체를 떠나서 악마 사냥꾼은 언제 악마에 빙의될지 모르는, 비유하자면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들이었다. 그런 집단에 계급이 존재한다?

악마라면 얼마든지 악용.

악크샨을 혼란의 도가니탕으로 만들고도 남았을 터.

물론, 악크샨이 배은망덕한 집단도 아니고.

‘그래도 선후배, 스승 제자 개념은 있지.’

그런 의미에서 덱시오는 악크샨의 대스승이었다.

외관부터 심상치 않다. 그의 나이를 짐작케 하는 새하얀 턱수염부터 얼굴과 육체에 남은 상처까지. 그가 어떤 무수한 악마를 상대해왔는지 말해주는 듯했으니까.

‘……뭐, 나는 딱히 배운 게 없긴 한데.’

그도 그럴 게 내가 악마 사냥꾼으로 전직할 때 습득한 스킬을 떠올려 봐라. [천적관계]와 [구마의식]으로 끝. 다른 클래스와 비교했을 때 초라하기 짝이 없었잖아?

그래서일까.

나는 덱시오의 등장에도 빤히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달랐다.

덱시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늘어놨으니까.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덱시오.”

“또 그 소리인가?”

“클라우디는 분명 악마의 핏……!”

덱시오가 사내의 말을 끊었다.

“유클라, 그대에게도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이 왔군.”

유클라.

사내의 이름이었다.

덱시오의 말에 유클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덱시오?”

“이번 악마 사냥이 고되었다는 건 짐작하고 있다.”

“아니오, 제게는 조금도 고되지 않았습니다.”

아하, 악크샨 밖으로 악마 사냥을 갔다 왔구나? 눈치로 보아하니 악마 사냥에서 클라우디 가문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된 모양이야.

악크샨의 철칙을 떠올려본다.

악마를 사냥하는 자는 악마를 들여다보기에 언제든 악의에 물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 철칙을 생각하며 자세히 들여다보니, 실제로 유클라의 눈동자는 상당히 피폐해져 있었다.

유클라가 덱시오의 굳건한 눈빛을 피했다.

“덱시오,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추궁하는 게 아니다. 동요하지 말게, 유클라.”

“……저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스릉.

결국, 나를 향해 은제 검을 뽑아 들고야 말았다. 나는 위축되지 않았다. 내가 악마도 아니고, 악마 사냥꾼의 은검에 겁먹을 이유는 없잖냐.

‘뭣보다 나사가 빠졌다는 건 내가 잘 알거든.’

게다가 유클라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결국, 소란은 거기서 일단락되었다. 어쨌거나 천하의 악마 사냥꾼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덱시오가 선언한 것이다.

“유클라의 구마의식을 준비하도록.”

“……!”

구마의식.

인간에게 빙의한 악마를 사냥하는 스킬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반인에게는 효과가 없다.

나는 시스템창을 확인했다.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유클라는 악마가 아니라는 뜻이다.

설령 악마의 영향으로 그런 말을 내뱉었을지언정.

악마가 빙의한 상태는 아니라는 뜻.

덱시오도 알고 있는 듯했다.

“불쾌하게 여기지 말게, 유클라. 알고 있지 않은가.”

“…….”

“이것은 우리의 복귀 의식과 다름없으니까.”

철칙을 준수하고 악의를 경계하는 악크샨이다.

‘나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악마를 사냥하고 돌아온 악마 사냥꾼들은 필수적으로 구마의식을 받아야 하는 모양.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던 유클라조차도 얌전해진 걸 보면.

덱시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동반 구마의식을 진행할 이를 지원받겠다.”

곳곳에서 손을 드는 악마 사냥꾼들.

하나둘…….

덱시오가 그 수를 헤아리더니 말을 잇는다.

“이런, 한 명이 부족하군.”

과연, 악마 사냥꾼.

준비가 철저하구만.

어떤 돌발상황에도 대응하기 위한 합동 작전이라는 거겠지.

감탄하고 있는데…….

스륵.

나의 손이 저절로 움직인다.

덱시오가 나를 바라본다.

“좋군, 그랑펠.”

어둠의 이해.

