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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29화 (429/489)

◈ 429화. 각오는 되었나 (1)

월스와일은 탄식을 삼켰다.

‘상상했던 그 이상이시군.’

자신의 손재주를 백분 발휘한 건 기본. 평소엔 신경을 쓰지 못했던 미적 감각도 최대한으로 쥐어짜 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호열의 차림새에 걸맞은 장비를 제련하기 위함이었다.

‘하나하나가 대륙에 둘도 없을 명품이니까.’

무엇 하나도 뒤편으로 잊히기엔 아쉽다.

때문에 월스와일은 허전하던 호열의 손을 떠올렸다. 드래곤의 가죽으로 만든 장갑이라면……. 앞으로 귀한 일을 하실 손을 온전히 보호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가 너의 음성을 들었다. 전설의 흑암룡이여.”

“……!”

장갑에는 제작자인 자신조차도 예상치 못한 위대한 능력이 깃든 듯했다. 아르카나 출신이기에 시스템 메시지는 볼 수 없거늘. 그럼에도 월스와일, 스스로가 변화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고오오─

문득, 은은한 빛을 내뿜기 시작하는 월스와일의 짤막한 양손.

아르카나 대륙 최초로 [신화] 등급 아이템을 탄생시키면서.

월스와일의 손재주가 또 한 번 진보한 것이었다.

“?!”

그러나 자축할 새는 물론이요, 더 나아가서는 빛을 발하는 자신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볼 여유조차도 월스와일에게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덜컹!

“체인워커, 무슨 일인가?”

아이언 캐슬 호.

드워프의 성채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니까. 짧막하기에 상대적으로 균형을 잡기에 유리한 드워프들조차도 휘청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청거리고 있었다.

간신히 붙잡은 기둥.

드워프 지도자, 체인워커가 다급히 외쳤다.

“폭풍우인가?”

아무리 위대한 기술이라고 한들, 자연 앞에서는 겸손해야 한다.

아이언 캐슬 호도 마찬가지다.

폭풍우라면 맞부딪히는 게 아니라 우회하여 피해야 했거늘.

“아닙니다!”

“그럼 난기류인가?”

“그,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뭣?”

그렇다면 어째서.

아이언 캐슬 호가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단 말인가? 그에 관한 답은 곧, 아이언 캐슬 호에 탑승한 모두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스스스.

드리우는 어둠.

하늘의 성채.

아이언 캐슬 호보다도 거대한 ‘무언가’가 접근해왔다.

“너무 커서 보이지 않을 정돕니다!”

위협도, 공격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접근하는 것만으로.

아이언 캐슬 호를 뒤흔들고 있단 것이었다.

체인워커는 곧장 결단을 내렸다.

베히모스의 아가리가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지금.

최악의 가능성을 상정했다.

마계에서 기어 올라온 초거대 괴수를 상상했다.

“전원 대응 사격을 준비하라!”

마계의 위협은 더 이상 먼 훗날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드워프들.

그러나 다행히도.

팽팽한 긴장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또각.

모든 게 휘청거리던 와중.

조금의 미동도 없이 곧게 뻗은 두 다리.

호열이 발을 내디디며 입을 열었으니까.

“두려워할 것 없다.”

“……총대장님?”

“말하지 않았는가.”

“무엇을 말씀하시는…….”

……아니, 이미 말씀하셨다?

‘서, 설마 흑암룡을 말씀하시는 건가?’

그러나 의문은 여전했다.

흑암룡은 실존하는 게 아닌, 전설이 실체화된 것이라고 총대장님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직접 목격했던 바로도 그랬다.

드래곤 중에서도 유달리 거대하고 치렁치렁한 날개를 지닌 흑암룡이었다. 만약, 흑암룡이 진짜 드래곤처럼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면.

흑암룡이 안토니움 상공을 비행한 순간.

안토니움의 건물 대다수는 그 충격으로 무너졌어야 했다.

그러나 안토니움에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었다.

‘그보다.’

체인워커가 흠칫했다.

철컥.

호열이 아이언 캐슬 호 갑판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으니까.

정말이지, 의문이 가득한 행보였다.

체인워커가 다시 호열의 말을 되새겨보던 순간이었다.

‘분명 전설 속 흑암룡의 음성을 들으셨다고…….’

