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4화. 그럴 줄 알았다 (1)
악마 주제에 협력?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잘도 합의를 끝마쳤군.
아니면 내가 어지간히 신경 쓰였나 봐?
‘잘난 거 알겠으니까. 어깨에 힘 좀 빼자, 그랑펠.’
묵묵히 긴급 업데이트 내역을 되새겨본다.
나와 바알을 제외한 여덟의 상위 마왕.
녀석들은 현실도, 아르카나 대륙도 아닌.
균열에서부터 마수를 뻗쳐오고 있었다.
‘솔직하게 예상 밖이다.’
그럴 수밖에.
균열은 기이의 공간이다.
[기이의 대종사] 칭호를 거머쥔 나도 아직 균열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거늘. 하지만 기이의 영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상위 마왕, 여덟이 의기투합한 상황이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저 정도 영향력은 끼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현실의 반응?
세계가 동요할 수밖에 없으리라.
빙의만 해도 성가시기 짝이 없는데, [타락]이라는 새로운 상태이상이라니. 그 효과가 일반 몬스터를 악마족 몬스터처럼 부려 먹을 수 있는 거라니.
어디서 저런 무지막지한 놈들이 튀어나온 건가, 싶겠지.
하지만 그조차도 일부에 불과하다.
상위 마왕의 실체를 고려하면…….
‘저건 전력이 아니니까.’
균열.
불안정하고, 녀석들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기이의 매개체를 사용했기에. 여덟의 상위 마왕은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
동시에 내가 평소처럼 나설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지원하겠습니다, 총대장님.”
제국의 황궁.
마찬가지로 현실의 소식을 전해 들은 성전 연합군이 내게 결연한 눈빛을 보내온다. 그중에서도 특히 남태민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의 기세가 매서웠다.
“녀석들을 곱게 보내줄 순 없습니다.”
균열 붕괴.
‘그동안 평화롭긴 했었지.’
내 덕분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최근 들어 붕괴 균열에 관한 대처법이 발전한 건 사실이었다.
아니, 애초에 균열이 붕괴하는 빈도가 극히 낮아졌다.
물론, 이 자리에 모인 성전 연합군 소속 플레이어는 모두가 아르카나 대륙 시절부터 베테랑이었다. 끔찍한 대격변 초창기를 직접 경험했다는 것이다.
‘정작, 총대장인 나는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만…….’
그래도 대격변 초창기, 균열에서 역류한 몬스터 때문에 극심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건 기억하고 있다. 덕분일까, 플레이어들의 심정이 짐작됐다.
짧은 침묵 끝.
결연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들끓던 대륙이 찰나지만, 잠잠해진 지금. 제국의 라이언 하트 기사단에게도 능히 출정할 여력이 생겼습니다, 총대장님. 부디 사자심의 기사가 모험가의 세계에 은혜를 갚을 기회를 허락해 주십시오.”
하르콘이었다.
‘현실에 머물면서 나름대로 정이 들었겠지.’
현재 제국엔 나의 부름으로 4가문과 대륙의 거물이라 불리는 세력들이 집결한 상황이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깃털펜으로 견적서를 휘갈겼다.
‘막말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균열을 클리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현실 시간으로 몇 시간 만에 말이지.’
심지어 긴급 업데이트 내역을 고려한 계산.
누군가는 과대평가가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과장이 아니다.
누구 거품으로 똘똘 뭉친 성전 연합군인데?
더욱이 진짜 상위 마왕들이 재림한 것도 아니.
맛보기에 불과한 상황이잖아?
게다가.
‘전력을 다한 적이 없는 건 마찬가지.’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을 이쪽에서도 들먹일 수 있다는 말씀.
그러나 언제나 이놈의 고집이 문제였다.
하여튼, 그놈의 규율 사랑……!
“유감스럽게도.”
나는 단호히 답했다.
“이것은 오롯이 나의 전쟁이다.”
그랬다.
사태의 원인이 마왕 쟁탈전이라는 게 문제였다. 여덟의 상위 마왕은 아르카나 대륙이나 현실을 집어삼키려고 균열을 통해 마수를 뻗쳐온 게 아니었다.
단순하게.
