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5화. 그럴 줄 알았다 (2)
네 번째 왕좌의 마왕, 가미긴.
악연이라면 악연이겠지.
물론, 내 입장이 아니라 네 입장에서 말이야.
‘나는 그닥 나쁜 감정이 없거든.’
가미긴을 지옥에 처박았던 시절, 나의 레벨?
높고 낮음을 떠나 근본이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기에 급급했었으니까.
지금과는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가미긴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했거든.’
그야말로 아득한 격차.
그 탓에 때론 가미긴을 지옥에 떨어트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었다. 말이 네 번째 왕좌지, 규격 외인 바알을 제외하면 가미긴은 상위 마왕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녀석이었으니까.
‘끈질겨.’
나는 마안을 내려다봤다.
지옥의 녹색 불꽃.
가미긴은 타오르며 악의를 발산하고 있었다.
-울부짖어라. 녀석에게 절규가 들리도록.
예상했던 이유였다.
가미긴은 내게 복수하고자 나의 웬수, 이예림을 노렸다.
그런 의미에선 다행이다.
녀석이 여전히 지옥에 처박혀 있다는 사실이.
‘풀려났다면 나 혼자선 감당할 수 없다.’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상위 마왕들.
말했다시피 현재, 녀석들이 현실에 끼치고 있는 영향력은 맛보기에 불과했다. 서막이라고 하기엔 도심의 풍경이 흉흉하기 그지없었다만, 과장이 아니다.
녀석들은 세계관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근데, 지금은 아니잖아?’
마계에서 균열이라는, 녀석들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매개체를 통해 뻗치는 마수였다. 그 위력이 빈약할 수밖에 없단 거지. 더 나아가서 가미긴의 영향력?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너, 지금 정상 아니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옥에 계신 악크샨 선배님들에 대한 믿음이……!
물론, 하나뿐인 악크샨 후배.
‘검성, 셰그윈도 포함이다.’
내 믿음이 어긋나지 않았다는 건 비쳐오는 풍경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랬다. 나는 차갑디차가운 시선으로 가미긴의 마안을 내려다보고 있었거늘.
-널 짓밟아 곤죽으로 만들어 주겠다.
가미긴은 내 존재감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럴싸한 연출을 준비했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의 철칙을 떠올리며.
『부정적인 감정이야말로 악마의 근원이다.』
직업병 덕분에 상위 마왕이 개수작을 벌인 이유가 짐작됐다.
너희는 현실에 부정적인 감정을 퍼트리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퍼트리는 건 나도 전문이라서 말이야.
슥.
우아하며 절도가 넘치는 구분 동작.
나는 유낙서스의 유산, [지휘관의 장갑 - 노룡의 지혜]를 착용했다. 하여튼, 장갑 하나도 대충 착용하는 법이 없으시다. 마무리로 옷매무새 다듬기도 잊지 않아 주시는 걸 보면…….
‘하여튼 이놈의 격식.’
평소였다면 쓸데없이 폼을 잡는다고 투덜거렸을 터.
하지만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다.
현실을 뒤덮은 부정적인 감정을.
나의 등장으로.
나의 존재감으로.
완전히 반전시켜야 한다는 뜻.
상위 마왕이라고 한들.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쥐뿔도 아니기에 그대들도 동요할 필요가 없다.
항상을 넘어선 뻔뻔한 태도가 필요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일수록 빛을 발하는 건 이놈의 입방정이다.
나는 가미긴을 향해 입을 열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거, 시작부터 아주 문학적인 표현이군.
입을 여는 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인파.
마탑의 페이얀, 나스로우 선임은 물론이요. 잔뜩 숨을 죽인 채 나를 향해 스마트폰을 치켜드는 시민들. 그리고 전투를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플레이어들까지.
“이, 이호열이다!!”
수치심이 솟아올랐거늘.
‘한두 번도 아니고 참을 수 있어. 그런데…….’
그중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웬수가 보였다.
무사해서 다행이기는 한데.
제발, 천마니 뭐니 헛소리는 하지 말아줘라……!
‘……아르카나 대륙에서 충분히 시달리고 왔다고.’
[드래곤 로드 흑암룡 이호열] 전설에 말이지.
히든 클래스, 드래곤 로드로 전직을 포기한 나였다. 따라서 드래곤 로드의 ‘지배자의 용언’은 사용할 수 없었다만, 그냥 ‘용언’은 또 얼마든지 내뱉을 수 있었다.
[효과 : 신화에 기록될 위대한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가 선포했다. “나의 유산으로 하여금 클라우디께서는 용언을 이해하고 내뱉을 수 있게 되리라!”]
-……어느 틈에.
그제야 나를 알아차린 가미긴에게 말을 이었다.
“보아라.”
장갑을 낀 두 손으로 천천히 장비를 꺼내 들었다.
녀석은 보기만 해도 기겁할만한 악크샨 악마 사냥꾼 특유의 무장.
한 손에는 검.