그 동공이 잘게 떨렸다.

“……!”

목소리가 들린다고 하셨던 게 괜한 말씀이 아니셨다면?

설마, 저 거대한 흑암룡의 힘을.

비로소 온전히 다루게 되셨다는 의미라면?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거늘.

추측이 맞든 아니든.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체인워커가 호열의 뒷모습에 비장한 배웅을 덧붙였다.

“부디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길 바라겠습니다.”

*

[효과 : 신화에 기록될 위대한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가 선포했다. “나의 유산으로 하여금 클라우디께서는 용언을 이해하고 내뱉을 수 있게 되시리라!”]

그렇다, 모든 것이 업보로다.

‘흑암룡, 그놈의 흑암룡!’

만약, 내가 아닌 다른 플레이어가 유낙서스의 유산을 손에 넣었다면 이런 상황과는 마주하지 않아도 됐겠지. 왜, 용언이란 걸 배우는 데에만 집중해도 됐을 거다.

‘드래곤 피어, 드래곤 브레스. 김칫국 마시기도 바쁠 테니까.’

그러나 업보가 있는 나는 그럴 수 없다.

아이언 캐슬 호의 외부 갑판.

스치는 폭풍 속에서.

나는 꼿꼿하게 서서 사태의 원인을 바라봤다.

그렇다, 내게 말을 걸던 전설 속의 흑암룡과 마주했다.

스오오.

……저거, 악마 사냥꾼의 치렁거리는 복장에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하다니까? 쿠드하낙스, 프로즈낙스 같은 드래곤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거대한 날개는 굳이 펄럭이지 않아도 흑암룡을 날 수 있게 하는 듯했다.

이내, 녀석의 입이 열린다.

“비로소 나의 부름에 응답하는군, 클라우디여.”

아무래도 그동안 애타게 나를 불렀던 모양이구만.

“언제나 그대의 곁에 머물렀거늘.”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조금 부담스러운데……? 뭐,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흑암룡은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을 떠도는 [전설]이 실체화된 거니까.

‘무슨 말을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야 나는 방금 막 용언을 제대로 이해하게 됐으니까.

한마디로 내 능력이 모자라서 네 말을 듣지 못했단 거지.

그러나 멋쩍은 침묵에서 뭘 오해한 거냐.

“이제야 내가 그대와 마주할 자격을 갖췄단 거겠지.”

……아니, 단순히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대답하지 못했던 것뿐이라니까? 하지만 이놈의 입방정은 이때다 싶어서 대답하고야 만다.

“용건을 말하라, 흑암룡이여.”

내 팔자야.

어쨌든.

부디 합당한 용건이 있기를 바란다.

흑암룡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가 봐도 오해할만한 말을 내뱉고 갑판으로 나오는 바람에.

드워프들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니까?!

“그대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

타들어 가던 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흑암룡은 내게 등을 내어줬다.

나는 지하철에 타는 것처럼 흔들림 없이 흑암룡의 등에 올라탔다. 말에 올라타는 것처럼 엉덩이를 대고 앉는 게 아니라 여기서도 꼿꼿하게 기립했다.

[업적 : 만물의 왕, 드래곤에 올라타다]

[효과 : 모든 탈것에 관한 숙련도가 최대치로 상승]

[지속시간 : 영구지속]

획득한 업적의 효과 덕분에 최대치에 오른 탈것 숙련도.

아이언 캐슬 호에서도.

나만 휘청거리지 않던 게 괜한 이유가 아니란 뜻.

‘그나저나.’

전설의 흑암룡아.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냐?

입방정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

널리 울려 퍼질수록 실체와 상관없이 강해지는 전설이다.

그런 의미에서 흑암룡?

‘진짜 드래곤 뺨칠지도.’

아르카나 대륙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현실에서 흑암룡의 이름?

SNS에서만 수백억 번은 회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

완전히 다른 두 세계에 울려 퍼진 흑암룡 전설.

그런 의미에서 흑암룡 또한 [『기이』]의 존재라고 해도 무방하겠지. 과연, 드래곤들이 차원을 찢었던 것처럼 흑암룡도 차원을 찢으며 공간을 이동할 수 있었다.

이윽고, 흑암룡이 용건을 꺼냈다.

“위협이 엄습해오고 있다, 클라우디여.”

