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30화 (430/489)

◈ 430화. 각오는 되었나 (2)

히든 클래스.

장담도 모자라서 일반화할 수 있었다.

히든 클래스야말로 모든 플레이어에게 선망의 대상이라고.

‘나라고 예외겠냐?’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기억이 선명하다.

악마 사냥꾼에 꽂혔던 내가 부러워했던 몇 안 되는 플레이어들.

‘전부 히든 클래스 전직자였으니까.’

드러나지 않는 위대함.

모순된 취향을 가졌던 나.

이호열의 까다로운 취향을 흔들 정도로.

‘히든 클래스에 관한 관심도가 어마어마했었지.’

단순히 히든 클래스 전직자라고 유명인사가 되질 않나.

고위 NPC들이 존댓말을 해주지 않나.

더 나아가선 방송국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지 않나…….

왜, 히든 클래스로 전직하기 위해서 계정을 삭제했다가 다시 생성해서 육성하는 플레이어도 넘쳐날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겠지.

물론, 관심도와 능력은 별개였다.

몇몇 히든 클래스를 제외.

육성 난이도에 비해 결과 값이 형편없는 경우가 많았거든.

그땐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도 못 뜬다고.

그럴 거면 그런 히든 클래스, 나한테 달라고.

내심 속으로 흉을 봤었는데.

‘……경험해 보니까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악크샨 최후의 악마 사냥꾼.

히든 클래스와 다를 바 취급을 받고 있는 내가 아니냐? 덕분에 육성법 하나 없이 캐릭터를 육성하는 서러움을 잘 알게 됐다는 거지. 오죽했으면 [행운] 스탯에 포인트를 투자했겠냐고, 내가.

그러나 히든 클래스도 히든 클래스 나름이다.

떠올려보자, 애초에 스칼이 왜 유명해졌는데?

용기사, 거창한 클래스에 걸맞은 강함 때문이었다.

대격변 이후 최근까지.

스칼은 길드도 없이 홀로 랭킹 1위를 수성해 왔었다. 최강의 바바리안, 남태민이 성전 연합군에 합류한 스칼을 견제하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래서 용기사는 어떤 스탯이 주 스탯인데?”

-“그걸 내가 알려줘야 하는 건가?”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뭔 말을 그렇게 까칠하게 해? 누가 보면 내가 널 견제하는 줄 알겠다. 됐거든? 나도 바바리안에 관해서 알려주나 봐라.”

그렇다.

그게 이 순간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유였다.

흑암룡의 입에서 나온 말을 되새겨본다.

보통 용언도 아니고, 지배자의 용언이라니.

보통 히든 클래스도 아니고.

[히든 클래스, ‘드래곤 로드’로 전직하시겠습니까?]

드래곤 로드(Dragon Lord)라니……!!

‘스칼에겐 좀 미안한 말이지만.’

[용기사]랑은 무게감이 다른 클래스명이다. 용기사가 고작 드래곤 하나를 길들인 느낌이라면, 이쪽은 모든 드래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란 느낌이 물씬 풍겨왔으니까.

‘전직 난이도를 봐도 그래.’

전직 조건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조건으로는, 용언을 완벽히 이해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 있지 않는가?

나는 슬그머니 유낙서스의 유산, 장갑을 바라봤다.

‘결국, 내게 그 자리까지 남긴 건가.’

이전 드래곤 로드는 분명 유낙서스였겠지.

말년에야 태초의 악, 녀석의 이간질 때문에 그 자리에서 내쫓겼던 유낙서스이긴 하다만……. 그래도 마지막엔 다시 드래곤들의 인정을 받아 그 역할을 톡톡히 했던 유낙서스였다.

흑암룡이 내게 말을 잇는다.

“그대의 용언에는 강한 힘이 깃들 것이다. 설령 악과에 고통받고 있는 드래곤들이라고 할지라도, 드래곤 로드의 용언이라면 폭주하는 그들을 막아설 수 있을지도 모를 터.”

그와 동시에 눈앞이 연달아 점멸한다.

[전직 시, 고유 스킬 ‘전룡소집’을 습득합니다.]

[전직 시, 고유 스킬 ‘전룡활강’을 습득합니다.]

[전직 시, 고유 스킬 ‘전룡통제’를 습득합니다.]…….

메시지가 계속 반짝거리는 게 마치 호객 행위를 위한 간판 같구만. 나, 이호열. 솔직하게 말해서 두 눈 딱 감고 전직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근본이 다르잖아, 근본이.’

히든 클래스, 드래곤 로드.

천대받던 악마 사냥꾼하고는 ‘격’이 다르다는 거다.

다른 걸 다 떠나서.

‘클래스 전용 스킬만 봐도 견적이 나오잖아?’

달랑 [천적관계] 하나만 던져주던 악크샨이랑은 비교가 안 되는 대접이다. 그러나 나의 표정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철면피 때문만은 아니다. 나도 내심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여기까지 와서 관둘 수 있겠냐고.’

악크샨에서 발을 빼기엔 말이야.

너무 깊게 파고들어 버렸거든.

