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33화 (433/489)

◈ 433화. 안배를 들어라 (2)

시스템 메시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가 대폭 상승했다는 건 정말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는 뜻이고, 경고 메시지는 플레이어가 정말로 크나큰 위험에 빠졌단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마법(Master) : 계승된 비전 마법은 무한히 발전하여 대마법이라 불려도 부정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다. 대마법이야말로 마도의 정점이다.]

고깔모자 속.

각자가 아르카나 대륙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마법사.

선대들의 비전을 온전히 다루기 시작한 제시의 능력은.

휘청거리는 헬리콥터 안.

꿀꺽.

조슈아가 다시금 읊조리게 하기 충분했다.

“레벨은 숫자에 불과하다……!”

플레이어 공식 랭킹.

현시점에서 제시 하인네스의 레벨은 최상위권 랭커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아니, 최근 들어선 오히려 랭킹 10위권 밖으로 튕겨져 나갔던 그녀였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아르카나 대륙과 제로 산맥을 공략할 때.’

어째서인가, 제시는 좀처럼 모습을 비추지 않았었으니까. 덕분에 뜬구름 잡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탑주의 죽음이 제시의 정신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조슈아가 제시의 등장에 놀란 이유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당신은 늘 제 상상을 뛰어넘는군요, 제시 양.”

첫 만남부터 의외였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대마법사라는 히든 클래스를 거머쥐었다고 하기엔 제시는 열정이 부족해 보였다.

대격변 이후, AAU 미서부 지부장으로 취임한 뒤엔 그런 제시를 원망하기도 했다.

막대한 잠재력이 있으면서, 그 잠재력을 썩히다시피 사용하다니. 만약, 대마법사라는 히든 클래스가 차라리 록스나 드미트리에게 돌아갔더라면…….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었으니까.

“나중에 정식으로 사과하겠습니다.”

제시의 샤이닝 탈퇴 후.

조슈아는 사실상 자포자기 상태였다. 원래부터도 구속할 수 없었던 제시였거늘, 샤이닝에서 탈퇴한 순간부터 조국과 제시의 마지막 연결고리마저 끊긴 셈이었으니까.

“제시 양과는 정말로 끝났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제시가 눈앞에 있었다.

“그동안의 공백이 이해가 됩니다, 제시 양.”

진정한 대마법사의 모습으로.

쿠쿠쿵!

뉴욕.

상공에 떠올랐던 마안이 서서히 땅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AAU의 지부장, 조슈아의 아르카나에 관한 지식은 웬만한 플레이어보다도 방대하다.

덕분일까.

“메테오 스트라이크……!”

제시가 발현 중인 마법이 탑주. 그리고 호열이 발현했던 최상위 마법 『메테오 스트라이크』와 다르지 않은 간섭 과정을 거쳤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

물론, 마안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드르륵.

동공이 굴러간다.

자신을 끌어내리는 제시에서 역류한 몬스터에게로.

조슈아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건방지게 한눈을 팔아?”

여덟 개의 동공을 가진 마안.

마계 태고의 존재들.

AAU가 추정한 그들의 영향력엔 한계가 명확했다.

“주변에 악마족 몬스터는 없다고.”

플레이어의 시야에 떠올랐던 메시지 그대로.

그저 악마를 더욱 짙은 악의에 물들게 할 뿐. 균열 붕괴로 역류한 악마족이 아닌 일반 몬스터에겐 그들의 시선이 별다른 영향이 없어야만 했다.

그런데.

-조, 조슈아 지부장님!!

동시다발적으로 전해져 오는 무전.

-새,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습니다……!

[마계, 태고의 존재의 영향으로 일대가 타락합니다.]

“뭐, 타락이라고?!”

상태이상인가, 버프인가.

그것도 아니면 단순한 필드의 변화인가.

정확한 효과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큼은 명확했다.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저것들?”

붕괴 균열에서 역류한 몬스터들이 일제히.

제시에게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시가 공중부양 중이란 사실 따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탑을 쌓고 있어……?”

자신들의 육체로, 시체로.

제시에게 닿기 위한 산을 쌓고 있었다.

조슈아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비단 조슈아만이 아니었다.

“홀리 ㅅ…….”

“내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주여, 신이시여.”

미국을 넘어서 전 세계.

송출되는 화면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모두가 쉽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제시가 우려돼서 탄식을 삼키는 건 아니었다.

진정한 대마법사.

제시는 자신이 다른 차원에 진입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타락한 몬스터가 일제히 달려들었다고 한들.

파지직.

