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6화. 그럴 줄 알았다 (3)
성전 연합군과 AAU.
긴급 총회가 끝났다.
지부장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하.”
“역시 압력이 장난이 아닙니다.”
“긴장해서 그런가 목이 뻣뻣해요.”
마치 맹수 앞에 던져진 기분.
“그럴 일은 없다는 걸 알지만, 본능이란 게 참…….”
일반인으로서 플레이어와 마주하는 건 언제나 부담이 되는 일이다. 그런 플레이어보다도 마주하기 힘든 이들이 있었으니, 아르카나 대륙의 거물들이었다.
누군가 말을 보탰다.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 마법사님 보셨어요?”
“심기에 거슬릴라, 살짝 흘겨봤는데……. 진짜 장난 아니던데요?”
“특히 눈빛이 굉장했죠.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처럼.”
그중에서도 마탑의 간부들은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었다. 호열이 수석 마법사로 취임한 이후, 마탑은 인류에 더없이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불쑥.
듣고 있던 박민재가 끼어들었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거 안 좋습니다.”
“이런, 미안해요. 박 지부장님.”
“네? 제가 아니라 마탑을 두고 한 말인데요? 마티스 선임부터 마르셀로 탑주까지. 다들 그 비주얼들이 한 존재감 하시지만, 보기와 달리 굉장히 신사적이시거든요.”
박민재는 이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탑주, 마르셀로와 긴밀한 대화를 나눴었다. 마탑이 신속히 붕괴 균열 진압에 나선 건 그의 덕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모든 건 마탑이 서울에 업데이트된 덕분.
오래전부터 그들을 지켜봐 왔기에.
박민재는 마탑을 편견 없이 대할 수 있었건만.
‘……갑자기 나한테 사과하는 이유가 뭐지.’
설마, 내가 마탑 마법사들보다도.
한성깔하게 생겼단 건가……?
박민재가 혹시나 하며 물었다.
“저, 아직도 미친개라고 불리고 있나요?”
“……여기 혹시 녹차 티백은 없나요?”
“하하. 그 이야긴 여기까지 할까요, 미스터 박?”
갑작스레 딴청을 피우는 지부장들.
런던 지부장, 베이커가 그 상황을 중재했다.
베이커가 박민재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그들을 대하는 게 힘들 수도 있겠죠. 마탑의 마법사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플레이어들보다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베이커의 말에 박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라고 긴장을 안 한 건 아니니까요.”
어찌 됐던 박민재를 비롯한 지부장들은 무사히 회의를 마쳤다.
잔뜩 긴장했지만, 회의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단 뜻.
다른 누구도 아닌 호열이 총회를 주도한 덕분이었다.
“유스라 총책임자님께서 하신 말씀 기억하시죠?”
다른 데 정신을 팔 수 없게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막에 불과하다고.”
엄포가 아닌 사실이었다.
“정말로 끊이질 않는군요.”
“미국도 그렇습니까?”
“알림은 없지만, 중국도 마찬가지겠죠.”
이 순간에도 지부장들의 연락망엔 소식이 끊이질 않았다.
붕괴 균열에서 출현한 마안(魔眼)이 대기권을 돌파.
인공위성과 같은 높이에서 부유 중이라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어나더 스페이스 호에서 전송한 사진, 다들 확인하셨으리라 믿겠습니다. 마안, 그 눈깔새끼들이 우주에서도 눈웃음을 짓고 있다고 했죠.”
달라진 게 있다면 그 동공의 개수가 여덟에서 일곱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그 또한 이호열 유스라 총책임자님의 업적일 터.
박민재가 지부장들을 바라봤다.
“이런 피해가 서막에 불과하다니. 앞으로 어떤 끔찍한 시련이 인류를 강타할지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당장 우리에겐 할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미스터 박.”
마안에겐 공격성이 없었다.
공격성이 있다고 해도, 직접적인 공격 능력이 없었다.
아르카나식으로 표현하자면 비선공 몬스터에 불과하다는 것.
“하다못해 저런 눈알 정도는, 우리 선에서 능력껏 격추해야겠죠.”
슥.
박민재의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켰다.
네온사인 빛나는 밝은 도심의 밤하늘이었다.
별은 보일 리가 없었거늘.
