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7화. 행보 (1)
새롭게 달성했던 업적.
[업적, ‘마계를 목격한 자’를 습득하셨습니다.]
효과를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야 뻔하다. 당장은 그 효과를 써먹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나 사람 인생이라는 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법이다.
[마계를 목격한 자 : 마계를 목격하고, 마계에 관한 이해도를 쌓아올렸다. 그대는 무지를 깨우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 이제부터 마계의 전리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계의 전리품.
당연한 말이지만, 마계에 진입한 뒤에나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마계의 전리품이라 할 수 있는 아이템을 마계의 리치 디스커스에게서 습득했던 나였다.
[마계의 성서, 진(眞) 네크로노미콘]
[등급 : 에픽]
[제한 : 오직 마계의 존재만이 열람할 수 있다.]
[효과 : 이해 시, 마계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다.]
[설명 : 마계의 리치, 디스커스가 집필한 서적. 악마에게 침식된 마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서술되어 있다. 더불어 위험천만한 마계에서 디스커스의 안식처에 출입할 수 있는 증표가 된다.]
‘문제는 이미 내 손을 떠났다는 거지.’
아르카나 대륙과는 또 다른 세계인 마계의 지식.
그 탓에 곱씹어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마탑에 기증, 연구를 부탁했던 참이었거든. 왜, 나 혼자 고뇌하는 것보다 그쪽이 효율이 높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지옥의 악크샨 선배님들께서 이런 식으로 서프라이즈 선물을 전해주실 줄이야. 덕분에 꼭 네크로노미콘이 아니더라도 마계의 아이템, 그 진가를 확인할 기회가 왔다.
[네 번째 왕좌의 말발굽]
[등급 : ???]
[제한 : 네 번째 마왕과 동등한 격]
나는 가미긴의 전리품을 차분히 감정했다.
일단, 등급부터 심상치 않았다.
등급이 물음표, 그것도 세 개라니.
그러나 당황은 없다.
‘마계의 콘셉트인가?’
이미 한 차례 봤거든.
[??? : 마왕 쟁탈전 - 십좌의 증명]
현재 진행 중인 마계 퀘스트의 등급에도 ‘물음표’가 있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마계에 관해 더욱 높은 이해도를 쌓게 된다면 물음표가 제대로 된 글자로 바뀔지도 모르겠지.
‘착용 제한은 이해가 되네.’
원래의 주인과 동등한 격.
다른 플레이어가 그 메시지를 봤다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을 거다. 하지만 부에르의 십좌를 차지하면서 ‘격’에 관해서 완벽히 이해한 나였다.
덕분에 의문도.
자격 미달도 해결하셨다는 말씀.
그러니 나는 지체하지 않고 가미긴의 말발굽을 집어 들었다.
“!”
그 순간, 말발굽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네 번째 왕좌의 비전이 당신에게 스며듭니다.]
스스스.
마치 용광로에 달궈지듯.
강렬하게 타오르던 말발굽이 곧 완전히 나의 손에 스며들었다.
그랑펠의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더없이 불쾌한 일이 아니냐고?
그래, 주둥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긴 하지.
“심히 불쾌하구나.”
그러나.
“그대들의 성의를 무시할 순 없는 법이겠지.”
가미긴의 말발굽은 어디까지나 지옥의 악크샨 선배님들이 보내오신 깜짝 선물이 아니었던가? 그래, 선배님들의 성의를 무시하지 말자, 그랑펠.
‘나도 그 양반들한테 뭘 받는 건 처음이거든.’
그리고 효과를 생각해서라도.
꾹 참자.
말발굽의 효과는 간단하고 명료했다.
[효과 : 가미긴의 고유 스킬을 획득한다.]
무려 고유 스킬을 획득할 수 있단다.
여태껏 수많은 마왕을 사냥하며 마왕의 전리품을 습득하고, 사용해 온 나였다. 하지만 십좌쯤 되면 전리품의 수준도 달라진다는 건가?
‘등급이 에픽에서 물음표로 바뀐 것보다 극적인데.’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곧장 스킬창을 오픈.
새롭게 습득한 고유 스킬을 확인했다.
[파멸의 행보 (Master) : 네 번째 왕좌의 마왕, 가미긴. 그의 말발굽에는 가공할 만한 위력이 깃들어 있다. 그 힘을 거머쥔 그대의 행보, 한 걸음 한 걸음에 가공할 만한 역사가 담기리라.]
역사에 새겨질 정도의 위력이라는 건가?