녀석들은 제시의 망토 끝자락에도 가까워질 수 없었다.

바스스.

방출되는 방대한 마력에 가루가 되어버렸다.

그런 제시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인류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웃고 있잖아……?”

한껏 구부러진 여덟 개의 동공.

녀석은 눈웃음을 짓고 있었으니까.

마치 모든 광경이 정말로 즐겁다는 듯.

여태까지 마주했던 악마.

마왕들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반응.

그리고 능력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몬스터를 타락게 하는 능력을 지닌 악마라니.’

조슈아는 고개를 털어냈다.

‘……아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그래, 악마는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 사는 존재다.

조슈아는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눈웃음을 지었든, 비웃음을 흘렸든.

마안은 제시의 마법에 으스러지고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조슈아는 이번 붕괴 균열 공략으로 습득한 정보를 타이핑. 빠르게 AAU로 전송했다. 다행히도 그런 조슈아의 행동은 AAU와 인류에게 크나큰 도움이 됐다.

그렇다.

[오사카 붕괴 균열 일대 미확인 비행 구체 출현.]

[호주 광산 붕괴 균열 일대 마안 출현.]

[서울 지하철 붕괴 균열 일대 마안 추정 구체 출현.]…….

마안은 뉴욕에만 떠오른 게 아니었으니까.

*

지구 상.

존재하는 모든 균열에 메시지가 떠올랐고.

균열마다 여덟 개의 동공을 가진 마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났습니까, 페이얀 선임?”

“네? 넵!”

“뭘 그렇게 먹고 있는 겁니까?”

“꼭 와보고 싶었거든요. 먹을 게 가득한 대형마트!”

“그거 계산은 한 겁니까?”

“……아.”

성공적으로 클리어.

폐쇄된 균열은 보다시피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붕괴한 균열은 달랐다.

뉴욕 상공에 마안이 모습을 드러냈듯.

다른 붕괴 균열에도 마안 출현 가능성이 남아있었다.

균열 일대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멈칫한다.

위이잉─

진동하는 스마트폰.

“홈페이지에 긴급 업데이트 내역 떴나 본데?”

“뭐라고 그래요?”

“저희도 같이 봐요!!”

【아르카나 대륙 전기 공식 홈페이지】

※긴급 업데이트 공지

『이제부터 마계, 태고의 존재들이 균열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균열의 붕괴도가 보다 빠른 속도로 상승합니다.

마안에게 잠식된 몬스터들이 타락합니다.

타락한 몬스터는 악마족과 같은 종족값을 지닙니다.』

“자, 잠깐만. 뭐 이딴 패치가 다 있대요?”

균열의 붕괴도가 빠른 속도로 상승한다는 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올 만한 일이었다.

긴밀하게 연동된 AAU, 플레이어, 균열 붕괴도였다.

그 계산이 조금만 어긋나도 막대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었거늘.

“근처에 당장 80퍼센트를 넘겼던 균열이 많았는데.”

“그게 내일이면 전부 붕괴한단 소리 아니에요?!”

“그보다 타락은 또 뭔 상태이상이래요? 같은 종족값이라니.”

악마족과 같은 종족값을 가진다.

“어쨌거나 그래도 진짜 악마는 아니니까, 빙의는 못 하지 않을까요?”

“아니, 그걸로 안심할 때가 아니에요. 방금 올라온 뉴욕 균열 동영상 보셨어요? 제시한테 달려들던 몬스터들! 저 눈동자, 마안이 멋대로 조종한 거라니까요?!”

“……그냥 놔두면 큰일 나겠는데요?”

불현듯 스쳐 가는 제로 산맥의 문구.

적정 레벨,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음.

제로 산맥의 몬스터들은 순수하게 레벨이 높았다.

악마조차도 쉽게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만약 그런 몬스터들이 마안의 영향으로 타락, 악마족과 같은 종족값을 지녀 마안의 지배에 휘둘리게 된다면…….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말 그대로 지구 멸망이잖아요……?”

평소 기이를 향한 탐구를 소홀히 하지 않은 덕분.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요.”

균열 폐쇄를 위해 출탑한 선임 마법사들도 상황의 심각성을 얼추 파악했다. 순수마력학 선임, 뱅그릿 톰. 그가 동행자인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 딘 카를에게 애써 말을 건넸건만.

“아르카나 대륙의 마안과는 생김새가 다르군.”

“그, 그런가요?”

끔찍하게도.

대화는 뚝뚝 끊어졌다.

괜히 벤쉬 선임이 원망스러워졌다.

