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8화. 행보 (2)
……어째서냐?
“십좌조차 업신여기는 천마(天魔)의 행보를.”
평소 내 애원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똥고집은 어디 가고.
그 입술로 천마라는 단어를 뻔뻔하게도 내뱉는 건데?!
그래, 사실은 알고 있다.
모든 건 끔찍할 수밖에 없는 혈육 사랑 때문이겠지.
그런데, 이럴 거면…….
‘네가 그냥 이씨 가문 막내 하라니까?!’
그랑펠이야 사연이 있으니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웬수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분명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웬수, 이예림이 그랑펠을 물들인 게.
왜, 단톡방에서 집요하게도 놀려댔으니까.
-그래서 천마재림은 언제야?
-아니 요샌 천마가 대세라니까, 호열아?
-다들 오히려 멋있다고 좋아할걸???ㅋㅋㅋㅋㅋ
멋있긴 개뿔이 멋있다, 진짜……!!
‘지금은 참자, 호열아.’
어쨌거나 가미긴의 전리품을 통해 습득한 고유 스킬.
[천마군림보]의 효과는 대단했다.
동시에 주제 파악을 하게 됐다.
‘역시 나보다 기이의 영역에서 앞서 있어.’
수고스럽게 포탈을 발현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천마군림보를 발현한 순간.
나는 차원을 자유롭게 뛰어넘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보는 것처럼.’
불안정한 균열을 감지하고, 진입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균열은 앞으로 플레이어들에게 있어서 레벨을 올릴 수 있는 사냥터 혹은 던전 따위가 아니다.
‘상위 마왕들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공간이다.’
현실에 생성되기 이전의 균열.
‘불안정한 균열’에 간섭할 수 있는 상위 마왕들이다. 지금이야 마안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데에 그쳤지만, 앞으로는 어떤 개수작과 함정을 파놓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뜻.
지금만 해도 그렇다.
나는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를 비롯한 성전 연합군 소속 플레이어들을 바라봤다. 보자, 아르카나 대륙에 생성된 균열을 통해 이곳에 진입한 거겠지.
‘그걸 상위 마왕들이 알아차린 거고.’
재수가 없는 게 아니라 예정된 수순이었다.
상위 마왕의 마안은 모든 균열에 존재했다. 굳이 이 균열이 아니었다고 해도, 다른 불안정한 균열에서 아르카나 대륙의 플레이어들은 반드시 그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터.
그런 의미에서 천마군림보를 내디딘 건 다행이었다.
파스스.
가공할만한 파괴력이 깃든다는 건 과언이 아니었거든. 나는 등장만으로, 또각거리는 소리만으로 상위 마왕의 정신체를 짓밟아 으스러트렸으니까.
‘진짜 다행이다.’
만약,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만, 상상할 필요는 없었다. 그랑펠이 누군데? 이런 상황에서도 흩어지는 상위 마왕의 분신에게 독설을 내뱉고 있었거든.
“명심하거라. 그대들은 나의 발아래에 있음을.”
이 순간, 상위 마왕들과 말을 섞고 있는 나였다.
그렇다.
‘격’이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에.
나 또한 ‘격’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뜻.
따라서 나의 목소리는 플레이어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진짜, 다시금 감사하게 된다.’
그러니까 다들 어리둥절할 수밖에.
“호, 호열 씨? 아니지, 총대장님이 여긴 어떻게?”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산책 중이었다.”
역시나 틀린 말은 아니다.
균열에서 내가 한 일이라곤 또각 소리를 내며 걸음을 내디딘 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보다……. 다들 듣지 못한 거 맞지? 천마인가 뭔가 하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다들 진짜로 못 들은 거 맞지……?
.
.
.
남태민은 습득한 지식을 머릿속에 새겼다.
“아르카나 대륙에 생성되는 균열은 현실에 생성되기 이전 단계의 불안정한 균열이다. 그 불안정한 균열에 진입할 수 있는 건 ‘격’을 갖춘 이들. 즉, 상위 마왕 혹은 그런 상위 마왕과 동등한 격을 지닌 존재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번에도 남태민이 내린 결론은 아니었다.