그러니까 그랑펠의 과거에서 나는 지켜보는 쪽이었다. 내가 아닌, 그랑펠의 과거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래서 신세를 한탄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직접 지켜보고 싶기도 했거든.

‘어째서.’

유클라가 그런 소리를 내뱉은 건지 말이야.

.

.

.

악크샨 성채.

그 본성에 진입하는 건…….

보자,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을 포함해도 단 한 번밖에 없었다. 그래, 악마 사냥꾼으로 전직하던 그날을 제외하면 본성에 발을 들이는 건 처음이었다.

‘역시.’

심미안이 희번뜩하지 않는다.

악크샨 본성 내부 풍경을 그보다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겉은 화려하지만, 실속이 없다는 걸 본성에도 구현해 놓은 건가?

‘뭐가 이렇게 텅 비었냐?’

살풍경.

사실 악마 사냥꾼 성격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양반들이 음주 가무를 즐기냐, 호화스러운 생활을 즐기냐, 악마 사냥꾼 모두가 악마와의 악연으로 악크샨에 발을 들였다.

모두가 기구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뭐, 그랑펠만큼은 아니겠지만.’

쉬는 날에도 다들 하는 거라곤 육체의 단련뿐.

생활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나의 시선을 끄는 장소가 있었으니.

[히든피스 : 악크샨의 보고]

……오호라.

구마의식이 진행되는 성채의 지하.

슬쩍 눈알을 굴리자 굳게 닫힌 철문이 보였다.

문득, 떠오르는 클래스 퀘스트.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 내전]

악크샨 기지의 탈주자.

그들은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잊혀진 자들의 협곡으로 숨어들었다.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 진입하여 악크샨의 탈주자들이 탈취한 악크샨의 유물을 되찾아라.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 진입하라. (성공)

-악크샨의 유물을 되찾아라. (진행 중)

유물이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곳.

바로 철문 너머 악크샨의 보고일 터.

퀘스트도 그렇고 순수하게 궁금증이 생겼다.

‘악크샨의 유물이라…….’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로서 구경이라도 좀 해보고 싶은데 말이야. 기회가 있을까, 생각하는 도중이었다. 앞서나가던 덱시오가 벌컥─ 철문을 열어 재꼈다.

“전원 유물을 챙기도록.”

……유물을 챙겨?

‘구마의식에 유물이 필요한가 본데.’

물론, 구마의식에는 제물이 필요했다.

왜, 봉인된 악마의 아이템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시대적 배경은 고려해야 하는 법.

‘아직 마계가 열리기 전이다.’

대격변 후와 다르게 악마의 아이템이 흔치 않을 수밖에. 덕분에 악마의 아이템을 대신할 수 있는 악크샨의 유물을 구마의식에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이거, 흥미가 생기는데?

‘악마의 아이템, 그 수준에 따라서.’

흔히 하는 말로 구마의식의 ‘약빨’도 달라졌다.

마왕을 사냥하기 위해서 마왕이 드롭한 마왕의 전리품을 구마의식의 제물로 바치기도 했던 나다.

그때는 정말 쥐뿔도 없어서 스탯 하나하나, 버프 하나하나가 소중했거든.

그렇다면 유물이 구마의식의 효과를, 더 나아가서 악마 사냥꾼의 전투력을 상승시켜 주는 건 아닐까? 기대감을 품고 덱시오를 향해 다가간 순간이었다.

척.

덱시오가 다른 악마 사냥꾼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게 정해진 유물을 건넸다. 보자, 다른 악마 사냥꾼들은 보기만 해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단검, 은화살촉, 팬던트…….

그런데, 왜, 나는……?

‘뜬금없이 잔이냐?’

있어보이는 말로 성배라고 하기에는 악크샨의 잔은 수수했다. 그저 은으로 만든 잔. 특이한 점이 있다면 겉면에 악크샨 늑대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 정도려나.

‘뭔데, 이게. 무기도 아니고. 방어구도 아니고.’

이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악크샨에는 섣부른 기대를 하면 안 되는데……! 하지만 나의 낙담과는 무관하게 그랑펠에겐 조금도 실망한 기색이 없었으니.

‘너, 오히려 좋아하고 있구나.’

하여튼.