붉고 커다란 별이 하늘에서 몇 개나 반짝이고 있었다.
틀림없이 마안이리라.
박민재가 이를 갈았다.
“놈들은 바랐을 겁니다. 현실이 혼란에 빠지기를.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기를. 녀석들의 시커먼 목적을 알았으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억지를 써서라도 내색하지 않아야 합니다. 빚을 되갚아 주기 위해서라도.”
빠득.
단순히 미친개라 불려서가 아니었다.
AAU의 지부장이기에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번 사태로 희생된 플레이어들의 목숨을.
박민재가 읊조렸다.
“애도하되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슬퍼해서도 안 된다라…….”
박민재의 말에 조슈아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게 당장은 쉽지 않군요, 미스터 박.”
그래,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지.
그러나 박민재는 연연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런 생각을 품게 된 건.
코스모 시절의 데이터베이스를 들춰본 덕분이었으니까.
악크샨.
윤수겸, 성현준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에 관한 기록을 살펴봤다.
다시 봐도 나사가 빠져도 몇 개는 빠진 클래스, 악마 사냥꾼.
그러나 나사가 빠졌기에.
그들은 악마에 맞설 수 있던 것이었다.
박민재는 그런 악크샨의 사고방식을 떠올렸다.
“희생도, 사고도, 사망도 아닙니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겠지.
“플레이어들은 긍지롭게 맞서 싸우다 전사한 겁니다.”
*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완전히 다른 두 세계.
플레이어를 통해 현실의 소식이 도착한다.
거대 연합의 세 길드 마스터.
세컨드 썬의 슈레이그.
그리고 스칼.
“역시……!”
성전 연합군의 플레이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보다 네 배가 빠른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이다. 덕분에 기다림은 길게 느껴졌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총대장님이 거절하신 이유가 있었구나!”
히사기가 칼같이 결론을 내렸다.
“저희가 합류했다고 한들, 그 효율이 떨어졌겠죠.”
마탑의 포탈을 활용할 수 있다고 한들.
세계 각국의 붕괴 균열을 제압하기 위해선.
결국, 직접 균열에 진입해야만 한다.
“그렇지, 우리가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성전 연합군에겐 아르카나 대륙에서 할 일이 있었다.
황제의 사망으로 난립한 세력들에게서 제국을 지켜내는 것?
더없이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흐려져가는 말꼬리.
“사실 안토니움에선 딱히 없긴 하지만…….”
모든 건 보통이 아닌 탓이었다.
안토니움에 도착한 지원군의 수준이! 4가문, 붉은 눈의 듄, 다이아몬드 상단까지. 안토니움에서 그들과 교류하며 전력을 파악한 플레이어들이었다.
레오니가 혀를 내둘렀다.
“다들 하나같이 괴물들이야. 우리 도움은 티도 안날 걸.”
총대장님께선 어떻게 저런 세력을 이끌 수 있는 건지, 봐도 봐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 그러나 낙담하진 않았다. 왜, 총대장님께서 말씀을 남기시지 않았던가?
“처음엔 무슨 말씀이신지, 반신반의했는데.”
아르카나 대륙을 부탁하겠다.
호열은 그런 말을 남긴 채.
홀로 현실로 향했었다.
“이제야 알겠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남태민이 말을 이었다.
“우린 여기서 균열을 찾아야 해.”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완전히 다른 두 세계가 뒤섞인 기이의 공간이 바로 균열이다.
입구가 있다면, 출구가 있듯.
현실에 균열이 나타났다면.
아르카나 대륙에도 균열이 나타나야 한다.
남태민이 주먹을 쥐었다.
“아직 확인하지 않아서 추측에 불과하지만……. 현실에 생성된 균열이 붕괴하기 전에 이쪽에서 균열을 클리어할 수 있을지 몰라.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을 필요가 없단 거지.”
슈레이그가 턱을 쓰다듬더니 대꾸했다.
“그거 꽤 일리 있는데?”
바바리안이 [지능]에 스탯을 투자했었나?
근육 덩어리라 여겼던 남태민이 새삼스럽게 다시 보였다. 아무래도 총대장님과 많은 작전을 함께해서겠지. 상황을 바라보는 시야가 자신보다 훨씬 넓었다.
‘나도 분발해야겠군.’