균열에서 우연하게 마주친 총대장님.
호열이 친히 알려준 귀한 정보였으니까.
“다들 기억했지?”
남철민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던 남태민.
그런 남태민에게 히사기가 덧붙였다.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잊었습니다, 태민 군.”
“내가? 뭘? 그런 거 없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인 남태민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저희가 그런 균열에 진입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
호열의 말에 따르면.
불안정한 균열은 기이에 관한 이해도를 가진 이들.
격을 갖춘 이들만 진입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들은…….
히사기가 냉정히 말을 잇는다.
“저희는 그 위험성을 파악하기는커녕. 균열 내부에 상위 마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균열에 진입할 수 있었죠.”
슈레이그가 추측을 내놓았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플레이어라서 그런 거겠지? 불안정하다고 해도 어쨌든 균열은 균열이니까. 플레이어는 균열에 자유롭게 진입할 수 있는 존재잖아?”
골똘한 표정을 지어보지만.
광전사의 머리로는 따라가기엔 복잡한 이야기다.
레오니가 짝다리를 짚은 채 중얼거렸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다행이야? 망한 거야?”
잠자코 있던 스칼이 대꾸했다.
“관점에 따라 달라.”
“뭐가 관점에 따라 달라?”
“우리가 예상치 못한 조커가 되거나 짐이 되거나.”
“……!”
“둘 중 하나란 뜻이야.”
만약, 불안정한 균열에 자유롭게 진입할 수 있다는 걸 활용할 수 있다면. 상위 마왕의 계획을 방해하고, 저지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터. 그러나 방금처럼 상위 마왕의 존재,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히사시가 냉정히 덧붙였다.
“총대장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전멸이었습니다.”
반박은 없었다.
“…….”
누구도 상위 마왕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빠득, 누군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한 번 주제를 파악하게 된 탓이 분명했다.
하지만 낙담은 없었다.
“좋아. 그럼 확실한 목표가 생긴 거구나.”
불안정한 균열에 진입.
불안정한 균열을 클리어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한다면, 단순하게 총대장님을 지원하는 걸 넘어서 현실에서 균열이 생성되는 것까지 막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남태민이 주먹을 바로 쥐었다.
“이제야 알겠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어째서 호열이 자신들을 아르카나 대륙에 머무르게 했는지를.
경험치를 비롯한 수많은 버프가 발동 중인 아르카나 대륙이야말로.
플레이어가 성장하기엔 최적의 환경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턴 네 배 빠르게 뛰어보자고, 다들.”
남태민의 말이지만, 히사기조차 토를 달지 않았다.
모두의 의견이 일치한 순간이었다.
걸음을 떼자마자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나만 본 거 아니지?”
“뭘?”
“아니, 균열 내부에서 말이야.”
말했다시피 격을 갖추지 못한 플레이어들은 불안정한 균열 내부에서 상위 마왕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었다. 기껏해야 인근 필드에 서식했던 몬스터를 목격했을 뿐.
슈레이그가 기억을 되짚었다.
“안토니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어. 높아 봐야 200레벨 언저리 몬스터가 출몰하는 필드라는 거지. 상식적으로…….”
레오니가 끼어들었다.
“출현 메시지가 떠오른 게 이상하단 거지?”
별안간 시야에 떠올랐던 출현 메시지.
출현 메시지를 출력할 정도의 몬스터는 해당 필드에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분명, 상위 마왕 중 한 녀석이 출현 메시지를 출력했다는 건데.
[자칭, 천마(天魔)가 출현합니다.]
……대체 자칭 천마가 무슨 뜻이야?
고뇌하던 레오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떤 자식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취향이 심상치 않네.”
*
그림자 용병단.
“그런 이유로……. 이렇게 됐어.”
단장, 울프가 말을 얼버무렸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단장감이 아닌데.”
광폭회를 말살하는 순간까지.