다른 한 손에는 석궁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선언했다.
“내가 바로 너의 지옥이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몸이 가볍다.
천적관계의 효과가 평소보다 더욱 와닿는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생고생을 하고 온 덕분이겠지. 왜,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서 그림자 신의 사도라는 말도 안 되는 녀석이랑 투닥거렸던 나였으니까.
‘천적관계도 없이.’
스슥.
그 개고생 덕분에 녀석의 기술을 전부 흡수한 나였다. 단순하고, 정직하기 짝이 없던 악마 사냥꾼의 움직임에 이제부터 그림자 용병단의 기교를 더할 수 있게 되었단 뜻이다.
철컥.
[동시 사격]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사.
스와와악.
더 나아가 뻗어져 나간 은제 볼트가 꺾이고 휘어진다.
마법을 더하면 간단한 일 아니냐고?
겉보기엔 별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겠지.
‘근데, 다르더라고.’
직접 상대해 봤기에.
나는 그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은제 볼트는 단순하게 꺾이는 게 아니라 집요하게 상대 시야의 사각을 파고들며 쏘아져 나갔으니까.
또르륵.
가미긴의 동공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볼트를 쫓았다.
마안에게 전투 능력은 전무하다고 했겠다.
그렇다면 주변 몬스터를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방법밖에 없을 테지.
‘그런 의미에선 유감이다.’
만물의 왕, 드래곤.
이 순간, 나의 음성은 만마앙복을 뛰어넘는.
만물앙복의 능력이 담긴 드래곤 피어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덕분에 결말은 뻔했다.
푹.
은제 볼트가 가미긴의 마안 뒤통수에 적중함과 동시에.
마찬가지로 시야의 사각을 파고드는 검격.
그러니까…….
빌어먹을 작명 센스에 따르면 ‘인비저블 소드’가 녀석을 도륙 냈다.
화르륵.
동시에 더욱 거세게 타오르는 지옥의 불꽃.
솔직히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가미긴.
네 번째 왕좌의 마왕쯤 되니까.
지옥에 떨어져서도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거겠지.
그런 의미에선 다시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네게서 타오르는 지옥의 불길은 지옥에 계신 선배님들에게 피워 올리는 봉화가 될 터. 네가 지옥 어디에 숨어서 이런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 일탈도 이젠 끝이란 뜻이거든.
그 사실을 녀석도 직감한 걸까?
-빌어먹으으을 애송이가아아아!!
불꽃 속에서 가미긴은 길길이 고함을 내질렀다.
모인 인파가 귀를 틀어막을 정도로 요란한 발작.
정말로 마지막 발악 같았다.
가미긴.
녀석은 네 번째 왕좌라는 위엄을 내려놓은 채.
흔하디흔한 악마처럼 경박하게 지껄이기 시작했으니까.
-알고 있느냐? 나는 시작에 불과하다. 나를 교활한 술수로 지옥에 떨어트리고, 부에르를 처치했다고 할지라도. 십좌가 의견을 한데 모은 지금. 네 녀석의 세계는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끝까지 협박이구만, 이거.
악크샨의 철칙을 생각한다면 불필요한 대화는 하지 말아야 했거늘. 간과할 수 없는 게 또 사회생활이다. 지옥에서 고생하실 우리 선배님들에게 조금이나마 점수를 따놓을 필요가 있겠지.
‘악크샨 내전 퀘스트를 생각하면 더더욱.’
나는 가미긴의 기를 완전히 꺾기 위해 입을 열었다.
사실 거창한 말이 필요하진 않았다. 지옥에서 그 힘이 쇠약해진 가미긴이다. 그런 이빨 빠진 호랑이와 팔팔한 십좌의 마왕인 나 사이엔 ‘격’이 존재할 테니까.
이 순간.
“□□□□□ □□□□□, □□.”
가미긴은 너는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터.
-나의 격이 저런 애송이에게……?
역지사지.
내가 그때 얼마나 답답했는지.
지옥에 떨어져서도 궁금해 하라고.
*
거실.
울려 퍼지는 TV 소리.
최강희 여사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무사하대요. 예림이도 집에 거의 다 왔다고 하고.”
대격변 초기를 겪어온 건 플레이어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플레이어보다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건. 뛰쳐나온 몬스터에 대응할 능력이 없는 일반인일 터.
이준욱이 입을 열었다.
“대단하지 않아?”
“대단해요? 누가요?”
“우리 호열이. TV에서도 보여주고 있잖아.”
-이호열, 돌연변이 마안 완벽 제압!
자막대로 완벽했다.
플레이어가 아니기에. 호열이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아볼 순 없었다. 하지만 열변을 토하는 TV 속의 전문가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움직임이 또 한 번 성장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특히 사각을 파고드는 무빙. 저건 본능이죠!”
-“에고소드 없이도 이런 전투력이라뇨?!”
다음 소식도 아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르카나 세력들의 협조가 이번 사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이 전 세계로 출탑…….”
아나운서의 말대로.