무엇보다 악크샨의 고유 스킬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깟 [천적관계]보다 드래곤 로드로 전직하는 게.

전투력이 몇 배는 더 상승하지 않겠냐고?

어쩌면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야 보통 히든 클래스가 아니니까.’

그러나.

내가 포기할 수 없다는 스킬은 [천적관계]뿐만이 아니다. [구마의식]. 악마족 몬스터가 플레이어에게 끔찍한 재앙이라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상태이상, [빙의]에 있었으니까.

‘플레이어에 빙의한 악마를 죽이면.’

빙의된 플레이어도 사망하게 되니까.

그러나 [구마의식] 속에서.

악마 사냥꾼의 공격은 오직 악마에게만 피해를 주는 법.

그러니까 나는 답했다.

“유감이구나, 흑암룡.”

동시에 메시지가 점멸했다.

[히든 클래스, ‘드래곤 로드’ 전직을 거절하셨습니다.]

거창하게 읊조렸다.

“사명을 내던질 순 없는 법.”

사명이라.

그게 빌어먹을 취향 덕분인지, 그랑펠식 화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만. 그랑펠, 널 위해서라도 악마 사냥꾼을 포기할 순 없겠지.

‘같이 밝혀야 하잖아, 악크샨 내전에 얽힌 과거를.’

여태껏 진행한 클래스 퀘스트가 아까워서라도 말이지.

“그런가…….”

흑암룡에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거기엔 우려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드래곤 로드의 막강한 능력 없이는 앞으로 닥칠 시련에 대응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건 나도 동감이다.’

하지만 내가 또 마냥 생각이 없는 게 아니거든?

그래, 내가 누구냐?

발버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치는 이호열이다.

우연하게 알게 된 드래곤 로드의 힘을 그냥 놓칠 정도로.

나는 뒤끝 없는 성격이 아니란 거다.

흑암룡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젠 네가 사명을 받들 때다, 흑암룡이여.”

드래곤 로드라는 거.

꼭 진짜 드래곤이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플레이어인 나도 할 수 있는 거라면…….

전설이 실체화한 흑암룡, 너도 할 수 있을 거 아냐?

“사명이라니,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올라라.”

“올라라?”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를 위해 거머쥐어라. 드래곤 로드의 자격을.”

“……!”

팟.

그와 동시에.

“!”

찢긴 차원 너머.

히든피스, ‘용의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드래곤들은 없었다.

화룡은 불 속으로, 빙룡은 빙산으로, 뇌룡은 폭풍우 속으로, 해룡은 바닷속으로. 각자가 악과의 발현을 억누르기 위하여 흩어진 상태였으니까.

공허한 용의 신전.

나는 그 허전한 공간에서 한 장소를 응시했다.

드높은 바위산 꼭대기.

바로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가 머물던 자리였다.

내 꼿꼿한 시야를 따라서 흑암룡도 시선을 옮긴다.

나는 입을 열었다.

“더욱더 높은 곳에 올라 관조하고, 조율하라.”

“…….”

“그것이 내가 네게 내리는 사명이다.”

그렇다, 흑암룡.

네 말대로 앞으로 닥칠 시련을 생각하면.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입장에 처한 나다.

‘어떻게 접하게 된 드래곤 로드의 힘인데?’

그랑펠은 몰라도 나는 이대로 놓칠 순 없거든.

내가 거머쥘 수 없다면 나의 분신 중 하나인 흑암룡.

네가 거머쥐면 되는 일 아니겠어?

“나를 대신할 각오는 되었나.”

그런 나의 욕심 가득한 속내를 알아차린 걸까.

흑암룡이 내게 고개를 조아린다.

거대한 날개로 유낙서스의 자리를 향해 비상한다.

“그 사명을 엄중히 받들겠나이다.”

[전설, ‘흑암룡 이호열’이 변화합니다.]

변화? 뭐, 다 좋은데…….

[전설, ‘드래곤 로드, 흑암룡 이호열’을 습득합니다.]

……어째 풀네임처럼 갈수록 길어지는 것 같다?

*

지하철 내부.

끼릭─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웨이브가 쏟아진다.

“하씨. 죽을 뻔했네!”

“이래서야 언제 아르카나 대륙 땅 밟아보려나.”

“얘기 들었어요? 그쪽에 적용 중인 버프 얘기요!”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공존하는 균열.

적정 Lv.150짜리 균열에 필요한 건 밝고 희망찬 미래였다.

그래도 플레이어이기에 능력만큼 벌어갈 수 있었거늘.

‘아직 멀었어.’

여신교단 소속 기사, 윤태섭은 입맛을 다셨다.

같은 생각을 한 걸까?

파티원이 입을 열었다.

“지금 아르카나 대륙엔 현실에선 상상도 못 할 버프가 상시 발동 중이라고 했었죠? 제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경험치 획득량 상승 버프에 스킬 숙련도 버프에…….”

“그것뿐이게요?”

좔좔좔.

파티원들이 늘어놓는 버프 목록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멀쩡한 배가 아려오는 듯했다.

윤태섭은 적당히 귀를 닫았다.

