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40화 (440/489)
  • ◈ 440화. 위선자 (2)

    악연이라면 악연이겠지.

    칭찬이 아니다.

    그랑펠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꽃밭이다. 덕분에 인간을 향한 기대를 쉽게 저버리지 않는 그랑펠에게 악연이라 불릴만한 인간? 악마와 다를 바 없다는 뜻이거든.

    시공간의 사교장.

    나는 그 장소에서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인간.

    류오쥔춘과 마주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류오쥔춘의 머리와.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류오쥔춘의 사망 소식은 아젠트레스.

    그리고 용성락을 통해 전해 들었으니까.

    ‘말대로야.’

    전(前) 천하통일 소속.

    용성락은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이 아는 류오쥔춘이라면 어떤 추잡한 방법을 활용, 죽어서까지 발악을 할지도 모른다고 판단. 잔혹하다면 잔혹한 뒤처리 과정까지 끝마쳤다고 했었다.

    용성락의 비장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명했다.

    -“제가 그에게 배운 건 그런 것뿐이었으니까요.”

    류오쥔췬의 머리를 땅속 깊은 곳에 묻었다고 했겠다…….

    나는 사교장 바닥에 떨어진 흙무더기를 바라봤다.

    ‘누군가 파묻힌 류오쥔춘의 머리를 꺼냈다.’

    누구지.

    일단, 보통 인물은 아니다.

    이곳은 [시공간의 사교장]이니까.

    ‘확실한 건 초월자다.’

    초월자라니, 벌써 빡세구만.

    광활한 아르카나 대륙.

    그런 아르카나 대륙에서 공식적으로 최고의 무력 집단 취급을 받는 마탑이거늘. 그런 마탑에도 서클을 형성, 초월자의 자격을 거머쥔 이는 역사를 통틀어도 극히 일부였다.

    선임 마법사는 물론.

    ‘마르셀로조차 초월자가 아니니까.’

    그 밉상 고양이…….

    ‘아니지, 이젠 고깔모자라고 해야 하나.’

    전 탑주도 온전한 서클을 형성하지는 못했었으니까.

    그러니 나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녀석이냐?

    ‘무슨 꿍꿍이로 이런 기행을 저지른 거지?’

    나의 입술이 떨어진다.

    “그럴 줄 알았다.”

    ……마치 짐작한 것처럼 말하지 마라, 그랑펠.

    “나의 발이 무겁던 이유가 있었군.”

    너는 그냥 사교장에 출입하는 것부터 싫었던 거잖냐……!

    이젠 시체에 불과하지만.

    류오쥔춘이 저질러 왔던 만행을 익히 알고 있는 나였다.

    고운 말이 나올 리가 있나.

    “주제에 사교장이라니, 그대가 있을 곳은 지옥이거늘.”

    명복을 빌어주기는 개뿔.

    이것보다 심한 독설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지.

    그러나 내 입방정은 그쯤에서 멈췄다.

    ‘중요한 건 류오쥔춘이 아니야.’

    어떤 초월자가 어떤 이유로.

    땅에 묻혀 있던 류오쥔춘의 머리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느냐가 문제지.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점멸하는 메시지.

    [이 장소에서 무력 행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알고 있다.

    메시지를 보니까 새록새록 기억이 떠올랐거든.

    검성, 셰그윈과의 첫 대면이었다.

    ‘저 메시지만 믿고 겁도 없이 입을 털었지.’

    전에도 말했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세상에.

    내가 셰그윈하고 선후배 관계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것도 내가 까마득한 악마 사냥꾼 선배가 될 줄.

    ‘어쨌거나.’

    역시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는 마력에 간섭.

    사교장에 얽힌 기억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자화자찬 같아서 조금은 민망하지만……. 십좌의 오르며 황혼의 마력조차 능가하는 마력을 각성했기에 가능한 마법의 발현.

    스스스.

    허공에 ‘격’이 다른 마력 입자가 흩뿌려진다.

    이윽고, 사람의 형태로 변해가는 마력 입자들.

    마치 사교장의 상황을 재연하듯 움직이기 시작한다.

    ‘형태에 불과해서 얼굴을 알아볼 순 없다.’

    심지어 음성도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마력 입자들이 펼치는 연극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였구나?

    이름 모를 초월자의 두 손이 류오쥔춘의 분리된 머리로 향한다. 정수리 부근을 어루만진다. 그러고는 다시금 초월자, 자신의 머리 위로 향하는 손길.

    단번에 행동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어리석구나.”

    빼앗은 거였어, 류오쥔춘의 왕관을.

    “그깟 왕좌를 탐내다니.”

    류오쥔춘의 클래스, [군주].

    4가문, 그리고 황가 세릭로즈에 얽힌 과거를 통해.

    나는 아르카나 대륙에서 군주가 어떤 존재들인지 알게 됐다.

    군주는 말 그대로 군림할 수 있는 그릇.