‘내가 못마땅해서 힘을 합친 거니까, 그 자식들.’
나, 이호열 뻔뻔해도 양심에 털은 안 났다.
물론, 크게 보면 이것도 결국엔 악마와의 전투니까.
두루뭉술하게 성전이라고 우길 수도 있었지만…….
결국, 내가 십좌를 차지한 탓에 일어난 사태가 아니던가?
그러니 스스로 결자해지하겠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세계 전역에서 균열이……!”
남태민이 힘겹게 말꼬리를 억눌렀다. 하르콘을 비롯한 아르카나인들은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플레이어들의 입장은 다른 거겠지.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 충분히 이해가 되니까.
‘걱정되겠지.’
사실 우려가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혹시라도 나의 혈육들이 붕괴 균열에 휘말리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드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더더욱 우려할 건 없다.
“내가 지켜내겠다.”
지켜봐서 알고 있잖아?
그랑펠의 끔찍할 수밖에 없는 혈육 사랑을……!
나는 지금 그랑펠의 성질머리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중이었다.
“그대들의 몫까지.”
그러니까 현실을 걱정하기보다는.
나를 걱정해 줬으면 좋겠구나.
부디, 나 이호열이 ‘흑화’에 시달리게 되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나의 부재 동안 아르카나 대륙을 부탁하겠다.”
이내, 나는 포탈을 발현했다.
고오오─
곧바로 포탈 너머로 발을 내디디려다가 몸을 돌렸다. 그랑펠식 화법 때문에 구구절절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줘야 할 것 같았거든.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대들이 있기에 내가 자리를 비울 수 있다.”
“……!”
순 억지에 불과한 그랑펠의 긍지에 따라줘서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다들. 그보다……. 나는 포탈의 빛무리 속에서 하나, 둘, 머릿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동공이 여덟 개라고 했지, 분명?’
……어째, 하나가 더 많은 거 아닌가?
나는 서열 10위, 부에르를 처치하기 전.
서열 4위, 가미긴을 지옥으로 처박아 넣었었다.
마계를 관조한 흑암룡의 말에 따르면 정점.
바알은 나머지 마왕들과 합의는커녕.
말도 섞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가미긴, 너 혹시 지옥에서 아직도 살아있는 거냐?
*
녹색 불꽃 속에서 타오르던 동공 하나.
‘기분 더러워.’
이예림은 애써 찝찝함을 털어내고 걸음을 재촉했다.
평소, TV에 지겹도록 나오던 균열 붕괴 시 대처 요령이 이럴 땐 도움이 됐다. 아니, 사실 그것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하는 게 맞는 걸까?
지하철에서부터 호들갑을 떨던 사내.
“미, 미친!! 저거, 마탑의 수석 마법사들이에요!!”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엔 공중을 부양 중인 남녀가 있었다.
척 봐도 범상치 않은 복장과 위압감.
웬만한 플레이어도 마주할 수 없는 마탑의 수석 마법사였다.
“저, 정말요?!”
일반인들이 놀라는 건 당연하다.
지금 상황에선 더더욱.
“사, 살았다……!”
“흐흑. 저,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마탑이랑 가까워서 살았네요. 세상에 살다 살다가 서울 자취방 월세 본전을 목숨 값으로 뽑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 그대로 마법.
붕괴 균열에서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이 말끔하게 증발하고 있었다.
살점이나 피 한 방울이 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대처였다.
긴장감이 풀려서일까, 곳곳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 보니까 더 대단하네요!”
갸웃거려지는 고개.
‘……그 정돈가?’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건 이예림뿐이었다. 아무래도 새벽마다 우리 집 효자, 호열이가 보내오는 날개 달린 편지 탓이겠지. 쓸데없이 눈이 마법에 익숙해져서 그런 듯싶었다.
이예림이 중얼거렸다.
“……잠깐만, 따지고 보면 호열이 직장 동료시잖아?”
호열이, 그거 마탑의 수석이랬으니까.
어떻게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건가? 그러면서 호열이가 마탑에선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봐야 하는 건 아닌가? 세상에 셋밖에 없는 누나로서 캐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쪽으로 대피하시면 됩니다!”
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겠지.