‘저걸 듣고 있어 봤자, 뭐 하냐?’

플레이어들이 전해오는 아르카나 대륙 소식은 놀라웠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던 대륙 전기 시절이 떠오를 정도로.

그러나 현재 아르카나 대륙은 고레벨 플레이어들의 영역이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다른 파티원들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위험하긴 해도 멸망을 향해가던 때보다는 상황이 훨씬 낫다면서요? 저희도 한번 가보는 거 어때요? 아니다 싶으면 바로 돌아오면 되고……!”

“암만 그래도 300레벨은 찍어야 한다던데요?”

“네? 사, 삼백이요?!”

윤태섭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300레벨도 부족했다.

정점, 이호열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제로 산맥]이 현실에 업데이트된 이후, 상위권 플레이어들은 빠른 속도로 레벨을 올릴 수 있게 됐다.

마탑은 물론, 라이언 하트 기사단, 유스라 왕국…….

플레이어를 위한 아르카나 세력의 적극적인 지원 또한 간과할 수 없었다. 윤태섭, 자신만 하더라도 흔한 전사에서 여신교단 소속 기사로 전직.

‘그래도 뉴비 티는 벗었지.’

윤태섭은 굳게 주먹을 쥐었다.

‘물론, 늦게 각성한 만큼 뒤처졌지만.’

과거보다 기회는 늘어난 게 사실이었다.

확신할 수 있는 이유? 윤태섭은 랭커들의 빼놓지 않고 인터뷰를 챙겨봤으니까. 덕분에 100레벨마다 존재한다는 ‘벽’에 관해서도 알고 있었다.

윤태섭이 묵묵히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하지만 레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성장 속도는 더뎌지는 법이죠. 랭커들이 아르카나 대륙을 밟았다고 해서 격차가 더 벌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위쪽도 위쪽 나름대로 고충이 있을 테니까.”

신세를 한탄할 시간에 한 마리라도.

몬스터를 더 사냥하겠다.

윤태섭이 지하철 좌석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순간이었다.

“에이, 머리가 너무 꽃밭이시다~”

빙글빙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던 여자가 빈정거렸다.

물론, 윤태섭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대충 흘려넘겼다.

저것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으니까.

근데……. 이건 조금 심하지 않나?

“우리가 이렇게 죽어라 노력해 봤자, 차이는 벌어질 수밖에 없다구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 같은 밑바닥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게 고작이라니까? 내가 봐서 알아~”

윤태섭은 파티원들을 둘러봤다.

다들 얼굴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여자가 입을 열 때마다 사기가 팍팍 죽는 느낌이었다.

‘저거 뭐야, 대체?’

어이가 없었다.

그런 수준을 넘어서 얄미웠다.

객관적으로 여자는 강했다.

‘……저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파티를 캐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윤태섭은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적을 쉽게 처치하고 있으면서도 저런 나약한 소릴 내뱉다니.

윤태섭은 어깨를 으쓱였다.

‘별수 있나, 꼬우면 내가 나가야지.’

이번 파티와의 인연은 여기까지.

윤태섭이 생각을 정리한 순간이었다.

지하철이 멈추고 문이 열렸다.

“중간 지점인데, 다들 잠깐 쉬었다가 가시죠?”

파티장이 먼저 하차하며 의견을 냈다.

‘유스라에서 파티를 찾아서 내일 다시…….’

윤태섭은 그쯤에서 현실로 귀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하철에서 내린 윤태섭의 발이 갑자기 멈췄다.

앞서가던 파티장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

문득,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보고 있는 윤태섭.

“어, 어?”

그 시야를 따라 고개를 들자 보여선 안 될 게 보였다.

“처, 천장이?!”

현실의 지하철과 아르카나 대륙의 열대림.

그 풍경이 정확히 절반씩 섞인 균열이었다.

보여야 할 건 식물에 뒤덮인 승강장 천장이어야 했거늘.

“뭐, 뭐, 뭐죠, 저건……?”

끔뻑.

끔뻑.

끔뻑.

머리 위에 천장은 없었다.

거대한 여덟 개의 눈동자.

그 초점을 제각각 움직이며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

파티장은 쉴 새 없이 말을 내뱉었다.

“혹시 균열의 네임드 몬스터인가, 아니, 그런 정보는 없었는데……? 이, 일단 다시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서 검색을 좀……!!”

그러나 영양가는 없었다.

모두가 혼란에 빠진 순간이었다.

오직 메시지만이 이성적으로 점멸했다.

“!!!”

그렇다.

같은 시각.

균열에 진입한 모든 플레이어의 시야에.

[마계, 태고의 존재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여덟의 상위 마왕.

그들이 모종의 합의를 끝냈음이 선포된 것이었다.

동시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으, 으아아아악!!”

마계의 함성이 현실에서는 곧 끔찍한 비명.

“?”

윤태섭이 고개를 돌리자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여자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던 파티원의 목덜미를.

격렬하게 물어뜯고 있는 여자, 아니, 악마가.

[모든 악마족 몬스터가 악의에 물듭니다.]

“……!!”

[만마앙복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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