사용해 보기 전에는 위력을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바로 마탑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마탑의 지하 무간과 마찬가지로 최상층에도 특수한 규칙이 존재한다. 웬만한 마법을 발현해도 멀쩡한 장소가 바로 최상층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연습장으로 쓰기 좋다는 거지.’
나는 곧장 [파멸의 행보]를 발동했다.
보폭에 가공할 만한 파괴력이 담긴다라.
확인하긴 위해선 우선, 걸음을 내디뎌야겠지.
또각.
여느 때처럼 절도 있게 다리를 뻗은 순간이었다.
시야가 급격히 바뀌고, 눈앞에 환각이 스쳐 갔다.
아니, 그것은 환각이라 하기보다는 기억의 잔상이었다.
[고유 스킬, ‘파멸의 행보’가 당신을 평가합니다.]
그렇다.
메시지가 말하는 그대로였다.
가미긴의 고유 스킬이 나를 평가하고 있었다.
내가 비전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인지, 아닌지를.
기억의 잔상 속 가미긴.
녀석은 걸음만으로 모든 것을 파괴했다.
바알을 제외하고, 괜히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녀석이 아니었구나. 바알이 세오른 대륙을 파괴했던 것처럼 가미긴 또한 내가 알지 못하는 대륙을 불사르고 짓밟았다.
다그닥.
그런 녀석의 괴력이.
또각.
이젠 나의 걸음에 깃든다는 뜻이었다.
과거의 이호열이었다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며 살벌한 연출에 지레 겁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근데, 지금 이호열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거든.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이라고?’
우리 그랑펠 님께서 누구시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한 정신력의 소유자.
나는 입을 열었다.
“감히 누가 누구를 평가한다는 거지.”
가미긴의 고유 스킬을 손에 넣었다고 기뻐하지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저 항상의 자세. 언제나와 같은 태도. 나의 보폭은 여전히 일정하고 올곧았다.
“똑바로 지켜보거라.”
나는 보란 듯이 걸어 보였다.
“네게는 나의 걸음이 ‘파멸의 행보’로 보이느냐.”
그리고 가미긴의 비전을 온전히 통제해냈다.
[고유 스킬, ‘파멸의 행보’를 습득하셨습니다.]
당연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그냥 지나칠 수 없듯.
나의 작명 센스가 파멸의 행보라는.
흉흉한 스킬명을 두고 볼 리 없었으니.
나는 다시금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고유 스킬, ‘파멸의 행보’가 변화합니다.]
‘……진짜 이예림.’
중2, 질풍노도의 시기.
주위 환경에 얼마나 민감한 시기인데.
왜 쓸데없는 그런 소리를 해서는.
[고유 스킬, ‘천마군림보’를 습득하셨습니다.]
기어코, 이딴 스킬명을 짓게 하는 거냐고……!!
*
인원을 헤아린다.
바알, 가미긴, 부에르.
잠깐, 아니다.
“이젠 부에르가 아니라 이호열 클라우디인가.”
마계 태고의 존재.
십좌의 주인.
상위 마왕.
셋을 제외한 일곱의 상위 마왕.
전원이 약속장소인 균열로 집결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본체는 아니다.
본체에 비하면 편린에 불과한 정신체가 분리되어 마안의 형태로 발현되었을 뿐. 그들의 본체는 여전히 마계에 머물러 있었다. 또 다른 목소리가 울린다.
“가미긴이 보이지 않는군.”
“지옥에서 사투를 벌이는 중이겠지.”
“그의 부활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
현실에 떠오른 마안을 통해 가미긴이 호열에게 사망했다는 걸 목격한 이들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미긴, 역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체가 죽은 것에 불과할 터.
“명성이 무색하게도 꽤나 쇠약해졌더군.”
“지옥에서 그럴 여력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끈질긴 녀석이니까, 가미긴은.”
그 서열에 따라 가미긴을 향한 평가는 달라졌거늘.
일곱의 상위 마왕.
누구도 가미긴의 부활을 의심하지 않았다. 태고부터 영겁의 세월을 살아 온 자신들이다. 설령 지옥이라고 해도 가미긴은 굴복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그에 반해서.
“부에르, 우둔한 녀석.”
부에르에 관한 평가는 바닥을 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녀석에게 위엄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오죽했으면 디스커스, 리치 따위가 녀석의 왕좌를 차지하겠다고 몇 번이고 도전했겠는가?
“그런 면에서는 유감이다.”
부에르를 처치.
그 십좌를 차지한 존재.
이호열 클라우디.
그에 관한 평가가 이어진다.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하나의 육체에 두 개의 정신이 공존하고 있다. 그는 아르카나 대륙인이라고 부를 수도 모험가라 부를 수도 없는 존재다.”