그림자 용병단은 탈주자이자 전 단장인 키치와 합류했다. 울프에게는 유감스럽게도 키치는 울프의 투정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
광폭회가 노리는 건 그림자 용병단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먹잇감인 클라우디, 호열이었다. 그리고 녀석들은 그림자 용병단의 성지,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서…….
‘클라우디를 죽일 수 있는 무기를 손에 넣었어.’
허세나 거짓말은 아니겠지.
다른 어떤 장소도 아닌 그림자 용병단의 성지였다.
광폭회 녀석들도 목숨을 걸고 협곡에 진입했을 터.
허나,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성지를 찾는 것까지는 이상한 일이 아니야.’
그림자 용병단에겐 이미 클라우디의 핏줄을 한 차례 암살한 전과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광폭회 녀석들이 뒤진 장소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녀석들은 은신처 내부에 진입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단지 협곡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시체를 뒤지고 있었을 뿐.
광폭회 녀석들은 누구의 시체를 뒤진 걸까?
누구의 시쳇더미에서.
클라우디를 죽일 무기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걸까?
그쯤에서.
“후.”
키치는 한숨으로 생각을 끊어냈다.
의문은 숨통을 끊기 전에 해결하면 될 일이야.
그녀의 동공이 깊게 가라앉았다.
‘확실히 예전 같지 않아.’
손에 잡혀 오는 비수의 촉감.
키치는 자신의 감각이 무뎌졌음을 직감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꿈도 꿀 수 없던 생활을 계속해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선을 오가며 의뢰를 수행하던 때에 비하면 지금의 육체는 정상이 아닌 게 당연하다. 키치가 락키드를 바라봤다.
‘특히 저 근육 덩어리랑 경쟁적으로 퍼마셨으니까.’
문득, 유스라 왕국의 풍경이 떠오른다.
‘아름다웠지, 유스라는.’
금은보화가 넘쳐서 아름다워 보인다는 속물적인 뜻은 아니다. 고대 왕국으로 모두에게 잊혔던 유스라 왕국이었다. 더불어 그림자 용병단의 악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험가들의 세계였다.
‘과거는 내던지고, 숨어 살기 딱 좋았는데 말이야.’
물론, 제 버릇은 남을 못 준다고.
“……아.”
황금 송아지 주점에 달아놓은 외상값이 뒤늦게 떠올랐다.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유스라엔 언젠가 되돌아가야 되겠지.
그들이 나를 다시 받아줄지는 의문이지만.
‘그림자 용병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그리고 모험가들이 아르카나 대륙에 돌아온 이상.
그림자 용병단의 악명과 과오는 다시금.
수면 위로 드러날 수밖에 없으리라.
유스라 백성과 모험가들은 실체를 알지 못해 자신들에게 친절을 베풀었을 뿐. 그 추악한 민낯을 알게 된다면 그림자 용병단은 다시 음지를 떠돌게 될 수밖에 없겠지.
그러니 키치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 자신들의 악명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심지어는 그림자 용병단에게 소중한 누이를 잃었으면서도.
자신들을 용서한 호열을.
그러니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들려오는 비보에도.
9석, 드쉐브가 입을 열었다.
“나디보가 죽었어.”
정찰병이자 선발대로 광폭회의 영지로 향했던 8석, 나디보.
나디보의 시야 공유가 끊긴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키치가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육체는 온전하지 않다.
공백으로 실전 감각이 무뎌진 건 물론.
그림자 신마저 그림자 용병단을 떠났다.
키치는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림자 신에게 빼앗겼던 그림자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사도 계약이 유효할지도 의문이야.’
그럼에도 되찾아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단순히 광폭회가 탈취한 클라우디를 죽일 무기인지.
당신께서 언제나 말씀하시던 긍지인지는 모르겠지만.
키치는 입을 연다.
“되찾아야겠지.”
그림자 용병단은 움직인다.
“음지의 주인으로서.”
뒷세계의 거물이 대륙에 되돌아왔음을 알리기 위하여.
.
.
[아르카나 대륙에 그림자 용병단의 악명이 울려 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