이예림은 어깨를 으쓱이곤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뒤편에서 굉음이 들려온 건.
“!”
격하게 흔들리는 땅.
충격 때문에 이예림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후욱.
피어오르는 흙먼지.
순식간에 숨이 막혀왔다.
간신히 뜬 눈 사이로.
“……응?”
돌무더기가 보였다.
방금 빠져나온 지하철역 출구가 무너진 모양이었다.
지하철 승객들을 이끌던 플레이어들이 외쳤다.
“다행히 피해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뭘까요?”
“역류한 몬스터는 마탑이 전담 중일 텐데…….”
“그렇다면 역시, 여기도 마안이 출현한 걸까요?”
“근데, 그거 공격 능력은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마안(魔眼).
“……!”
그 단어에 이예림의 귀가 쫑긋거렸다. 단순히 눈웃음을 짓는다고만 했었는데, 들은 말과 다르게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봤던 마안의 동공이었다.
‘특히 녹색 불꽃에 타오르던 눈동자가…….’
역시,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겠지?
어쩌면, 마안을 상대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 모르는 정보일 수도 있다. 플레이어들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고생 중인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 그러니까 하나뿐인 동생, 호열이의 직장 동료분들에게도.
저벅.
“저기요.”
결심한 이예림이 플레이어들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때였다.
동시에 공중으로 마안이 치솟았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형태로.
화르륵─!
“뭐, 뭐야?!”
“듣던 거랑 말이 다르잖아?”
“여덟 개가 아니라, 하나……?”
마안.
녹색 불꽃에 휩싸인 동공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당황도 잠깐.
마안을 향해 반사적으로 무기를 치켜드는 두 플레이어.
그러나 마안의 시야는 오직 이예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플레이어들의 수준과는 관계가 없었다. 사태를 파악한 선임 마법사들이 접근 중이었지만, 마안의 시선은 여전히 이예림에게 고정된 상태였으니까.
그래, 마안은 오직 이예림에게만 속삭이고 있었다.
-□□□□□. □□.
웬만한 플레이어도 버틸 수 없는 악마의 정신 공격이다.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은 저항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심지어 그 상대는 상위 마왕이었다.
마왕과도.
거악과도.
격이 다른 마계 태고의 존재.
단순히 마주하는 것만으로 실성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예림은 아니었다.
이 순간, 이예림의 시야에 걸린 건 마안만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하늘에 떠오른 녹색 불꽃에 타오르는 마안.
그보다도 더 아득한 하늘 위에 하늘에.
하나뿐인 동생.
호열이가 있었다.
그 호열이를 향해 일대의 모두가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직장 상사로서 존경을 받고 있는 건지.
군기를 빡빡하게 잡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탑의 수석 마법사들은 물론.
도심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날뛰던 몬스터들조차도.
호열이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예림이 중얼거렸다.
“만마앙복……. 천마재림…….”
그녀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거봐. 다음에는 천마. 내 말이 맞잖아?”
.
.
.
예상대로였다.
동공이 여덟 개였던 이유는 지옥에 떨어졌던 가미긴이 끈질기게도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짐작은 했었다. 부에르처럼 깔끔하게 처치해서 지옥에 보낸 게 아니었으니까.
물론, 예상하지 못한 상황도 있었다.
-받아가겠다. 너를.
녀석이 웬수, 이예림에게 저런 말을 지껄이고 있을 줄이야.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냥감과 불필요한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나는 그저 손을 들어 올렸다.
하늘보다 높은 하늘에서 상황을 바라봤다.
혼란한 도심.
날뛰는 몬스터.
넘실거리는 악의.
정말로 난장판이구나.
흑암룡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건지 이해가 된다.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악마조차도 복종하게 할 정도로. 그대는 압도적인 두려움을 심어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비로소 납득했기에.
나는 장갑을 착용했다.
신화급 아이템, 유낙서스의 유산.
만마앙복.
모든 악이 복종하고 조아린다고?
유감스럽게도.
[당신의 목소리에 노룡의 용언이 깃듭니다.]
이쪽은 악을 뛰어넘어 만물이 복종하는 만물의 왕이거든.
‘그러니까 알아들었지?’
절대 천마 같은 게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