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1화. 위선자 (3)
시공간의 결투.
제시는 놀라지 않았다.
다행히도 참고할 만한 발자취가 있었으니까.
호열과 검성 셰그윈이 벌였던 시공간의 결투.
그 결투는 플레이어들뿐만 아닌.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중계됐었다.
[시공간의 결투장에 입장하셨습니다.]
제시는 결투장을 둘러봤다. 텅 빈 좌석이 하나둘 플레이어들로 채워져 간다. 물론, 플레이어들의 표정은 어리둥절한 상황.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관전 메시지가 떠올라서 일단, 승낙했는데. 뭐지?”
“잠깐만……. 여기 그 콜로세움 아냐?”
“이호열이랑 검성이 맞붙었던 거기!!”
이윽고, 자신을 알아본 플레이어들.
“저 고깔모자……? 설마 제시 하인네스?!”
푹.
제시가 고깔모자를 한 차례 눌러쓰고 중얼거렸다.
“스승님 덕분에 제 개성이 너무 강해졌어요.”
-그래서 싫으냐?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투정할 시간에 경계하거라, 제시.
고깔모자 속 탑주는 제시와 초월자의 대화에서 알아차렸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이야.
언제부터 알아차렸느냐고 묻는다면.
초월자 과반이 제시의 시공간 입성에 찬성했다는 순간부터였다.
과반이 고작 일곱에 불과하단다.
광활한 아르카나 대륙이다.
흔치 않은 초월자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머릿수가 열 남짓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 수석과 메어리, 그리고 4가문의 가주들.
그들만 하더라도 헤아려도 이미 여섯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들은 제시의 초월자 입성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으리라. 이 수석의 규율은 더없이 엄격하니까.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진다.
앞서 나열한 초월자들을 제외하면…….
아르카나 대륙에 초월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어째서일까.
간단하지.
고깔모자가 제자에게 현실을 자각시킨다.
-제시, 저들은 네 목숨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녀석들이 초월자의 목숨을 노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닐 게다.
그와 동시에 제시의 눈앞이 점멸했다.
[영생의 생물, 우르스 입장 완료.]
제시가 입을 열었다.
“우르스…….”
마법에 관한 폭넓은 이해를 쌓기 위해서.
제시는 시간이 날 때마다 마탑의 마법 서적을 탐독했다.
덕분에 ‘우르스’의 이름은 익숙했다.
그럴 수밖에.
표지부터 이호열.
이름 석 자가 새겨진 서적에서 등장했던 인물이니까.
──────
비약초의 육성법
저자 : 클레 오디아 숙련 마법사
검수 : 이호열 수석 마법사
──────
고깔모자가 물었다.
-더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읽었던 것 기억하느냐.
“물론이죠!”
제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르스의 행적은 잊기 힘들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고대 왕국이 존재하던 시절, 자신의 영지와 영약을 맞바꿔 섭취한 게 처음. 그 이후, 우르스는 아르카나 대륙을 떠돌며 수많은 영약을 섭취했다.
그런 우르스와 이 수석님은 접점이 있었다.
『우르스는 만물의 왕, 드래곤과 마주할 정도의 생물, 살아있는 영약으로 거듭났다. 허나, 무수한 영약을 섭취한다고 하여 모두가 우르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부디 명심하기를 바란다. 고통 없이 거머쥘 수 없는 힘은 없다는 사실을.』
‘이 수석님답지 않은 당부가 적혀있던 걸 봐선…….’
과거, 서클을 형성하기 위해 영약, 『만년설꽃』과 『작열하는 해바라기』를 동시에 섭취했던 호열. 그 덕분에 찻잔까지 깨트려 먹고 황천을 건너기 직전까지 갔었건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기록으로는 더더욱 남기지 않았으니.
‘그와 관련해서 무언가 알고 계시는 거겠지.’
그저 영약의 힘에도 대가가 있으리라 추측하는 게 고작.