“그를 탐구의 대상으로 여기지 마라.”
“물론, 탐구하기엔 너무나도 위험한 존재지.”
역시나 관점을 다를지라도 결론은 일치했다. 애초에 일곱의 상위 마왕이 협력한 건 그를 말살하기 위함이었으니까. 냉철하고도 음울한 목소리가 울린다.
“이로써 그의 이상을 확인했다. 이호열 클라우디. 오만하기 짝이 없는 녀석은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 둘 중 무엇도 포기하려는 생각이 없더군.”
비웃음이 이어진다.
“부에르보다도 더한 어리석음이다. 어찌하여 ‘진정한 진리’에 반역하는가? 미련하게도 스스로가 가장 진정한 진리에 가까운 존재이거늘.”
결론이 나왔다.
“허나, 그 잠재력은 이번에도 확인할 수 있었다. 녀석은 존재감만으로 우리가 퍼트린 부정적인 감정을 종식했다. 그 수준을 넘어서 타인의 감정마저 통제해내고 말았지.”
부정적인 감정으로 성장하는 건.
상위 마왕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호열은 더더욱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 감정, ‘긍지’는 위험하다.”
누구도 ‘긍지’에 관해서는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미소를 흘리던 아홉 번째 왕좌의 파이몬조차도 입을 다물었다.
“실로 복잡한 감정이군.”
긍지를 명확히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긍지야말로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
그것이 부에르의 자리를 차지한 호열을 처치하기 위하여.
바알을 제외한 모든 상위 마왕이 협력한 이유였다.
지옥에 떨어진 가미긴도 경고하지 않았던가?
-만만하게 보면 되려 잡아먹힐 것이다.
방심은 금물이라고.
따라서 상위 마왕들은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더욱이 이번 사태로 호열의 이상을 확인한 만큼.
“두 세계를 동시에 무너트린다.”
“바라던바.”
“베히모스의 아가리로 군세를 집결하겠다.”
그 이상향을 무참하게 박살 낼 준비에 돌입했다.
그런 의미에서 반가운 조우였다.
아르카나 대륙의 모험가들이 불안정한 균열에 진입한 것은.
파이몬이 마안을 통해 습득한 현실의 지식을 훑었다.
“저들의 시야에는 균열에 관한 정보가 떠오르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미지에 관한 위협을 무릅쓰고도 균열로 진입했다는 것인가? 실로 칭찬할 만한 각오로구나.”
태고의 존재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미지’였다.
한데, 저들은 미지에 관한 공포를 극복한 이들이었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저것이 긍지라는 것인가.”
파이몬을 비롯해 누구도.
긍지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의견은 일치했다.
긍지란 역병처럼 퍼져 나가는 것.
“그런가.”
“무지하면서도 균열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인가.”
“과연, 그 잠재력이 위협적이다.”
“미리미리 짓밟아놓는 것이 좋겠군.”
“이의는 없다.”
정신체에 본체의 힘.
그 일부가 깃들기 시작한다. 마계에서 균열이라는 불안정한 공간으로 전해지는 힘이기에. 그 효율은 심히 떨어졌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본체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한 힘이라고 해도 플레이어, 성전 연합군을 짓밟는 데엔 차고도 넘쳤으니까. 그러나 상위 마왕들은 간과하고 있었다.
아니, 알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너무나도 강대하기에.
강대해서 그동안 나서지 않았기에.
그들은 마주하지 못했다.
천적, 악크샨을.
마주하지 못했기에.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오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가미긴이 돌아왔다.”
틀림없다.
천지를 울리는 기세.
이것은 가미긴의 발굽 소리다.
“예상보다 이르게 가미긴이 부활한 것인가?”
부활한 게 사실이라면.
그가 이 균열을 찾아온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미긴의 발걸음은 공간을 초월해서 내달릴 수 있으니까.
그러나 말했듯 착각이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건.
그들이 그토록 경계하던 존재.
또각─
호열이었으니까.
어째서.
녀석에게서 가미긴의 기세가…….
설마, 가미긴이 지옥에서 죽었다는 뜻인가?
섣불리 믿지 못할 이야기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짓밟는 건 그리하는 것이 아니다.”
고작 한 걸음.
발을 내디뎠을 뿐이거늘.
가미긴이 세상을 파멸로 몰고 갔듯.
상위 마왕의 일곱 정신체 또한 으스러지고 말았으니까.
경악 속에서.
“밑바닥에서 올려다보아라.”
호열이 읊조렸다.
“십좌조차 업신여기는 천마(天魔)의 행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