호열이가 없었다면 이번 사태는 더욱 막대한 피해를 낳았겠지.
그럼에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최강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마냥 다행이라고 하기도 힘드네요.”
자막으로 흘러가는 사상자 소식.
마탑을 비롯한 전 세계가 균열 붕괴에 대응한 이후로 추가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균열 내부에서부터 시작된 사태였다. 사망한 플레이어의 수가 뒤늦게 갱신되고 있었다.
이준욱이 입을 열었다.
“대격변이 완전히 끝나지 않는 이상, 마냥 평화로울 순 없다는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언제까지 마음 편하게 잊을 수 없는 거고.”
TV에선 아직도 떠들고 있었다.
호열이는 압도적으로 강하다고.
어쩌면 정말로 만물의 왕으로 거듭난 건지도 모른다고.
그럼에도 부모의 마음은 편할 수 없었다.
최강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대단해요, 호열이는.”
화면 속 호열이를 바라봤다.
이제는 익숙해진 은발.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낯설 게 느껴질 정도로 대단해요.”
이준욱은 침묵을 지켰다.
“…….”
하나뿐인 아들이 낯설다니.
호열이가 철이 들어서 그런 거라고.
대꾸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공감했기 때문이리라.
문득,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호열이의 목소리.
-“내가 바로 너의 지옥이다.”
이준욱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저 말투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겠지?”
그때였다.
벌컥!
현관문이 열리고 이예림이 귀가한 건.
“예림이 너, 별일 없었지?”
“별일? 있었지! 엄마, 아빠, 나 호열이 봤다!”
“……뭐, 뭐?!”
우선, 이예림은 최강희 여사에게 등짝을 맞았다.
“아! 왜 때려?!”
붕괴 균열에 휘말리다니.
무사하게 귀가를 했다고 해도.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 일도 없다고 문자를 보냈었다니.
“그래서 거기서 호열이랑 만난 거야?”
“응! 완전 눈도 마주쳤잖아?”
“자랑이다. 자랑이야.”
“자랑이지, 그럼. 나밖에 없잖아? 일하는 호열이 본 거!”
다시금 등짝을 강타하는 손바닥.
“아씨, 엄마!”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다, 예림아.”
“그치, 다행이지? 맞아, 엄청 다행이야.”
이준욱과 최강희, 부부는 눈빛을 교환했다.
한 살 터울.
사실상 쌍둥이라 불러도 무관할 정도로.
가까운 예림이와 호열이었다.
덕분에 티는 내지 않아도.
때로는 부모인 자신들보다도.
호열이를 누구보다 우려했던 막내딸이었다.
한데, 그 막내딸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너, 정말 괜찮지?”
“괜찮다니까. 등짝 맞고도 멀쩡하잖아?”
“호열이도 괜찮고?”
마지막 질문은 호열이의 안위를 묻는 게 아니었다.
네가 바라보는 호열이가 괜찮냐는 뜻이었다.
보다 직접적으로 설명하자면…….
자신들이 호열이에게 느낀 낯섦을 느끼지 못했느냐는 물음이었다.
“음.”
이예림은 잠깐 고민했다.
누구보다 가까운 핏줄이기에 모를 수 없었다. 플레이어가 된 이후로, 호열이는 확실히 달라졌다. 언젠가는 낯설다는 감정을 넘어서 호열이가, 호열이가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러나.
“똑같았어. 확실히 우리 집 막내였어.”
오늘로써 그런 생각은 떨치게 되었다.
사람은 변하니 호열이도 변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게 누나인 나보다 빠르게 철이 든 건지도 모르겠지.
그럼에도 호열이는 여전히 호열이었다.
마지막 말에서 느낄 수 있었으니까.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누님.”
여전한 애증을.
*
탑주, 마르셀로.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
AAU의 지부장들까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나는 선언했다.
균열이 생성되는 이상.
마안은 계속해서 떠올라도 이상하지 않다.
오늘 긴급 업데이트 이후.
현실은 매 순간, 거대한 위협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다들 표정이 장난 아니었지.’
진지한 걸 넘어서 비장한 표정들이었다.
짧았던 평화가 끝났음을 느낀 거겠지.
물론, 집무실로 돌아온 나의 표정 또한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책상 위.
내가 모르는 아이템이 놓여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력을 발산.
아이템의 행적을 역추적했다.
그러나 어떠한 기억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이 아이템은 이 세상 사람이 가져다 놓은 게 아니다.
당연하게도 아르카나 대륙 사람이 가져다 놓은 것도 아니다.
“그렇군.”
저세상 사람이다.
지옥의 악마 사냥꾼.
지옥의 악크샨 선배님들께서 내게 전달하신 아이템.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집어 드는 순간, 떠오르는 정보.
[네 번째 왕좌의 말발굽]
[등급 : ???]
“너의 지옥이라고.”
가미긴.
녀석이 지옥의 선배님들에게 사냥당했다.
그 가미긴의 전리품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