천천히 형태를 갖춰가는 우르스를 바라보며.
제시는 생각했다.
‘내가 그 대가를 공략할 수 있을까?’
진정한 대마법사의 힘을 각성했다고 한들.
상대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게 당연했다.
스승님의 말씀에 따르면 자신에게 텔레파시를 보낸 일곱의 초월자들은 같은 초월자를 우습게 척살할 정도의 실력자란 소리였으니까.
제시가 시공간의 결투에 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경고하던 초월자의 귓속말.
-“유감이군. 반역자는 필요하지 않다, 제시 하인네스.”
고깔모자가 읊조렸다.
-이래서 배움에도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제시야. 마법과 기이에 관해서 이 수석을 선망하는 것은 인정한다만. 그의 독설까지 따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초월자가 아니라 위선자네요.
돌직구를 던진 제시였거늘.
정작 제시는 당당했다.
“제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요, 뭘!”
결국, 서로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었다.
결투가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시공간의 결투장에 입장했던 플레이어들.
“?!!”
관중이 경악을 금치 못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었다.
슥.
우르스의 모습에 술렁이는 플레이어들.
“……저거 사, 사람 맞아?”
인간이라고 하기에 인간의 형태는 극히 일부만이 남아있을 뿐.
우르스는 말로는 묘사할 수 없는 생물체의 모습이었다.
마치 반인반목(半人半木).
식물이 사람이 된 것인가.
사람이 식물이 된 것인가.
좌중이 우르스를 보고 혼란에 빠진 순간이었다.
스왁.
우르스의 팔이 허공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일어나는 바람.
그 파괴력은 몰아치는 태풍에 비교할 정도.
쿠구궁.
완전히 단절된 콜로세움의 객석까지 진동했다.
“……이러다가 큰일 나는 거 아냐?”
“애초에 제시는 뭣 때문에 싸우는 건데?”
“아니, 제시 하인네스가 괜한 일에 휘말릴 성격은 아니지 않나? 이렇게 세상에 떠벌리면서 뭔가를 하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고. 우르스란 놈은 대체 누군데?!”
“강제로 콜로세움에 끌려온 걸지도……?”
웅성웅성.
무수한 추측이 난무하고 있었거늘.
유감스럽게도 예상은 모조리 어긋났다.
감히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서서히 가라앉는 흙먼지 속.
피어오르는 압도적인 기세.
들려오는 제시의 목소리.
“영겁의 세월 동안 영약, 오직 물질만을 갈구한 존재여.”
보랏빛 황혼의 마력을 머금은 눈동자.
“그대가 같은 영겁의 세월 동안.”
“……?”
“진리를 갈구한 우리를 능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인가?”
“……!!!”
제시 하인네스가 저런 말을 내뱉으리라고.
*
누구냐?
[곧, 시공간의 결투가 시작됩니다.]
사교계에는 관심이 없는 그랑펠.
나, 이호열도 그 설정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으니.
덕분에 시공간의 사교장과 관련된.
모든 시스템 메시지는 전부 수신 거부를 해뒀었는데…….
‘사교장에 입장했으니 떠오르는 거겠지.’
대체 이런 상황에 누구랑 누가 치고받고 싸우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만, 당장은 호기심이 생겨도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저주, [어둠의 이해]에 진입한 지금.
내 시야엔 온전한 악크샨의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과연, 기억 속 그대로였다. 치렁치렁 거리는 복장부터 눈을 마주쳐도 서로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정이라고는 코빼기도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까지.
그런 악크샨과 악마 사냥꾼을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린다.’
단번에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거울 치료.
끔찍한 풍경이다, 진심으로……!!
과거의 호열아. 어떻게 저런 자식들……. 아니, 악마 사냥꾼들이 멋있다고 악크샨을 찾아갔던 거냐?! 이거, 그냥 딱 봐도 보통 심각한 인간들이 아니잖아?!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
“붙잡지 마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악마 사냥꾼들은 기본적으로 과묵하다.