그 찢어진 차원 틈 너머.

낯선 풍경이 보인다.

떠오르는 메시지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업적, ‘마계를 목격한 자’를 습득하셨습니다.]

저게 마계구나.

쉽게 표현해 마계는 폭풍전야와 같았다.

그나저나 너 대단하다, 흑암룡?

아르카나 대륙을 배후에서 관조한다는 게 괜한 말이 아니었구나?

‘이런 식으로 마계를 엿볼 수 있다니.’

나는 상상도 못 한 방법이고, 실천도 못 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용언을 깨우쳤으니 연습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만.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된다.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 호열아.’

저 흑암룡의 모습이야말로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생각하는 나의 강함일 테니까. 대체 거품이 껴도 얼마나 낀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군.

그럼에도 나는 뻔뻔하게도 선언했다.

“위협이라. 내게는 흥미거리조차 되지 못하거늘.”

흑암룡이 다시금 거대한 날개를 펄럭였다.

“알고 있다. 그대에게 악마란 그런 존재이니까. 내가 관조한 마계에서도 그대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위협적인 십좌의 마왕으로 불리고 있다.”

……뭐야, 마계에까지 소문이 퍼졌어?

내 풀네임까지 퍼진 건 아니겠지?

흠칫하는데, 흑암룡이 날개를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마계에서 십좌의 마왕은 태고의 존재,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존재로 통한다. 허나, 그대가 태고의 존재 중 하나인 부에르를 멸하고 십좌를 쟁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흑암룡이 어째서 나를 칭찬하는 건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자세한 사정을 듣고 나니까 납득할 수 있었다.

나 생각보다 엄청난 짓을 저질렀구나……!

익히 봐서 알다시피 마왕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다.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게 일상이란 거지.

그건 상위 마왕이라고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말석이라도 버텨왔다는 건…….’

다르게 말하자면.

다른 아홉의 상위 마왕과 견주어도.

적어도 버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거였다, 부에르에게는.

하지만 나는 부에르도 모자라서 부에르의 왕좌를 노리던 마계의 리치, 디스커스까지 동시에 처치한 셈이었으니. 흑암룡이 음험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렇다. 십좌의 마왕들 또한 클라우디, 그대를 경계하고 있다. 마계 태고의 역사상 최초로, 상위 마왕들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그대를 멸하기 위해 연합을 구축하고 있다. 그것이 내가 관조한 마계의 흉계다, 클라우디여.”

과연, 애타게 나를 부를 만한 일이긴 하구나.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서열 1위 바알은 그 연합에 참여하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어쨌든, 괜히 잠잠한 게 아니었던 거지?’

말했다시피 마왕 쟁탈전.

십좌의 증명은 이미 시작된 상태였거늘.

베히모스의 아가리가 잠잠하던 이유가 이제야 납득이 된다.

단순히 나를 향한 두려움에 악마들이 움츠리고 있다는 것.

그러나 그 공포는 오래가지 않겠지.

십좌 중에서 나와 바알을 제외한 여덟의 상위 마왕.

녀석들이 의견이 일치하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마계의 악마들이 아르카나 대륙으로 쏟아지기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 녀석들이 전부 하나같이 내 십좌를 노릴 수도 있단 뜻이었다!

‘쉽지 않겠는데.’

단순하게 마계에 몸을 던질 생각만 하고 있었거늘.

상위 마왕이 자기들끼리 연합을 구축하고 있었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이거, 어깨가 심하게 무겁다.’

악크샨 내전과 얽힌 그랑펠의 과거.

그 무게를 잠깐이라도 덜어내려고 유낙서스의 유산을 확인했거늘.

이런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충격이지만,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내가 응답하지 않아도.

스스로 아르카나 대륙을 관조하고 있다고 했었나.

이어지는 흑암룡의 말이 꽤나 든든하게 들려왔거든.

“클라우디여. 그대는 더욱 성장해야 한다. 상위 마왕의 악의에 이성을 잃은 악마들,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그들조차도 복종하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두려움을 심어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아니, 말뿐이 아니라 방향성까지 제시해 줬으니까.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지배자의 용언이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는 거다.

[히든 클래스, ‘드래곤 로드’로 전직하시겠습니까?]

……정말로 큰 메시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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