‘아니, 분명 맹활약하셨다면서요?’

어째서 이번에도 불합격이신 건가요, 당신은!

뱅그릿은 출탑하지 못한 벤쉬를 떠올렸다.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그냥 지나칠 리는 없었을 테고,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벤쉬 선임의 출탑 신청이 허가되지 않은 거겠지.

마티스가 마안을 향해 읊조렸다.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를 기억하나. 뱅그릿 선임.”

“아, 넵.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메어리 님의 시험을 온전히 소화해 냈다더군.”

“넵, 그 소식도 접했습니다.”

뱅그릿은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어들을 통해서 전해 들은 소식이었다. 하늘에 떠오른 마안과 같은 마안을 바다 건너 땅에서 완벽히 제압했다고 했었지.

마티스가 말을 이었다.

“우리도 그녀의 성장에 뒤처져선 안 되겠지.”

“물론입니다!”

마티스와 뱅그릿.

두 선임 마법사가 각각 마안을 향해 텔레포트했다.

제시가 해냈듯.

선임 마법사들도 마안을 처리하는 데엔 큰 수고를 들이진 않았다.

“웃고 있어? 벤쉬 선임이 봤다면 엄청 화내셨겠는데.”

불쾌하게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만.

마안에게 전투 능력은 전무했으니까.

당장은 단순히 수고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콰콰캉!

계속해서 생성되고, 붕괴하는 균열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어디야, 이번엔 또?”

“지하철 균열이라는데요.”

“설마, 거긴가? 지하철에서 웨이브가 쏟아지는?”

“맞아요! 적정 레벨 150짜리.”

“이런, 다들 서둘러!”

지구상에 존재하는 균열의 숫자는 정확히 헤아릴 수 없다. 하루에도 몇백 개가 생성되었다가 몇백 개가 클리어되곤 하는 균열이었으니까.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정전인가……?”

모든 균열은 붕괴하였을 때.

그 위험도가 대폭 상승한다는 것이다.

별안간 멈춰버린 지하철.

승객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부정 타는 소릴 내뱉는다.

“서, 설마 균열 붕괴인가!”

“저기요. 괜히 호들갑 떨지 마세요.”

“아니, 제가 허튼소릴 하는 게 아니라 여기도 엄연히 플레이어들이 활동하는 지하철 균열이라고요! 환승역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사실상 하나로 연결된 균열이라고 무방……!”

그때였다.

철컹.

육중한 소리와 함께 지하철 기내문이 열렸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시민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들 도망…….”

털썩.

피투성이가 된 플레이어가 꼬꾸라졌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부정 타던 말처럼 균열이 붕괴했다는 것.

“괘, 괜찮으세요?”

“일단, 부축부터!”

“혼자 도망쳐봤자 몬스터랑 마주치면 끝이에요, 아시죠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라면 지금은 대격변 초창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덕분에 동요는 적었다. 승객, 모두가 매뉴얼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게 보기엔 낯설어도 균열이라는 게 결국, 현실에 아르카나 대륙의 풍경이 덧씌워진 거거든요. 그러니까 출구로 통하는 길은 아마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모두가 기억에 의존한 채 어둠을 헤치고 나아갔다.

하지만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지금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처, 천장에 뭐, 뭔가 있어요……!”

모두가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런 씹.”

꾸역꾸역 억누르고 있던 된 발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럼에도 평정심을 유지했다.

아까부터 재잘대던 승객이 이번에도 설명을 늘어놓는다.

“하나, 둘, 셋……. 여덟 개의 동공! 저게 그 마안이라는 건가 봐요. 생긴 건 엄청 징그럽지만, 공격을 해오진 않는다고 하니까 천만다행이죠.”

그가 덧붙였다.

“눈웃음치는 게 습성이라니까 괜히 놀라지 마시구요!”

……눈웃음을 치는 게 습성이라고?

슥.

고개를 돌려 주변 반응을 보아하니,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다들 대수롭지 않게 마안을 흘겨보고 걸음을 옮겼으니까.

하지만 한 사람.

이예림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저게 웃고 있는 거라고?’

어째서인가.

여덟 개의 동공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녹색 불꽃에 휩싸인 동공 하나가.

흥미로운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듯.

강렬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

.

.

같은 순간.

“여덟이라.”

전해졌다.

마계, 태고의 존재들이 모종의 합의를 끝마쳤다는 소식이.

새로운 십좌의 마왕.

“연대 책임이기에.”

호열에게도.

“처분의 강도는 어느 때보다 무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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