인사도 나누지 않는데, 서로를 붙잡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자기가 자기 망토를 밟아놓고서는, 뭐?’
붙잡지 말라니요, 선배님……!!
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랑펠식 화법은 악크샨에 몸을 담은 뒤에 더욱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호전되지 않았으리라고. 그런 면에서 더더욱 의문이 들었다.
‘이제 보니까 피차일반이구만.’
보다시피 악크샨은 상식적인 집단이 아니다.
따라서 그랑펠이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했다고 해도, 크게 미움받을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더더욱 어둠의 이해를, 지금 목격하고 있는 그랑펠의 과거를 파고들어야만 했다.
‘어째서 악크샨 내전에 휘말린 건데.’
어째서.
그림자 용병단 성지에서 눈을 감은 악크샨 탈주자들이 그랑펠을 사냥해야만 한다고 한 건데.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당장에라도 악크샨 기지를 샅샅이 뒤져보고 싶었건만…….
[퀘스트 : 저주 사냥]
……아뿔싸.
간과하고 있었다.
그 시절, 끔찍한 악크샨의 노가다 퀘스트를!
새록새록 떠오르는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기억.
퀘스트를 보니까 완전히 기억이 난다.
뭐, 저주 사냥?
악크샨 퀘스트 아니랄까 봐, 포장지만 상당히 그럴싸하다.
‘하지만 그 실체는…….’
악크샨에서 인근 도시로.
퀘스트 목표를 따라 움직인 나는 외벽 앞에 섰다.
건물의 주인이 말한다.
“그럼, 부탁허이.”
그래, 완전히 떠올렸다.
이 빌어먹을 퀘스트!
그 당시 플레이어 커뮤니티에도.
혀를 내두르던 악마 사냥꾼 플레이어들이 있었지.
-나 코스모 고소한다 ㅇㅇ 과대광고로
-악크샨 늑대한테 속았다고ㅠㅠㅠㅠㅠ
-계정 삭제하고 다시 만들란다 그냥ㅋㅋㅋㅋㅋ
-저주 사냥은 지랄 그냥 벽에 낙서 지우는 거잖아?!!
기능보다는 멋에 스탯을 몰빵한 듯한 악마 사냥꾼 복장.
그런 복장을 애써 착장한 채로.
벽 앞에 쪼그려 앉아 그려진 낙서를 지우는 게 고작.
‘이거, 웬만한 사람은 버티기 힘든 수치심일걸.’
남들은 꿈과 희망을 좇아서 아르카나 대륙을 누비고 있는데, 쪼그려 앉아서 외벽 청소라니. 차라리 계정을 삭제하고 새로운 캐릭터를 키우겠다는 소리가 괜히 나온 게 아니겠지.
그런 의미에서 다시금 감탄을 삼키게 된다.
‘……얼마나 취향이 뒤틀려 있던 거냐, 나는?’
이런 수치심을 극복하고, 기어코 악크샨에 붙어있었다니.
어쨌거나, 나는 외벽으로 다가갔다.
악크샨에 복귀하기 위해선 주어진 업무를 끝마쳐야 하지 않겠는가?
‘어라.’
그런데, 간과하고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저주도 그렇다는 사실을.
점멸하는 시야.
[저주 : 태초에 악이 있었다]
시간대는 대격변 이전.
그러니까 마계의 악마가 아르카나 대륙으로 범람하기 이전의 시점이었다. 하지만 아르카나 대륙에 악마는 태초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태초의 악을 포함한 칠죄종 거악까지.
놈들은 마계의 악마들을 잡종이라 부르는 아르카나 대륙의 순혈 악마들이었으니까. 나, 이호열. 방금까지 악크샨을 헐뜯던 모든 비하 발언을 철회하겠다.