    군주의 자질을 타고나지 않은 이는 강함을 떠나 왕이라 불릴 수 없다. 그 설정이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군주] 클래스 설정의 여파인지는 알 수 없었다만…….

    ‘다른 설정처럼 실현됐다는 건 변함없다.’

    그렇다.

    초월자는 모종의 방법으로 류오쥔춘의 [군주] 클래스를 강탈. 군주로 군림하기 위한 그릇을 손에 넣은 것이었다. 거울이 없어서 내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거늘.

    장담할 수 있었다.

    나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겠지.

    그야 부귀영화는 ‘따위’로 취급하는 그랑펠 님이시다.

    심지어 최근에는.

    ‘제국의 황제 자리도 거절했다고.’

    그 탓에 독설이 이어진다.

    “그 미련한 얼굴이 궁금해지는구나.”

    자신감 넘치는 선언과는 반대로.

    나, 이호열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떠오른 인간의 형상은 하나가 아니었거든.

    ‘제외하고도 여섯.’

    스스로 왕관을 쓴 초월자를 제외.

    그의 양옆으로 셋씩.

    늘어선 이들이 있었다.

    시공간의 사교장이다.

    그들 또한 초월자라는 소리일 터.

    보자, 일곱의 초월자 연합이라.

    그들이 왕권을 주장하기 위해 나선다라.

    지금쯤…….

    ‘연계된 월드 퀘스트가 떠올랐을 거다.’

    심지어 류오쥔춘의 왕관은 보통 왕관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용성락을 통해 습득했던 정보.

    류오쥔춘은 [폭군]으로 전직을 끝마친 상태였으니까.

    ‘그 영향으로 류오쥔춘처럼 날뛸지도 모른다.’

    일곱의 초월자.

    대륙의 강자들이 연합해 폭군의 길을 걷는다.

    과거의 나였다면 기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뭐, 상위 마왕에 비하면 애교네.’

    셰그윈에게 벌벌 떨던 때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거든, 나도.

    그 증거야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또각.

    나는 걸음을 옮겼다.

    나를 제외한 초월자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사교장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이번에도 점멸하는 메시지.

    [시공간의 사교장, 상층에 진입합니다.]

    상층에 진입할 수 있는 초월자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다.

    4가문의 가주들.

    그리고 남쪽 바다의 마녀라 불렸던 메어리뿐.

    또각.

    그러나 나는 다시금 계단을 올랐다.

    [시공간의 사교장, 최상층에 진입합니다.]

    최상층에 진입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계단이 한두 개도 아니고.

    굳이 다리 아프게 최상층에 오르는 이유가 있냐고 묻는다면.

    그랑펠 기준에서는 쓰레기와 다를 바 없는. 류오쥔춘의 머리가 굴러다니는 사교장 하층에서는. 한순간도 머무르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의사표현이라는 거겠지.

    “추악한 공기는 마실 생각이 없다.”

    그래, 참 너다운 이유다. 그랑펠.

    어쨌거나, 처음의 목표는 잊지 않았다. 내가 시공간의 사교장에 진입한 이유는 [어둠의 이해]를 발동하기 위함. 다행히도 내 발버둥은 유효했다.

    [저주, ‘어둠의 이해’에 진입합니다.]

    서서히 어두워져 가는 시야.

    팅.

    나는 [시공간의 금화] 한 닢을 허공으로 튕겼다.

    곧바로 테이블 위에 나타난 물 한 잔.

    시공간의 상점에서 생명수를 주문한 것.

    지익.

    그러고는 익숙할 수밖에 없는 손놀림으로 포장지를 찢었다.

    포장지에 담긴 티백을 꺼내 잔에 담궈뒀다.

    태연하게 읊조렸다.

    “차가 식기 전에 돌아오겠다.”

    이미 찬물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묻는다면……. 더는 시차라는 [어둠의 이해] 페널티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그랑펠식 화법이라고 하자고.

    그나저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구나, 그랑펠.

    ‘이런 상황에서도 찬물 녹차를 우려내는 걸 보면.’

    내가 못 말린다, 정말.

    헛웃음을 삼키기도 잠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익숙하면서도.

    [악마 사냥꾼의 성지, ‘악크샨’에 진입합니다.]

    “……!”

    아득한 풍경과 함께.

    *

    들썩.

    머리 위 고깔모자가 말한다.

    -조금 더 기뻐해도 좋은데.

    아르카나 대륙.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제시가 답했다.

    “저는 이미 충분히 기뻐하고 있는데요!”

    살랑거리는 고깔모자.

    마치 고양이가 꼬리를 흔드는 듯하다.

    고깔모자가 보다 구체적으로 닦달했다.

    -그래, 제국이 멀쩡한 건 참 다행이지.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안토니움에 복귀한 소감이 아니다. 그토록 귀찮게 여기던 나를 뛰어넘지 않았느냐.

    제시가 전 탑주를 뛰어넘었다?