녹차를 따를 수 있다면 다 좋다는 거야, 뭐야?

결국, 나는 흔쾌히 덱시오가 건넨 잔을 받아 들고야 말았다.

이윽고 점멸하는 시야.

[악크샨의 유물 - 겸손의 눈물 1/7]

[등급 : 에픽]

[제한 : Lv.0]

[효과 : 구마의식의 제물을 대신하며 그 위력이 상승한다.]

[설명 : 태초 악에서 비롯된 아르카나 대륙의 원죄, 칠죄종. 칠죄종을 사냥하기 위한 악크샨의 유물이다. 궤를 달리하는 이들의 손재주가 담겨 있다.]

대격변 이전부터 마계의 존재.

마왕들의 위험성에 관해 알고 있던 악크샨이긴 하다만. 악크샨의 주적은 어디까지나 아르카나 대륙의 터줏악마인 거악, 칠죄종이었다.

‘확실히 악마와 관련됐을 때만큼은.’

나사가 빠진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프로들답군.

왜, 아르카나 대륙에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세워놓은 것만 봐도 그렇다.

‘그보다 궤를 달리하는 이들의 손재주라.’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스템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틀림없이 드워프를 뜻하는 거겠지? 이렇게 수수한 걸 보면 월스와일이 제작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별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유물을 챙긴 덱시오가 자리를 잡았다.

‘여기쯤인가.’

내가 또 눈치 하나는 잘 본다. 어느샌가 정중앙에 무릎을 꿇은 유클라를 중심으로 나와 덱시오를 포함한 일곱의 악마 사냥꾼들이 정렬했다.

“증명을 위한 구마의식을 시작하겠다.”

뎅.

락시오가 손에 쥔 유물, 종을 흔들자 그와 동시에 구마의식이 시작되었다. 악마 사냥에서 돌아온 악마 사냥꾼들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했겠다.

부르르.

성질 한번 더럽던 유클라도 규율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와의 신경전은 잊은 채, 구마의식에 집중하는 눈치.

나는 지금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니냐.’

훗날 내가 악크샨을 재건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럴싸한 규율은 하나라도 보존하고, 남기고, 전수하기 위해서라도 잘 기억해 두자고.

‘물론, 유물을 회수하는 것부터가 시작일 테지만.’

그런 의미에서 의문이었다.

나름대로 잘 보관되고 있던 악크샨의 유물이다.

일곱 개의 유물이 전부 유실되려면.

분명 나름대로 악마와 관련된 큰 사건이 있었어야 할 터.

머리를 굴리던 찰나였다.

[고유 스킬, ‘구마의식’ 발동에 실패했습니다.]

어라?

눈앞에 낯선 메시지가 떠올랐다. 구마의식 발동이 실패했다니. 제물도 대상도 충족했거늘.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가. 이유를 찾기 위해 허둥댈 필요는 없었다.

덱시오를 시작으로.

“그랑펠.”

어째서인가.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으니까.

나는 그제야 느꼈다.

위화감.

쉽게 반출될 수 없는 악크샨의 유물이 한꺼번에 유실된 이유를.

그랑펠이 악크샨 내전에 당사자가 된 이유를.

마지막으로.

찰랑.

텅 비어있던 잔에서 무게감이 느껴지던 이유를.

잔을 내려다본다.

잔에는 한없이 짙은 검은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덱시오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대는 누구지.”

이거, 내가 성실하게도 악마를 사냥한 것 때문이구나……!

젠장할.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인다고?

악마를 사냥하면 반드시 악크샨으로 복귀해 구마의식을 받아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니. 나는 그런 규율 따위 몰랐단 말이다. 그걸 배우기 전에 아르카나 대륙 전기를 접었단 말이다. 모르고 악마를, 칠죄종을, 마왕을 사냥했단 말이다……!!

‘하나하나 친절히 설명하면 되잖아.’

하지만 그랑펠의 주둥이가 억울함을 얌전히 표출할 리가.

나는 읊조렸다.

“그대들이 보는 그대로.”

그랑펠식 화법으로 태연하게도.

“나는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다.”

……하여튼, 이놈의 주둥이가 문제다!

스릉!

.

.

.

[악크샨 내전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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