‘어차피 내 얼굴에 침 뱉기였지만, 아무튼……!’
당시엔 그저 노가다 퀘스트라고 여겼던 게.
정말로 아르카나 대륙에 퍼졌던 저주를 정화하기 위함이었을 줄이야.
그랑펠의 입이 열린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거늘.”
알겠다니까?
이번엔 내가 반성한다, 그랑펠.
그보다.
‘아는 만큼 써먹어야겠지.’
과거의 나였다면 쪼그려 앉아 손으로 저주를 지웠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간단한 하급 마법을 발현.
나는 꼿꼿한 자세로 외벽을 말끔하게 닦아냈다.
“역시, 악크샨이야. 다음에도 부탁허이.”
어째 악마 사냥꾼이 아닌 청소부 취급을 받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진실을 알게 됐잖냐. 그렇게 생각하니까 악크샨, 또 한 번 대단해 보인다.
‘진짜 쉽지 않은 일인데.’
사회를 경험해서 그런가.
더더욱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사실은 엄청나게 대단한 일을 해낸 건데.
남들은 보잘것없는 치부하는.
누구도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계속해 온다는 게 말이야.
‘방치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저주야말로 악마에게 제물을 바치는 마법진으로 활용될 수도, 아니면 뜻 그대로 인간의 정신을 무너트리는 저주로 사용될 수 있으니까.
‘만약, 악크샨이 저주를 지우지 않았더라면…….’
청소꾼 취급에 불만을 가지고 저주를 방치했다면.
아르카나 대륙에서 태초의 악과 거악, 칠죄종의 힘?
걷잡을 수 없이 방대해졌겠지.
‘어쩌면, 상위 마왕과 동등하게 군림했을지도.’
그런 상상을 하니까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이 존경스러워지는구만.
물론, 악크샨으로 복귀하자마자.
그 존경심은 말끔하게 날아가 버렸지만.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은 악마 사냥꾼이 말한다.
“옷자락에 걸려 넘어진 게 아니다.”
……아주 그냥 뻔뻔하게도.
“풍경에 취해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했던 것뿐.”
그러고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그대로 뒤로 누워서 눈을 붙이신다.
뭐지, 주둥이가 돌아가려고 작정한 건가?
만약, 그랑펠이 격식을 중시하지 않았다면.
나도 길거리에 나자빠져 눈을 붙이지 않았을까.
방금까지는 참 멋있었는데, 다시 보니까 확 깬다.
‘제발 하나만 해주세요, 선배님들.’
저것도 기이라면 기이일까.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문득,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아씨, 깜짝이야.
‘아니, 당연히 알고 있는 게 당연하지.’
다짜고짜 풀네임으로 불려서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진정하고 고개를 돌리자 웬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 있었다.
악마 사냥꾼이 말을 잇는다.
“그대에게 할 말이 있다.”
……할 말이라고?
말했다시피 서로 인사조차 하지 않는 악마 사냥꾼들이었거늘.
대체 나한테 어떤 할 말이 있다는 걸까.
생각하는 도중, 사내가 물어왔다.
“즐거웠나.”
뭐가, 즐거웠느냐는 걸까, 낙서 지우기?
침묵이야말로 미덕.
내가 입을 다물자 말이 이어진다.
“그동안의 위선은.”
간과할 수 없는 말이 이어진다.
“클라우디, 악마의 핏줄이여.”
……뭐라고?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랑펠이 입을 연다.
“지금부터 내뱉는 한 음절에 신중을 기하여라.”
서늘한 목소리.
허리춤으로 뻗어가는 손.
일촉즉발의 상황.
“내 가문의 무게는 낭설에 오르내릴 정도로 가볍지 않으니.”
이윽고, 주변을 둘러싸는 다른 악크샨 사냥꾼들.
……잠깐만.
설마, 악크샨 내전이 여기부터 시작된 건가?
너 당사자였냐, 그랑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