    어떤 면에서는 맞고, 어떤 면에서는 틀린 소리였다. 하지만 제시는 스승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거리에서 시선을 거두고, 확인하는 스킬창.

    [시공간의 사교 : 의식, 시공간의 사교장에 진입한다.]

    온전한 [대마법사]로 거듭난 제시는 초월자 반열에 도달했다.

    -스승보다 나은 제자는 없다던 그 노친네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광경이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너는 하면 잘하는 아이라고. 그러니 마법에 관심을 가지라고.

    과거, [스킬]과 『마법』의 차이를 알지 못하던 때부터 제시를 닦달한 고깔모자였다.

    철옹성 같던 제시의 고집이 이 수석, 그 사내 하나 때문에 손바닥 뒤집듯 뒤집힌 건 서운한 일이었지만…….

    제자의 괄목할 성장을 봐서 넘어가도록 하지.

    물론, 메어리의 교육도 간과할 수 없었다. 제시와 상당한 시간을 붙어있던 것치고는 둘 사이는 썩 가까워지지 않았다마는. 그 또한 이 수석의 책임이니까.

    -어찌 됐든, 진심으로 자랑스럽구나.

    그러나 탑주에게도 의문은 있었다. 과거, 초월자 문턱까지 도달했던 그녀이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되새겨보는 시공간의 사교장의 출입 조건.

    초월자로 인정받고 시공간의 사교장에 출입하기 위해선 초월자들에게 과반의 찬성표를 획득해야 한다. 그 콧대 높은 이들이 어째서…….

    제시에게 찬성표를 던진 건지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제시가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보인 활약이 아르카나 대륙까지 울려 퍼진 건 아닐 테니까.

    단순한 스승의 노파심이면 좋으련만.

    찝찝한 예감은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제시의 눈앞이 점멸했다.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었다.

    시공간의 사교장.

    플레이어들의 말로는.

    고인물 커뮤니티.

    커뮤니티 기능에 충실하게 구현된 귓속말 시스템. 아르카나 대륙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오직 초월자만이 듣고 응답할 수 있는 텔레파시가 도착한 것이었다.

    -“모험가이자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 놀라지 마라. 그대가 대답하지 못해도 이해하겠다. 그대에게 초월자의 힘은 아직 낯설 수밖에 없을 테니.”

    제시는 대답했다.

    -“누구시죠?”

    낯설 리가 있을까.

    플레이어에게 귓속말 시스템 활용이야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상대는 탄식을 뱉었다.

    -“이런, 부활의 권능은 사라졌어도 모험가를 향한 대륙의 편애는 여전하다는 건가? 초월자가 되자마자 자유롭게 텔레파시를 활용할 줄이야. 오히려 수고를 덜 수 있겠군.”

    ……어째 과대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은데?

    제시는 입을 다물었다.

    때로는 침묵이야말로 미덕.

    과거, 마법에 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호열의 집무실을 찾아갔을 때. 호열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호열의 가르침은 어긋나지 않았다.

    -“직감하고 있었겠지, 제시 하인네스. 그대가 이룩한 업적은 초월자라 불리기에 터무니없이 미약하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그대는 과반의 표를 받아 초월자로 불리게 되었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의미심장한 음성이 뇌리로 이어져 온다.

    -“우리 일곱의 초월자가 찬성했기 때문이다.”

    일곱, 그 숫자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았다.

    일곱이면 현존하는 초월자의 과반 이상.

    최소 일곱의 초월자가 뜻을 함께하는 상태.

    그리고 그 일곱에…….

    ‘이 수석님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절대 확신할 수 있는 이유?

    간단하다.

    더없이 철저한 공과 사.

    그 어떤 이유보다도 원칙과 규율에 충실하신 이 수석님이셨다. 이유를 막론하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신에게 찬성표를 던지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제시는 경계했다.

    마찬가지로 떠올리는 호열의 말.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다.

    과연, 그 가르침 또한 틀리지 않았다.

    -“제시 하인네스,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는가.”

    초월자의 목소리에서 본색이 드러났다.

    -“아니, 그대는 동참해야만 한다. 우리는 새로운 아르카나 대륙에 새로운 질서를 정립할 것이다. 권위가 바닥까지 곤두박질친 미천한 질서가 아니다. 오직 초월자의 시선에서 정립한 새로운 질서를.”

    초월자의 질서가 무엇을 말하는지.

    제시는 알지 못했다.

    물론, 가만히 듣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겠다?

    정작 본인들부터 시공간의 사교장.

    멀쩡한 질서를 어겼으면서.

    웃기는 소리였다.

    만약, 이 수석님이 들으셨다면 한소리 하셨겠지.

    -“당신들, 초월자가 아니라…….”

    분명, 이렇게.

    -“위선자네요!”

    .

    .

    .

    [영생의 생물, 우르스 입장 완료.]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 입장 완료.]

    [곧, 시공간의 결투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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