슈레이그가 반성하던 순간이었다.
가늘어지는 뱀눈.
히사기의 예리한 지적이 이어졌다.
“그건 남철민 분석관님의 의견이겠죠?”
“……뭐?”
“태민 군에게 그런 창의성은 없으니까.”
“창의성이 없어? 뭐, 틀린 말은 아닌데…….”
그런 거였나?
“뭐야, 난 또.”
슈레이그가 피식 웃었다.
어쩐지 남태민의 발언에도.
히사기, 레오니, 스칼이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더니.
평소에도 이런 일이 잦았던 모양.
물론, 히사기도 의견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대략 삼십.
남태민 일행은 각 길드의 최정예 간부들과 안토니움을 나섰다.
남태민이 잠자코 있던 스칼에게 물었다.
“스칼. 너, 세계수는 괜찮은 거야?”
“괜찮아.”
“네가 지키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당연히 지켜야 한다.
온전히 뿌리를 내린 세계수는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었으니까.
그와 반대로 스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지금은 그럴 기운이 없어.”
고대하던 드래곤과의 만남은 최악이었다.
-“닥쳐라, 애송이.”
-“넌, 내 등에 타려면 한참 멀었다.”
-“심심한데 노래나 한번 불러보거라, 용기사.”
진짜 드래곤이라면 또 모를까.
폴리모프한 프로즈낙스.
고작 병아리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려온 스칼이 아니던가?
“……재충전이 필요해.”
잔뜩 기대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뭐, 세상에 쉬운 일이 없는 거겠지.
남태민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어깨를 으쓱인 순간이었다.
[호크아이].
“그럴 줄 알았어!”
드넓은 시야로 주변을 정찰하던 플레이어가 신호를 보내왔다.
남태민. 아니, 남철민의 예상대로.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균열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런데.
“다들 보여?”
“아니. 아무것도.”
“저도 보이지 않습니다.”
“슈레이그, 너는?”
“마찬가지야.”
균열의 정보가 보이지 않았다.
균열은 눈에 똑바로 보이고 있었는데.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남태민이 남철민처럼 머리를 굴려본다.
“보자, 아직 현실에 생성되지 않은 균열이라 그런가? 비유하자면 아직 공사 중. 천막을 걷어내지 않아서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고 있다는 거지.”
히사기가 덧붙였다.
“불안정한 균열이라는 걸까요.”
그러고는 뱀눈을 굴려 현재 위치를 파악했다.
대략 수킬로미터.
육안으로 안토니움이 보일 정도의 거리였다.
불안정한 균열 내부에서 피치 못할 상황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습니다.”
스칼도 한마디를 보탰다.
“그 병아리……. 아니, 프로즈낙스가 나한테 말했어. 고삐를 쥐고 있는 건 용기사인 네가 아니라 나라고. 그러니 멀리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말라고.”
……무언가 뒤바뀐 것 같았다만.
“든든하네. 어쨌든.”
스칼에게 위험한 일이 발생하면 프로즈낙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거리이기도 했다. 안토니움 북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뿌리를 내린 세계수였으니까.
덕분에 의견은 일치되었다.
“그럼, 진입하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기에.
단순히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기이의 영역.
불안정하다는 건 간섭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뜻. 생성 직전의 균열이야말로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과는 또 다른 세계인 마계에서 마수를 뻗쳐올 수 있는 유일한 틈이라는 걸.
기이에 관해서 무지한 이들은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목격하지도, 들을 수도, 느끼지도 못할 뿐이었다.
균열 내부, 마계 태고의 존재들을.
-그런가.
-무지하면서도 균열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인가.
-과연, 그 잠재력이 위협적이다.
-미리미리 짓밟아놓는 것이 좋겠군.
-이의는 없다.
허나, 간과한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건 자신들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윽고, 불안정한 균열에 웅장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건 굽 소리였다.
또각.
그렇다.
또각.
누군가에겐 익숙하디익숙한.
또각.
구두 굽 소리.
.
.
.
과연, 서열 4위 마왕이 드롭할 만한 전리품이다.
실로 압도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군.
덕분에 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 사고를 막아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 순간.
나는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점멸하는 메시지.
[고유 스킬, ‘천마군림보’를 발동합니다.]
……진짜 이예림, 내 애증의 웬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